1.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입니다 (10월 16일)
세 번째로 여러분과 만남을 갖게 된 것을 기쁘고 반갑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학교 이름은 무엇입니까? 민족사관고등학교이죠. 저는 여러분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우연히 여러분 학교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영어로 여러분 학교의 이름이 Korean Minjok Leadership Academy 더군요. 1996년 최명재 이사장님께서 이 학교를 설립하실 때,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세계적 지도자 양성' 을 비젼으로 학교를 설립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또 민사고 학생 이외에 여기 있는 많은 학생들도 다니는 학교가 있고, 비행기를 타서 좀 불안정하긴 하지만 성적이 있고, 교회가 있고, 가족이 있고, 얼짱이던 아니던 몸짱이던 아니던 각자가 갖고 있는 외모가 있고, 나름대로의 기질, 성격, 장점, 단점 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독교를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예수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과의 근본적인 차이점 중에 하나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우리가 아까 말했던 어느 학교에 갔는지, 성적이 어떤지, 또 다니는 교회, 가정 환경, 외모, 기질, 성격, 장점, 단점 등을 통해서 그 사람을 평가하게 마련입니다. 사실 오늘날 청소년들의 학업 환경이 입시 위주의 경쟁적 교육의 폐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이유도 사실은 그러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교육 정책을 구상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저희가 살고 있는 원주(아마 강원도 전체가 그럴 것입니다) 에서는 고3들도 물론 그렇겠지만, 고3 이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눌리는 때가 바로 중3입니다. 그 1년 중에서도 요맘 때가 그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입니다. 바로 어떤 고등학교에 가야 할까에 대한 고민 때문이죠. 원주는 고등학교에 평준화가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내신 성적에 따라서 인문계냐 실업계냐가 갈리게 되고, 인문계에서도 1순위부터 6순위까지가 나뉘어 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놓인 지금 이 시기가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 오는 학생들도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대개 성적이나 학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참 불행한 일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것은 그들 안에, 영원하고도 확실한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이 없기 때문에 으레 그러려니 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학생들과 어른들 조차도 학력을 중시하는 일들을 봅니다. 요즘은 그래도 많이 사라졌지만, 한 때는 각 교회의 임원들도 어느 고등학교를 다니느냐에 따라서 서열을 매겼던 경험도 한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 가서도, 계속 자기보다 좋은 학교에 간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또 좋은 학교에 간 사람들도 끊임없이 자기보다 성적이 높은 아이들과 자신을 비교해서, 거기서 삶의 안정감을 찾곤 합니다.
요즘도 동방신기, SS501 혹은 한류스타인 배용준, 보아, 비 등에게 열광하는 아시아의 수많은 청소년들이 극성이지만, 제가 청소년시기일 때는 좀 더 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언젠가 몇 주 간격으로 여러 연예인들이 잇따라 자살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남성듀오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 '이등병의 편지' 라는 노래를 부른 언더그라운드 포크 가수 김광석, 그리고 '내 눈물 모아' 라는 노래를 남기고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까지 했음에도) 떠난 서지원까지.
그 때 한창 그들의 팬이었던 청소년들이 오빠를 따라 가겠다고 자살을 시도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얼마 전에 영화 배우 이은주가 자살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도 많은 충격 속에 그 소식을 접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카이스트' 라는 드라마에서 그녀의 연기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차츰 비중 있는 역을 맡았었고, 주가가 한창 오를 즈음, 그녀의 자살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발인 예배에서 가수 바다가 이은주를 추모하며 부른 노래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단순히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죽을 일이 많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성적, 이성 혹은 친구 문제, 외모 등으로 한창 고민하고 있지만, 우리가 인생을 차츰 살아나갈수록 우리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질 것이며, 이 사회는 점차 우리에게 더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겉으로 볼 때 여러분은 다 밝고 명랑하고 멋지지만, 여러분의 내면에는 사실 다들 복잡한 고민들이 산재해 있을 것이며, 비단 여러분 뿐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런 고민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바로 그런 외적 조건들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요 1:12) 의 삶의 정체성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목적, 힘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가장 먼저는 모든 만물, 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십니다. 시편 139편 14절 ~ 16절을 보면 '내 형체가 모태에서 이루어지기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이미 보셨다' 고 말씀하셨으며, 에베소서 1장 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조물주이신 그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목적 - 즉, 첫째는 그분과 더불어 교제하시려고, 두 번째로는 우리를 그분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고(사 43:21), 광의적으로 본다면 그분을 영화롭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신자던 불신자던) 은 그 어떠한 삶의 많은 목적보다도, 인간을 애초부터 조성하시고, 지금도 만물을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 그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궤도를 이탈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타락의 길을 걷게 되며, 하나님이 없는 어떠한 선행, 철학, 사상도 그의 삶을 진정 기쁘게, 만족케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음악을 전공할 당시를 기억해 봅니다. 대개 모든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서도 하지만, 그 자신의 창조물 - 그것이 음악, 문학, 미술, 무용, 연기 어떠한 것이던 - 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자신의 정체를 둡니다. 아무리 평소에 여러 시간을 연습하고, 자기 딴에는 연주하면서 만족스러울만큼이 되었어도, 음악을 사람들앞에서 연주하는 채 10도 안되는 그 순간 그 사람의 성과는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그 당시 제 정체감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연주를 망친 날에는 정말 죽고 싶을 정도가 됩니다. 또 연주를 잘했다 할찌라도 그 허무감에... 술을 마시거나, 혼자 그 허무감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어떠한 것을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그 무엇도 여러분의 삶의 그 빈 자리,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친한 친구, 이성, 나중에 여러분이 만나게 될 여러분의 배우자... 또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그 학문 자체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순 없습니다. 왜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절대적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여러분의 삶의 정체감을 두십시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이 어렵고 험난한 세상 속에서 자살하지 않고,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왜 집을 떨어져서 거의 사적인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잘먹고 잘살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로 복음 전도의 삶을 우리가 뛰어들게 될 직업 현장에서 살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선교적 목적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분명히 허탈한 때가 올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절에서 솔로몬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고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여러분의 삶의 정체감을 두십시오. 그렇다면 절대 여러분의 삶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Henri Nouwen이라는 카톨릭 사제가 있습니다. 이분은 미국의 유수한 예일, 노틀담, 하버드에서 신학과 심리학 교수로 있던 소위 엘리트이십니다. 게다가 이 분은 신구교를 통합하여 가장 영향력 있는 영성가로 손꼽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1981년 예일대에 재직 중 자신의 그런 풍요함에도 만족치 못하여, 페루의 빈민가에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하버드에 돌아와서 강의를 하였지만, 여전히 그는 영혼의 안식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강단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정신 지체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로 들어가 1996년 9월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을 합니다. 왜 그는 유명한 자리를 떠나, 낮은 자리로 내려왔을까요? 바로, 그의 정체는 프로필도, 명성도 아닌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이 영원한 생명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축복, 고난 (10월 30일)
2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중간 고사 결과는 다들 최선을 다한 만큼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번에 예배를 마치고 승규 선생님께 여러분이 얼마나 멀고 위험한 길을 예배드리기 위해 와야 하는지를 들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 등 여러 모로 헌신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주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더 큰 복을 내리실 것을 믿습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여러분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정체성을 두어야 할 가치, 삶의 안정감의 기반이 되어야 할 가치는 성적, 돈, 명예, 외모 등이 아니라 바로 영원히 불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영원하지 못한 것에 우리의 뿌리를 둘 때 우리는 삶이 쉽게 흔들리게 되며, 그것의 끝은 결국 허무와 절망,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자살했던 영화 배우 이은주씨의 이야기도 드렸었죠.
Oprah Winfrey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타임지에서는 이 사람을 20세기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중 한명으로, 뉴스위크지는 올해의 TV 인물로 그녀를 지명했습니다. 1954년 1월 29일 미시시피주 코시어스코에서 태어난 오프라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로 출산되어 아홉 살 때 열 살이 많은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했고, 이후로 어머니의 남자친구나 친척 아저씨 등에게 끊임없는 성적 학대를 받았으며, 열네 살에 미숙아를 사산했고, 20대 초반에는 남자 때문에 마약을 상용하기도 했습니다. 73년에 내쉬빌의 한 로컬 방송에서 리포터 겸 앵커로 첫 발을 내딛은 그녀는 부끄러울 수도 있는 과거에도 불구하고 부단한 노력 끝에 84년부터 현재 전세계 1억 5천만명의 시청자들이 시청하는 독보적인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녀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예인이며, 연예인 가운데 최고의 재산을 가진 억만장자로 일년에 1,500억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토크쇼 뿐 아니라 그녀는 북클럽, 잡지, 강연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최근 신문 기사에 의하면 그녀는 뉴올리언즈의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직접 뉴올리언즈의 참사 현장에 찾아가 엄청난 재정을 기부하고, 실제 참사 현장에 들어가 봉사 활동을 함으로 영부인 로라 부시의 허식적인 행동에 비교를 당했다고 하지요.
저는 최근 케이블 텔레비전을 통해 진행되는 그녀의 토크쇼를 시간을 정해놓고 즐겨 봅니다. 물론 연예인들이 나와서 별 유익없는 잡담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일주일이면 3~4일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습니다. 여러 자문 위원들이 나와 그들을 상담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보다 그들을 진정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은 오프라가 그들을 공감하는 멘트 한 마디... 그들의 눈물에 함께 눈물을 지으며, 포옹하는 그 한 순간인 것을 봅니다.
오프라의 성장을 지켜본 그의 친척들은 오프라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볼 때 그녀는 버림받고 찢겨진... 그래서 어쩌면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현실의 벽을 타개하기 위해서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 격인 “오프라 윈프리의 특별한 지혜” 에 보면 “저는 저 자신보다 더 위대한 신앙의 힘 덕분에 버텨올 수 있었어요. 그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모든 게 괜찮아질거라 깨닫게 하는 힘이죠. 희망이 없다는 것은 탈출구가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죠. 저는 항상 희망을 품어왔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으로 여러 고통을 직면하게 됩니다. 각자의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누구나 여러 가지 형태의 고통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우리는 고통이 없고 삶이 형통할 때는 주님을 잘 섬기다가도,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쉽게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심지어 이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주어진 고통도 사실은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Anti 들이 반박하는 이슈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면서 왜 어려움을 당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른 바 신학에서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 라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고난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에 보면 고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오는 고난입니다. 욥을 기억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욥은 그다지 잘못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말씀에 의하면 그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로우심과 전능하심을 가르치고 욥을 더 견고케 하시려고 그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재산과 자녀들을 모두 잃고, 몸에 악창이 났으며, 아내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잠시 불평한 적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갑절의 소유와 자녀를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욥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신 것은 바로 욥을 사랑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한 Test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실 때,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인들이 겪었던 수많은 고통들을 볼 때 우리는 분명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고난은 우리가 두드러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한 징계와 채찍의 의미로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다윗을 들 수 있겠죠. 다윗은 자신의 신복인 우리야를 전장에 보내 죽게 하고, 그 아내 밧세바와 통간한 죄를 지었을 때,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죽고,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는 등의 어려움을 겪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많이 참으시며, 우리가 깨닫고 자백하고 용서를 빌면 언제라도 반드시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에게 징계가 필요하다 싶을 때는 심한 고난을 허락하시어 징계하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 죄의 악성을 깨달아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죠.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5~6절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엔 무릇 징계가 그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야고보서의 본문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시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변증가 C.S. 루이스는 고통을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통이 죄인들을 일깨우는 메가폰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고통이 다가올 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피할까... 어떻게 임기응변식으로 이 고통을 빗겨나갈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미 이 세상을 이긴 예수님의 제자들답게 고통에 직면하여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이 고통을 이기는 데는 무엇보다도 첫째, 고통 가운데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의롭게 살려 하지 않는다면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게 관심이 없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하나님께서 더욱 더 그분이 쓰시기에 좋은 날카로운 연장으로 만드시기 위해 고통을 주신다면 이보다 더 감사한 은혜가 있겠습니까? 고통 때문에 더욱 더 그분께 감사하고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디모데후서 3장 후반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핍박을 받을 때 능히 그 핍박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확신한 일, 즉 말씀(성경)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등 개인적인 경건생활을 통해서 더욱 더 그분께 매달려 보십시오.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여러분은 하나님과 더욱 더 가까워지고, 이 고난이 통로가 되어 나와 동일한 고난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을 품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겉으로는 다들 밝고 명랑해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있을 줄 압니다. 무엇보다 가족과 헤어져있는 외로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성적 1~2점으로 사랑하는 친구들과 경쟁자가 되어야 하는 아픔, 하나님 앞에 맘껏 기도하고 찬양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억눌림...
그러나 이럴 수록 주님 앞에 더욱 더 감사하시고, 더욱 더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십시오.
이 고통이 여러분을 더욱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줄 것입니다. 할렐루야!!
3. 감사, 또 감사 (11월 20일)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 주일 낮예배 때 저는 작년 8월까지 6년동안 민족사관고등학교의 수학 교사로 근무하시다가 그만두시고, 지금은 학원을 운영하고 계시는 저희 교회의 한 권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영국에 가 계신 고문수 선생님도 계시지만, 그 선생님도 설립 초기부터 학교 내에서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증 가운데 설립자인 최명재 씨로부터 기독교 활동을 하려고 시도하던 가운데 겪었던 많은 어려움, 그러면서도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하신 일들에 대한 감사 고백에 모든 성도들이 오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저자이신 책이지만,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오늘 나는 여러분과 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할레이의 성경 핸드북에 보면 바울 선생은 2세기의 전승에 의하면 머리는 곱슬이며, 키는 중간 정도였고, 다리는 조금 구부러지고, 푸른 눈에 눈썹은 일자이며, 코가 높았고, 안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열 두 개의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요셉의 아우인 베냐민의 지파의 후손이며, 바리새인이고, 생후 8일만에 할례를 받고 당시 세계에서 제3위의 학문적 중심지인 다소에서 태어나서 유대인으로 율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성경 인물들의 말과 행적을 보면서 “나는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혹은 “아, 이것은 너무 높고 위대한 기준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의 2000여 전을 살아갔던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을 읽으면서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 선생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약 5:17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정이 같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갖고, 우리와 비슷한 고난을 당하는 ... 즉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뿐 아니라 바울 선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후 12:7에 보면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합니다. ‘가시’ 는 보통 안질, 두통, 간질 등의 만성적인 질병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가시를 마귀의 공격, 반대당의 공격, 우울증, 히스테리 등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추측해 낼 수 있는 사실은 성경인물들이 우리와 근본적인 유전자가 다르다거나,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에서 바울이 기록한 서신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식 이름으로 바울, 그가 유대식 이름으로 표현되던 사울의 시절, 그는 초반에 언급한 대로 바리새인으로써, 당시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출신 배경이 튼튼하고, 대학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았으며, 율법적인 기준으로도 행위적인 흠이 없는 종교적으로 모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를 믿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핍박하는 반대 세력이었습니다.
행 9장에 보면 사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서 예수를 믿는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결박해서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그 길목에서 자신이 그렇게도 핍박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음성 앞에 그는 꺼꾸러지게 되고, 결국 성령을 받고 이방 민족에게 최초로 선교의 문을 연 선구자적인 신앙의 위인이 됩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을 소개하기를 자신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써,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였지만, 무엇이든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해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긴 이유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는 돈도, 명예도, 지식도, 출신 배경도 다 포기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지난 시간에 계속 말해온 것처럼,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이고, 복음이면 다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때문에 여러 번 매를 맞고, 감옥에 투옥되고, 사람들로부터 거절과 배신을 당하고, 유배되고... 그런 숱하고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삶을 보며, 또 예수의 이름 앞에 이러한 핍박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바울은 오늘 감옥에 투옥된 채로 기록한 옥중서신 빌립보서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4:13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와 근본 형질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던 초대교회 당시에는 지금보다 오히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상황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4:4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6~7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여건도 환경도 좋은 생활을 분명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만으로, 부모와 자녀, 부부의 인연을 끊어야만 하고, 민족의 배신자로 여겨져 투옥되고 사형을 당해야 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앞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좌절하고, 작은 우리의 문제와 염려로 인해 주를 섬기는 것을 포기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바울의 권면을 오늘 여러분의 가슴 속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감사란... 우리의 감정, 지식, 상황, 환경을 뛰어넘어, 신실하게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만 함께 하신다면, 성령만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그 때를 기다리며,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일상을 통해 주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4. 새 영을 부어 주소서 (12월 11일)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이 베풀어주신 사랑 - 헌금, Tea와 편지 - 에 모두를 대표해서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여러분을 만나면서 여러분에게 우리가 뭔가를 베푼다기 보다는, 항상 여러분 집회를 통해 우리 팀이 더 큰 은혜와 도전을 누렸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도 뭔가 여러분에게 베풀고 싶었는데, 우리 김찬영 형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영상물을 만들었고, 또 나가실 때 여러분이 공부하시다가 드시라고 작은 정성을 준비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일 뿐 아니라, 유대 사회 안에서의 관원으로 골수 종교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으로는 정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당시의 바리새인들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감사” 에 대한 교훈을 배웠던 빌립보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도 원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율법적인 행위로는 정말 흠이 없이 살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열심을 통해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고, 각종 직분을 통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고, 구제 사업에 몸을 던지는 등... 행위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 없으나, 이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엡 2:8에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번에 흰 카드를 써서 제출하신 것을 보니까 중학교 때까지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 - 명성교회, 사랑의교회, 온누리교회, 지구촌교회, 수원중앙침례교회 등 - 에서 교회생활을 하시던 분들이 꽤나 많더군요. 하루에도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교회의 문턱을 밟지만, 그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교회에 출석만 한다고 구원 받는다면 그것은 마틴 루터가 개혁해서 시작된 Protestantism 의 기조에는 상당히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소위 모태신앙 신자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또 율법사 랍비들로부터 철저한 신앙 훈련을 받아서, 행위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각종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시는 것을 보고, 예수에게 정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대면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가 믿어온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 14:6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니고데모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냐고,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하냐고 묻는데, 이 질문에 다시 예수께서는 육체적인 거듭남이 아니라, 물과 성령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도 모태 신앙이 상당 수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태 신앙 신자들은 대부분 그 부모님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직분을 맡아 봉사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마 제 생각으로는 목사님 가정도 있을 것이고, 장로, 권사, 집사님의 자녀들일거라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나이 때쯤 되면, 이전에 적어도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믿는 신앙을 그저 맹목적으로 좇아 교회 열심히 다녔다가, 고등학교쯤 오니까 한 번쯤 내가 믿고 의지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이 될 때가 옵니다. 그래서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 나이 때 예수님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때 진정 자신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인정하는 소위 둘째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거의 평생동안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빛을 온 천하에 자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여러분의 이성과 논리로 철저히 계산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어지는 성경책이 만약 일반적인 학문으로 일일이 난도질이 된다면 한 장도 채 남아있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창조과학회라는 단체에서는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시도를 여러번 합니다만, 제 생각으론 과학으로도 성경은 다 증명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역설적으로, 만약 세상의 논리, 과학으로 하나님이 증명된다면, 그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지금도 살아서 온 인류 역사를 다스리시는 초월자이실까요?
나는 내 생애의 가장 큰 기적은 바로 예수를 믿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6세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모태 신앙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것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대학교 1학년 때, 제2의 회심을 경험하기 직전에는 엄청나게 냉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는 제 스스로를 믿기도 어려운 시기였지요. 그런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다녔던 교회를 규칙적으로 출석한다는 것은 사실 별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답니다. 그래서 저는 술, 음란물에 거의 중독 수준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대학 입시를 도저히 치룰 수 없는 폐인적인 고3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가장 밑바닥으로 치달았던 대학교 1학년,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대학에서 저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제 의지가 저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에게 이끌려 한 교회에서 열렸던 예배에 참석해서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고 (솔직히 말씀 시간까지도 별로 집중하지 않았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제게 뭔가 모를 마음의 간절함이 생겨,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매달렸더니, 성령께서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니 예수가 믿어지고,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무기력하기만 하고 패배감에 가득차 한없이 낮은 자존감 가운데 제 자신을 자책하던 삶에, 마치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을 하나 밝혀서 온 방이 다 빛으로 가득찬 것’ 같이 소망으로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제 간절함 가운데 하나님의 열심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성령이 임하게 되고, 성령이 임하니, 이전과는 달리 내가 어떻게든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보려던 생활에서 모든 일에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내 우선순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나의 우선순위가 되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수능시험이 끝난 고3 여러분도 계시겠지만,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또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명예를 얻고... 이 모든 것들을 다한다 해도, 삶의 어느 때에는 분명 슬럼프도 찾아들기 마련이며, 궁극적으로 허무함이 찾아들게 됩니다. 이 때 우리가 붙잡을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성령을 통해 제2의 회심이 오늘 이 저녁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늘 민사고 지체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주시는 줄 아십니까? 이 예배의 자리가 하나님께서 너무도 기뻐하시는 자리라고 말씀해 주세요. 정말 어렵고 힘든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오는 마음 자체가 너무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쁘고 고마운 거에요.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이 한 발짝 더 내딛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배하려는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 바로 성령을 체험하여, 온전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지요. 이전에는 부모님과 친구의 열심이 여러분을 교회로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주께서는 여러분 개인의 열심을 원하세요. 그 간절함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장에 있는 그분의 열심과 만나면, 바로 성령이 임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자리에 가끔 내 자신에게 화가 나는 사람들 있죠.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도대체 내가 컨트롤이 안되는 거야. 이 중에 예수님이 싫은 사람은 누가 있겠어요? 다 예수님 믿고 싶고, 하나님만 신뢰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되는 거지. 그런 사람은요. 오늘 성령을 받아야 해요.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의 심령마다 임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세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말씀을 읽고 어떻게 깨달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야 할지, 또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들을 어떻게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할지,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깨어진 친구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어떤 대학에 가서 어떤 전공을 통해 주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지, 어떤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나갈지... 등등등요.
그냥 오늘 여러 기도제목도 필요없어요. 성령이 이 자리 가운데 임하도록 간절히 기도했으면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까지 아직 사역하러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120명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간절히 성령이 임하도록 기도했더니, 드디어 오순절이 되니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사도행전 한 번 보세요. 예수님을 부인하던 사람, 예수님 믿는 사람을 데려다가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던 사람까지도 예수님을 믿고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의 사람들로 다 바뀌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이렇게 예배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이 자리까지 온 여러분 하나쯤이야 못 바꾸시겠어요?
오늘 우리 함께 온 씨유의 간사님들과 친구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같이 기도할 것이고요. 또 오늘 오신 우리 부모님들, 그리고 민사고 지체들 중에서도 이미 성령 받고 확실히 주님께 헌신된 친구들도 있을텐데, 모두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할 거에요. 문제는 여러분만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신다면, 오늘 이 자리에 성령께서 큰 역사를 나타내실 거에요.
오늘 몸이 아픈 사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 또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좌절한 사람도 모두... 다 그 문제를 내려놓고 주님께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모든 우리의 문제에 축복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첫댓글 감사합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