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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 '한산과 습득'
師因到天台國淸寺見 寒山拾得 師云 久嚮寒山拾得到來 只見兩頭水牯牛 寒山拾得 便作牛鬭 師云 叱叱 寒山拾得 咬齒相看 師便歸堂 二人來堂內 問 師適來因緣作麽生 師乃呵呵大笑
조주선사가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갔을 때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을 보자 말했다.
"오래도록 한산과 습득의 소문을 들었는데 와서 보니 다만 두 마리 물소(水牯牛)밖에는 안 보이는구나."
한산과 습득이 소가 싸우는 시늉을 하니 조주선사는 "저런, 저런!" 했다.
한산과 습득은 이를 악물고 서로 바라보았다(咬齒相看). 조주선사는 바로 승당으로 돌아왔는데, 나중에 두 사람이 찾아와 물었다.
"아까의 인연은 어떻습니까?"
선사는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呵呵大笑).
국청사(國淸寺)의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은 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당나라 초기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기인(奇人) 선승(禪僧)들인데, 스승인 풍간(豊干)과 함께 세 사람을 합쳐 삼은(三隱) 또는 삼성(三聖)이라고 한다. 여구윤(閭丘胤) 이라는 사람이 이 세 사람의 자취를 삼은시집(三隱詩集)의 서문에 적었는데, 풍간이 여구윤에게 알려주었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산은 문수보살의 화신(化身),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이 세 사람은 시(詩)를 즐겨 쓴 모양인데 삼은시집, 한산자시집(寒山子詩集)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한산의 시가 314수로 가장 많다고 하고, 송나라 때 선의 유행과 함께 널리 애호되었고, 선종화(禪宗畵)의 주제로도 즐겨 쓰였다.
오늘은 조주선사도 두 사람의 소문을 익히 듣고 한번 만나 보려고 국청사로 왔다.
"오래도록 두 사람 소문을 들어왔는데, 와서 보니 두 마리 물소(水牯牛)만 보이는구나."
조주는 만나자마자 이 두 사람의 선(禪)의 경지가 어떤지 먼저 넌지시 띄워본다. 두 마리 물소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까 한산과 습득은 서로 머리를 들이박으며 소싸움 시늉을 한다. '우리들이 바로 그 수고우들입니다, 큰스님!' 하고 마음 본원의 작용을 그대로 보인 것이다. 이게 어떤 마음 작용(法)인가? 라고 한다면 선(禪)은 그렇다고 말씀드릴 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조주는 '저런, 저런' 하고 힐책을 한다. '이게 무슨 짓인가? 축생처럼 서로 싸우는 꼬락서니라니!' 하고 다시 한 번 그들의 반응을 보고자 하는 말이다. '두 마리 물소' 법문에 '소싸움 흉내'로 응수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한산과 습득은 '교치상간(咬齒相看)'이라, 소리를 내며 이빨(齒)을 "드드득" 가는 것을 '교치'라고 하니, 이빨을 갈고 이를 악물고 서로 바라보았다는 말이다. 계속 물소 두 마리가 싸우는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다만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조주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그러자 조주는 오늘 자기가 묵는 방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한산과 습득이 조주를 찾아와서 묻는다. "큰스님, 아까의 인연은 어땠습니까?" 이미 이들도 조주선사의 명성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기에, '큰스님의 법거량에 우리가 적절히 응수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은근히 좋게 판정해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이다. 그러자 조주는 깔깔대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 정도면 나쁘지는 않았어! 하듯이 말이다.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따라와 보니 어떠한가. 이 세 사람이 무슨 어린애 소꿉장난하듯이 아무 의미 없는 노릇을 한 것인가. 기인(奇人)이라고 하는 한산과 습득의 참 모습은 또 어떻게 보이는가? 여러분의 눈(眼)이 참으로 궁금하다. 이 선문답이 정말로 선(禪)의 유희(遊戱) 놀음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조금 정신 나간 늙은이들이 말도 되지 않는 짓거리를 펼치는 것으로 보이는지...
한산과 습득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는가? 선(禪)이란 걸 진짜 뜬구름 잡는 것처럼 황당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바른 눈으로 본다면 이제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을 것이다. 한산과 습득은 전혀 전설적인 미친 중도 아니고, 깨달은 눈으로 보면 어린애처럼 너무나 천진스러운, 그냥 평상심으로 사는 평범한 중일 뿐이다. 그래서 깨달으면 모두 아이가 된다고 했다. 보화존자도 임제선사를 '어린애' 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릴없는 늙은이는 바로 아무것도 분별하지 않는 어린애이다.
참 세상은 이상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깨달은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죽은 송장을 끌고 다니는 사람은 제 정신이 박힌 것처럼 설치고 다니는 모습이다. 왜 이렇게 거꾸로 되었는가. 이다지도 전도된 세상을 다시 뒤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는 역대 조사, 선사들의 책임도 크다고 본다만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보살도가 무엇인지를 새삼 고민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상구하화(上求下化)의 정신을 제대로 살린 인물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쯧쯧.
492. '오백 마리 물소'
一日 二人問 師什麽處去來 師云 禮拜 五百尊者來 二人 云 五百頭水牯牛 聻尊者 師云 爲什麽作五百頭水牯牛去 山云 蒼天蒼天 師 呵呵大笑
하루는 두 사람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오백존자(五百尊者)께 예배하고 왔네."
"그 존자들은 오백 마리 물소들입니다."
"무엇 때문에 오백 마리 물소들이라 하는가?"
한산이 "아이고, 아이고(蒼天蒼天)!" 하자, 조주선사는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조주는 위 국청사에서 조금 오래 머물렀던 모양이다. 오늘은 조주가 어디를 갔다 오니 한산과 습득이 물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한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마치 쌍둥이처럼 꼭 붙어 다녔던가 보다. "큰스님,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이 두 사람도 그냥 아무 뜻 없이 묻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조주에게서 여러번 시험을 당했으니 오늘은 거꾸로 우리가 조주를 시험해보자는 심보로 하는 질문이다.
“오백존자(五百尊者)에게 예배하고 왔다." 조주는 무심하게 질문에 응한다. 오백존자(五百尊者), 또는 오백나한(五百羅漢)은 오백비구(五百比丘), 오백상수(五百上首)라고도 하는데 소승불교에서 승려가 이른 최고의 경지로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500명의 아라한을 말한다. 이들은 더 이상 생사윤회의 흐름에 태어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며, 매우 덕이 높은 성자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라한은 자기 자신만의 해탈에만 치우쳐 다른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약하다 하여 조금 경원시하는 것 같다.
이 오백나한은 석가 생존시의 500명의 제자나 석가 열반 후에 불경전을 결집한 500명의 나한이나 비구 등을 칭하는데 두루 사용된다. 이들 오백나한은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특별한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오백나한상을 모신 절도 많다. 조주도 오늘은 어느 다른 절의 5백존자상을 보고 온 모양이다. 예배차 오백나한을 봤다고 하자 한산과 습득이 시비를 걸어 본다. "그 존자들은 오백 마리 물소들(水牯牛尊者)입니다."
그것은 '오백 마리 물소(水牯牛) 떼이지 무슨 존경받을 존자들입니까?' 이 뜻이다. 앞 문답에서 조주가 두 사람을 두 마리 물소에 비유한데 앙심(?)을 품고 지금에서야 반격의 화살을 쏘고 있다. 그러자 조주는 능청스럽게 화살 끝에다 또 다른 화살촉을 박는다. "무엇 때문에 오백 마리 물소들이라 하는가?" 보통 사람들은 '5백 물소존자들' 이라고 말하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눈만 끔벅끔벅 하겠지만 조주가 누구인가, 너희들이 오백존자를 오백 마리 물소라 하니 그 이유나 말해라고 재반격을 한다.
그러자 한산이 ‘창천창천(蒼天蒼天), 아이고, 아이고!' 하며 한탄한다. 조주스님에게는 정말로 못 당하겠습니다. 항복, 항복. 그러니 조주는 깔깔 웃을 수밖에.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산과 습득도 보통 깨달은 자들이 아닌데 어째서 조주의 대답에 입이 딱 막혀 버렸겠는가? 늙은 선사라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은 것이다. 만약 젊은 도인이 껄떡대기라도 한다면 '오백마리 물소도 모르냐?'고 하면서 머리로 가슴을 들이박았을 것이다.
493. '한 마을 집 아이'
師行脚時見二菴主 一人作丫角童 師問 訊二人殊不顧 來日早晨丫角童將一鐺飯來 放地上分作三分 菴主將席子 近前坐丫角童亦將席近前相對坐 亦不喚師師奈亦將席子 近前坐丫童木顧於師 菴主云 莫言侵早起 更有夜行人 師云 何不敎詔這行者 菴主 云 他是人家男女 師云 洎合放過丫童便起顧視菴主 云 多口作麽 丫童從此入山不見
조주선사가 행각할 때 두 암주(菴主)를 만났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갈래머리를 땋아올린 동자(童子)의 모습이었다. 조주선사가 문안인사를 하였으나 두 사람은 별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튿날 이른 새벽, 갈래머리 땋아올린 동자가 밥 한 솥을 가지고 와서 땅에 내려놓더니 세 몫으로 나누었다. 암주는 자리를 들고 가까이 가서 앉고, 갈래머리 동자도 자리를 가지고 가까이 가서 마주 앉았지만 역시 조주선사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자 조주선사도 마찬가지로 자리를 가지고 가까이 가서 앉았는데, 갈래머리 동자가 조주선사를 돌아보니 암주가 말했다.
"일찍 깨웠다고 말하지 마시오. 또 밤길 가는 사람이 있소."
조주선사가 말했다.
"어째서 이 행자(行者)를 가르치지 않소?"
"그는 마을 집 아이요(他是人家男女)."
"하마터면 그냥 놓칠 뻔 했군."
그러자 갈래머리 동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암주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많이 지껄여서 무얼 하오(多口作麽)?"
갈래머리 동자는 이때 산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정말로 옛날의 '전설 따라 삼천리'란 연속극에나 나올 법한, 설화나 동화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흰 구름 위에서 신선들이 장기를 두는데 훈수쟁이 한 명이 기웃거린다고나 할까?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조주선사가 실제 겪은 일이다. 너무나 재미도 있으니 찬찬히 앞뒤를 살피며 나아가자.
조주가 과거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수행을 할 때, 어느 지역에 이르러 한 암자(菴子), 도(道)를 닦기 위한 자그마한 집이죠, 이 암자에서 두 사람의 집 주인을 만났다. 암자(菴子) 하나를 두 사람이 쓰고 있었는데 아마도 한 사람은 나이 많은 늙은 중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뒷머리를 Y자로 두 쪽으로 나누어 땋아서 올린(갈래머리라 하죠) 어린 아이(童子)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만난 첫날, 조주가 말을 걸어 안부를 물어봐도 두 사람 모두 조주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주 묘하고 이상한 분위기구나! 하고 생각을 했지만 조주도 짐작이 가는 게 있어서인지 그날 밤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잤다. 한밤중에 방안으로 누군가 쑥 들어오는듯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오늘은 완전 납량특집이다.
그 다음날 아침, 조주가 일어나 밖에 나오니 갈래머리 동자가 밥을 지었는지 한 솥을 들고 와서 그냥 땅위에 올려놓고는 조주 몫까지 포함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세 그릇에다 밥을 펐다. 그러자 나이 많은 암주가 가까이 와서 밥솥 옆에 앉았고, 어린 동자도 그 앞에 가서 앉았다. 둘이 서로 가까이 마주보고 앉았지만 조주에게는 공양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어제부터의 괴상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인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했나? 아니면 도깨비들?
그렇다고 기죽을 조주가 아니다. 조주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밥솥 앞에 가 턱 앉았다. 가까이 가서 앞에 앉으니까 그제야 이 꼬마 동자는 조주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러자 나이 든 암주가 어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처음으로 입을 떼고 한마디 한다. "아침에 너무 일찍 깨웠다고 말하지 마시오. 또 밤길을 가야 할 사람이 있소." 아니, 아침 일찍이 밥 먹으려고 모였는데 밤길을 가야 할 사람도 있다니! 무슨 소리인가? 무심코 그냥 듣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은 속으로 깊은 뜻을 품고 있다.
바로 마음을 콕 직접 찔러 가리키는 한마디이다. 어떻게 짐작되는 곳이 있는가. 바로 그 길이다. 새벽 일찍이 밥 먹고도 밤길을 가는, 깨달음을 향한 그 길이다.
조주도 이 뜻을 모르진 않았지만,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 암주에게 말한다. "어째서 이 어린 행자를 가르치지 않소?" 꼬마 놈이 도대체 어른 모실 줄도 모르고, 버릇없이 구는 모습을 보니 나이 먹은 사람이 이제까지 애를 가르치지도 않고 뭘 했느냐? 라고 타박하는 형국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자 그 암주가 말한다. "그는 마을에 사는 아이요." '타시인가남녀(他是人家男女)',
저 애는 바로 사람들의 집이 있는, 곧 마을의 남녀의 하나, '마을에 사는 아이'란 뜻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 암주와 갈래머리 동자가 이 암자의 두 주인으로 살고 있는 줄로 봤는데 이 아이는 마을에 사는 애라니? 저 마을에 사는 애인데 버려진 것을 주워 와서 키운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저 마을에서 잠시 놀러온 애라고 하는 것인가? 그런 경우라면 왜 애 버릇을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조주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다.
'밤길을 가야 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한마디도 바로 마음을 콕 찌르는 소리이다. 정말 꽁꽁 숨어서 찾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이 스토리의 핵심이다. 깨친 이들간에 통용되는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조주선사도 말한다. "그래, 하마터면 나도 놓칠 뻔 했구나." 조주와 같은 고향 사람을 깜박하여 몰라볼 뻔 했구나! 바로 이 뜻이다. 아시겠는가? 여기서의 고향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다. 우주의 시작 전에 있었던 마음의 근본 자리를 말한다. 아직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분들도 있을 테지만 이 이상 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잘 이해가 안 되면 정말로 의심해 보라.
그 갈래머리 꼬마 동자가 다시 늙은 암주를 노려보면서 말한다. "많이 지껄여 무얼 하오?" 그리고 이후 그 동자는 산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참 기이하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 같은, 그러면서 너무도 흥미로운 실화라고 할 것이다. 나만 그런가. 그렇다면 나는 정신 나간, 미친 놈이겠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지만 우리나라 이야기도 한번 하겠다.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의 제자로 천진불(天眞佛)이라고 불린 혜월(慧月)선사가 있었다. 어느 날 한 객승이 혜월선사를 찾아 절에 갔더니 무심도인으로 명성이 높은 큰스님이 동자승에게 존댓말을 하며 받들고 있었다. 동자승은 큰스님에게 되레 반말을 하며 방자하게 굴면서 말이다. 혜월선사가 방문을 열면서 동자승에게 말한다.
"큰스님, 시장보러 잠시 장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자, 그 동자승이 말한다.
"나 밥 줄 시간 다되어 가는데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다녀와!"
그러자, 곁에서 이 대화를 들은 그 객승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혜월선사가 시장에 내려간 사이에 어린 동자승의 멱살을 잡고 혼쭐을 내며 버릇을 고쳐놓았다. 혜월선사가 돌아오니 엉엉 울면서 예를 갖추는 동자승을 보고 어두워진 얼굴로 혜월은 그 객승에게 말했다. “예법은 스스로 이르는 것이거늘, 내가 예법을 몰라 저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았겠소? 천진한 모습이 하도 좋아 때묻지 않게 정성껏 받들고 있었는데 스님이 그만 그것을 깨뜨리고 말았소. 이제 나하고 인연이 다됐으니 지금 당장 스님이 데리고 가시오!”
더 이상 이야기하면 너무 길어지니 여운만 남기면서 이만 줄인다.
494. '아미타불, 아미타불!'
師因看經次 沙彌文遠入來 師乃將經側示之 沙彌乃出去 師隨後把住 云 速道速道 文遠 云阿彌陀佛 阿彌陀佛 師便歸方丈
조주선사가 경을 보고 있는데 사미 문원(文遠)이 들어오자 경전을 비스듬히 보여 주었다. 문원이 그냥 나가버리니 선사가 뒤따라가서 붙들고 말했다.
"어서 말해라, 어서 말해!"
문원이 "아미타불, 아미타불!" 하니 선사는 방장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조주선사가 매우 귀여워하는 사미 문원(文遠)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장면이다. 조주가 방에서 불교 경전을 보고 있는데 문원이 들어온다. 조주는 경전 책을 비스듬히 눕히면서 문원에게 살짝 보여준다. '이놈아! 이것이 경전이야!' 라는 듯이. 그러자 문원은 아무 말 없이 그냥 나가버렸다. '이런 못된 놈, 도(道)를 가르쳐줬는데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도 없이 그냥 나가다니..'
조주는 문원의 뒤를 따라가면서,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 하고 소리친다. 그러자, 문원은 (보지는 않았지만)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읊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마치 '아이고, 큰스님!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십시오. 경이라면 나무아미타불, 염불이나 하세요.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라는 듯이.
조주는 그 말을 듣고 이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저 어린 문원의 머리통이 밤송이처럼 토실토실 익어가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말이다.
495. '문 안과 밖'
因沙彌童行叅 師向侍者道敎伊去 侍者向行者道和尙敎去 行者便珍重 師云 沙彌童行得入門 侍者在門外
한번은 사미 동행(童行)이 찾아뵈러 오자 조주선사는 시자(侍者)에게 "저 애를 보내라."고 일렀다.
시자가 동행에게 "큰스님께서 가라고 하신다." 하니, 동행이 곧 작별인사를 하자 조주가 말했다.
"사미 동행(童行)은 문 안에 들어왔으나 시자는 문 밖에 있구나!"
오늘의 장면에는 어린 사미 동행(童行)이란 스님이 처음 등장한다. 문원만 귀여워해 온 줄알았는데 또 다른 사미는 그동안 숨겨놓은 모양이다. 이 사미 동행이 조주선사를 찾아오자 조주는 시중드는 시자에게 말한다. "저 애를 보내라."
이 말을 듣고 시자는 동행에게 "큰스님이 너를 가라고 하신다." 라고 말했다. "저 애를 보내라." 라는 말을 '쫓아내라' 라는 뜻으로 왜곡한 것이다. 이 소리에 동행이 조주에게 많이 섭섭해 했겠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런 언급은 없지만 느낌이 오니까.
이제 동행(童行)이 조주에게 작별인사를 하니 말한다. "사미 동행(童行)은 문 안에 들어왔는데, 오히려 시자는 문 밖에 있구나!" 시자는 그래도 20대를 넘어 수행의 길에 나선지 몇 년 정도는 되었을 테고, 그동안 조주 밑에서 가르침도 많이 받았을 텐데 이제 갓 불문에 들어온 사미는 문 안으로 들어오고, 시자는 아직도 문 밖에서 서성대고만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문은 어떤 문이겠는가. 보통 문(門) 없는 관문이라 하여 무문관(無門關)이란 선어책(禪語冊)도 있다.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긴 있는데 눈에 띄는 문(門)은 없다. 그 닫힌 문으로 사미 동행은 이미 들어왔다는 뜻이다.
496. '있느냐, 있어?'
師行脚時 到一尊宿院在入門相見 便云 有麽有麽 尊宿 竪起拳頭 師云 水淺船難泊 便出去 又到一院見尊宿 便云 有麽有麽 尊宿竪起拳頭 師云 能縱能奪能取能撮 禮拜便出去
조주선사가 행각할 때, 큰스님(尊宿) 한 분이 사는 절에 이르러 문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자마자 말했다.
"있느냐, 있느냐(有麽)?"
그 존숙이 주먹을 치켜 올리자 조주선사는 "물이 얕아서 배를 대기가 어렵구나." 하고는 그냥 나와 버렸다.
조주선사가 나와서 또 한 절에 이르러 큰스님을 보고 "있느냐, 있느냐?" 했는데 그도 주먹을 치켜 올렸다. 조주선사는 "놓아주고 빼앗으며 갖고 쥐기를 능숙하게 하는구나." 하고 절을 하며 나와 버렸다.
이 화두는 선가(禪家)에서 매우 풀기 어려운 공안으로 알려져 있다. 소위 확철대오(廓徹大悟), 철저하게 크게 깨달은 자만 알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하튼 뚫기 힘든 화두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겠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럼 한번 이야기를 풀어 가겠다.
오늘도 조주선사가 천하를 행각할 때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조주가 한 명망 있는 존숙(尊宿), 큰스님의 선원(암자)로 찾아가서 서로 만났다. 선사는 그 큰스님을 보자마자 그냥 "있느냐, 있느냐?" 하고 소리쳤다. 아무 딴 소리 없이 무턱 대놓고 '있나, 있어?' 하고 말했지만 이것은 '이게 뭔가?' 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주먹을 불끈 들어 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주는 "물이 얕아서 배를 대기가 어렵구나." 라고 말하며 떠났다.
배를 댈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깊지 않고 너무 얕다고 했으니 도(道)의 경지로 봐서는 별 볼일 없는 수준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코앞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아무리 조주라도 때려주고 싶을 만큼 그 스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조주는 이제 그 곳을 나와서 다른 한 선원(암자)에 도착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조주는 그 선원의 큰스님을 보자마자 "있느냐, 있느냐?" 하고 소리친다. 그러자 이 스님도 주먹을 들어 올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주는 이번에는 "놓아주고 빼앗으며 갖고 쥐기를 능숙하게 하는구나." 라고 말하며, 절까지 하고 떠났다.
앞의 스님은 배를 대지 못할 만큼 너무 얕다고 하고서는똑같이 주먹을 들어 올린 뒤의 스님에게는 소위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고, 살활자재(殺活自在), 죽이고 살리는데 아무 걸림이 없는 그런 깊은 경지라고 인정을 했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것인가. 한번 깊이 의심해 보라. 조주는 두 암주가 똑같이 주먹을 들어 올렸는데, 왜 한 암주는 깊이 인정하고 한 암주는 부정하는 것처럼 말했는가? 이것이 이 공안에서 꿰뚫어야할 의문점이다.
조주는 두 암주를 이전에 이미 잘 알고 있어서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한 암주는 이전부터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인정했고, 다른 암주는 그렇지 않아서 인정하지 않았다 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가설은 이 화두와 아무 관련이 없다. 오로지 위 이야기에 의거하여 풀어야 하는 화두이다. 우리 속담에 '손자를 귀여워하다 할아버지 수염까지 다 뽑힌다'는 말이 있다. 선가에서도 엄할 때는 엄해야 한다.
임제종의 임제선사가 천화할 때 수제자인 삼성선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의 정법안장을 멸해 없애지 말라"고 하니, 삼성이 "어찌 스님의 정법안장을 없애 버리겠습니까?" 라고 했는데, 임제가 "어떤 사람이 묻는다면 너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하니, 삼성이 "악" 고함을 지르니, 임제가 말했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나귀에게서 멸해 없어져 버릴 줄 누가 알았으랴."
임제는 눈먼 나귀인 삼성선사 때문에 자신의 법통이 스르르 소멸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예언한 것 같지만 임제종은 임제 사후 1,40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우리나라에서도 건재하다. 그러니 임제의 뜻을 모르면 그 말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후세 사람들을 속이려는 게 아니라 선사들의 쓰는 법이 그렇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으로서 알아들을 자는 모든 것을 싹 없애 버리라는 뜻이다.
497. ‘이것은 무엇인가?’
師一日 拈數珠問 新羅長老 彼中還有者箇也無 云 有 師云 何似者箇 云 不似者箇 師云 旣有爲什麽不似 無語 師自代云 不見道新羅大唐
조주선사가 하루는 염주를 집어 들고 신라(新羅)에서 온 장로(長老)에게 물었다.
"거기에도 이것이 있소?"
"있습니다."
"이것과 얼마나 닮았소?"
"그것과 닮지 않았습니다."
"있다 하면서 어째서 닮지 않았다는 거요?"
장로(長老)가 말이 없자 선사가 스스로 대신 대답하기를,
“신라는 신라, 큰 당나라는 큰 당나라 라고 하지 않던가?”
오늘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조주선사가 우리나라 옛 신라(新羅)에서 온 한 고승을 만나는 장면이다. 그때 조주는 백팔 염주(念珠)를 손에 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주가 묻는다. "신라에도 이것이 있소?" 지금까지 공부해 왔지만 조주의 첫마디는 항상 본분의 일(事)을 떠나지 않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직지인심이다.
신라 고승이 대답한다. "있습니다." 있긴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 밝은 구슬 하나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조주가 다시 묻는다. "이것과 얼마나 닮았소?" 그러자 신라 고승은 "그것과 닮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당시 중국 당나라에서 만든 염주와 신라의 염주는 서로 생김새가 닮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서로 닮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조주가 "있다고 하면서 어찌 닮지 않았다고 합니까?" 라고 다시 한 번 찔러 본다. 아직 마음공부에 대해 전혀 감각이 없는지 그 고승은 묵묵부답이다.
그러자 조주가 대신 답한다. “신라는 신라, 당나라는 당나라 라고 하지 않던가.” 마치 성경에 '갸이사의 것은 갸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라고 말한 예수의 말씀과 비슷하다. '내 마음은 내 마음이고, 그대 마음은 그대 마음이다.' 우리나라 승려이니 조금 창피하다. 헐!
498. '동지만복(動止萬福)'
問 新到什麽處來 云 南方來 師竪起指云 會麽 云 不會 師云 動止萬福不會
새로 온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남방(南方)에서 왔습니다."
조주선사가 손가락을 세우면서 물었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동지만복(動止萬福)이라는 인사도 모르느냐?"
새로 한 스님이 찾아왔다. "어디서 왔느냐?" "남쪽(南方)에서 왔습니다." 남방이 전부 네 집이더냐? 또 남쪽에서 왔다고 한다. 조주는 구지선사처럼 한 손가락을 세우면서 묻는다. "알겠느냐?" 지나온 여러 수행자와 같이 아직 넋을 빼놓고 걸어 다니는 송장 스님이다.
무슨 뜻인지요? "모르겠습니다." 조주가 이번에는 "동지만복(動止萬福)도 몰라?" 라고 한다. 동지만복(動止萬福)은 우리나라에서 옛날 어른들께 편지에 많이 썼던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이란 인사말과 비슷하다. '그동안 별고 없으신지요, 안녕하십니까?' 하는 인사이다. 직역하면, '움직이든 머물든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고나 할까?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렇게 인사하라는 뜻은 아니다. 조주가 손가락을 세우면서 '알겠느냐'고 물은 뜻을 알아채야 이런 인사도 나오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어찌 이렇게 인사할 줄 알겠는가? 지금이라도 ‘같은 마을 사람끼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도로 말했다면 차 한 잔하고 바로 떠났을 것이다.
499. '반야의 바탕'
師行脚時 問大慈 般若以何爲體 慈云 般若以何爲體 師便呵呵大笑而出 大慈來日見師掃智次 問般若以何爲體 師放下掃箒 呵呵大笑而去 大慈便歸方丈
조주선사가 행각할 때 대자(大慈)스님에게 물었다.
"반야(般若)는 무엇으로 바탕(體)을 삼습니까?"
"반야는 무엇으로 바탕을 삼습니까?"
조주선사는 하하! 하고 웃으며 나왔다. 다음날 선사가 마당을 쓰는데 대자스님이 보고 물었다.
"반야는 무엇으로 바탕을 삼습니까?"
선사가 빗자루를 내려놓고 하하! 크게 웃으며 가버리자 대자스님은 방장실로
돌아갔다.
다시 과거 조주선사가 천하를 돌아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이번에는 조주가 백장대사의 법을 이은 대자환중(大慈寰中) 선사가 있는 절을 찾아갔다. 조주의 스승인 남전선사는 백장과 함께 마조대사의 제자이므로 대자는 조주와 한 법통(法統)에 속한다. 아마도 방안에서 조주가 먼저 질문을 한다.
"반야(般若)는 무엇으로 본체(體), 바탕을 삼습니까?"
반야(般若)란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 할 때의 그 반야, 바로 우리 자성의 무궁무진한 보물창고라고 하는, 자비를 갖춘 지혜(智慧)를 말한다. 묶어서 반야지혜(般若智慧)라고도 하는데 이 지혜의 근본 바탕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바탕은 무엇입니까? 바로 공(空)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
조주가 이렇게 물으니 대자선사가 얼른 되묻는다. "반야는 무엇으로 바탕을 삼느냐? 그대가 말해봐라." 보통 한집안 식구끼리는 이렇게 법을 나누는 식이다. 사실 그 본체는 텅 빈 것(空)일 뿐인데 공(空)이라고 답하면 도(道)를 하나도 모른다고 한다.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깨쳐봐야 안다. 자기 말을 그대로 되물으니까 조주는 깔깔 웃으면서 방에서 나왔다.
그 다음날, 조주가 마당을 쓸고 있는데 대자가 어제의 법거량을 계속 하자고 나온다. "반야는 무엇으로 바탕을 삼느냐? 말해라, 말해!" 하지만 어제와 똑같이 조주는 쓸던 빗자루를 내려놓고, 깔깔 웃으며 다른 데로 갔다. 그 법에는 이 웃음이 약(藥)입니다 하고 말하는 듯이..
그러자 대자도 방장실로 돌아가 버린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는 게 내 법이다.' 이처럼 아는 사람끼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별 시답잖게 보이는 대화나 행동으로 깨달은 마음을 드러내 보이니 선(禪)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총을 사기 일쑤이다. 그런데 달리하기도 서로 너무 싱거우니 어쩌겠는가? 눈먼 자의 눈동자나 제대로 찾아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500. '초연한 놀라움'
師到百丈 百丈 問 從什麽處來 云 南泉來 百丈 云 南泉有何言句示人 師云 有時道未得之人 亦須峭然去 白丈 叱之 師容愕然 百丈 云 大好峭然 師便作舞而出
조주선사가 백장(百丈)대사에게 갔는데 대사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남전(南泉)에서 왔습니다."
"남전은 무슨 법문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던가?"
"언젠가는 말씀하기를, 깨닫지 못한 사람도 초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장(百丈)이 "네 이놈!" 하고 꾸짖자 조주선사는 놀라는 얼굴을 하니 대사가 말했다.
"좋구나. 정말 초연하도다."
조주선사는 춤을 추면서 나갔다.
오늘은 조주선사가 백장(百丈)대사에게 갔다. 백장은 남전, 서당선사와 함께 마조의 3대 제자로서 조주에게는 아저씨뻘이다. 백장대사는 남전대사보다 20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이 만남은 아마도 조주가 매우 젊은 시절에 이루어진 것 같다.
조주가 백장대사를 만나니 백장이 묻는다. "어디서 왔느냐?" 아직은 조주가 누구인지 몰랐던 모양이다. 조주가 "남전(南泉)에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이제 자신의 형제인 남전선사에게서 온 줄 알았다. 그래서 백장이 다시 묻는다. "남전은 요즘 어떤 말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더냐?" 오래 전 헤어진 뒤에 형제가 어떻게 중생들을 잘 가르치고 있는지 백장도 매우 궁금했을 것이다.
조주가 "남전선사께서 언젠가 말씀하길, 깨닫지 못한 사람도 모름지기 초연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라고 말하니, 백장대사가 '네 이놈!' 하고 꾸짖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조주가 놀란 표정을 지으니 다시 백장대사는 "좋구나. 정말 초연하도다." 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야기 잘 따라오고 있는가? 초연하다는 말은 어려운 현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속을 벗어나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조금 지루하지만 다시 한 번 훑어보면, 조주는 '남전이 아직 도(道)를 완전히 체득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게 수행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말했을 뿐인데, 백장대사가 '이놈'하고 찔러 오니 조주도 놀란 척 한 모양이다. 이미 깨쳤기 때문에 조주도 실제 깜짝 놀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백장의 "정말로 초연하구나!" 하는 소리에 조주는 춤을 덩실 추면서 나갔다.
'아저씨의 법문에 감사드립니다. 제 법은 이렇습니다.' 하고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아는 식구끼리 서로 재롱잔치를 벌인 격이라고 할까? 마조가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미소를 짓고 있다. 오, 마조, 남전, 백장, 조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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