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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시인편 .Ⅱ>
완전한 사랑
최금진
안개 속을 걸어 묘지로 가고 있었는데
네가 나에게 욕을 했다, 왜 단결하지 않느냐고 성질을 부렸다
저기서 묘지의 십자가들이 두 팔을 벌리고 나를 기다리는데
부활절이 내일이고, 계란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착한 심청이처럼 껍질을 열고 나오는 건데
왜 단결을 하지 않느냐고 네가 내 멱살을 잡았다
할 수 없이 쓰러뜨리고, 너를 갈기갈기 찢어서 땅에 파묻었다
잔디풀들이 파랗게 놀라 쭈뼛쭈뼛 일어섰다
날아가던 농구공이 공중에서 딱, 멈춰섰다
지구가 딱, 멈춰섰다
나는 하늘에 해를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반나절이면 되는데 너는 나를 기다려주지 못했다
어서 졸업하고 취직해서 착하게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는데
나는 안개를 비닐봉지처럼 빵빵하게 부풀려서 내 얼굴에 덮어쓰고
성호를 그으며 묘지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부활은 이루어지지 않고, 묘실 밖에선
사람들 수군거리는 소리가 야금야금 내 살을 갉아먹었다
제발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마라, 단결이여, 공동체여
내가 땅 속에 파묻었던 네가
뒷문으로 안개를 가만히 열고 나가 나를 일러바쳤다
나는 십자가에 가만히 목을 걸고 헐떡이며 오지 않는 잠을 잤다
누군가 나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질질 안개를 흘리며 일어나 모여있는 사람들을 다 잡아먹었다
배가 부르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항상 착하게 살고 싶었다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최금진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 할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속으로 파리들이 날아 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 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 말라 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 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웃는 사람들
최금진
웃음은 활력 넘치는 사람들 속에 장치되어 있다가
폭발물처럼 불시에 터진다
웃음은 무섭다
자신만만하고 거리낌없는
남자다운 웃음은 배워두면 좋지만
아무리 따라해도 쉽게 안 되는 것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난다
계층재생산, 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얼굴에 그려져 있는 어색한 웃음은 보나마나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것
자신의 표정을 능가하는 어떤 표정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웃다가 제풀에 지쳤을 때 문득 느껴지는 허기처럼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갖지 않는 웃음은 배가 고프다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들을 뚝뚝 떼어
이 사람 저 사람의 낯짝에 공평하게 붙여주면 안될까
술만 먹으면 취해서 울던 뻐드렁니
가난한 아버지의 더러운 입냄새와 땀냄새와
꼭 어린애 같은 부끄러움을 코에 귀에 달아주면
누구나 행복할까
대책 없이 거리에서 크게 웃는 사람들이 있다
어깨동무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웃음들이 있다
그런 웃음은 너무 폭력적이다, 함께 밥도 먹고 싶지 않다
계통이 훌륭한 웃음일수록,
말없이 고개 숙이고 달그락달그락 숟가락질만 해야 하는
깨진 알전구의 저녁식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참고 견디려 해도
웃음엔 민주주의가 없다
소설의 발생
최금진
별과 별들이 봉화처럼 연결되어 별자리를 만들고
어둠의 보이지 않는 샛길까지 환하게 잇고자 했던
지혜로운 여행자들의 지도가
훗날 소설의 기원을 이루었을 것이다
누가 처음 이 외딴 곳에 와서 들꽃과 바람을 읽고
거기에 밑줄을 긋고
제 살과 뼈로 써내려간 집 한 채를 지었을까
화순 최씨 집성촌이 있다는
외딴 마을 어딘가를 내가 헤매고 있었을 때
그 후손들 중 하나가 연줄처럼 아득히 풀려나가
바람 부는 허공을 헤매고 있을 때
땡감처럼 매달린 별 몇 개로도 제 아비를 읽는 밤
하늘과 땅은 책의 앞뒤 표지처럼 맞물려 있고
깨알 같은 인간의 이야기는 거기서 만들어진다
아버지의 무모한 여행담이
훗날 더 먼 데까지 나갔다 올 아들의 지도가 되듯
나 또한 오래오래 들려줄
뼈까지 닳은 내 역마를 생각했었다
몇 개의 선들이 지나면서 산과 계곡이 되고
그 움푹 패인 여백에선
어김없이 마을의 지붕들이 이쪽과 저쪽을 이어놓는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서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내 나이 무렵에 요절한 아버지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화순 최씨 집성촌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불꺼진 마을에서 밤하늘을 펼쳐놓고
나는 몇 번이고
별과 별이 만든 행간의 의미를 되풀이해서 읽고 있었다
최씨 종친회
최금진
솔밭에 납작한 돌멩이 하나씩 깔고 앉아
사타구니 아래로 꼬리처럼 그림자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가며 노래 한 가락씩을 하는 최씨 종친회
머리 위에는 돌아가는 저녁 햇무리
서로의 닮은 입속에 고기를 쪽쪽 찢어 넣어주며
충직하고도 길쭉한 얼굴 상판들끼리
서로 대견해하고 서로 안쓰러워
자꾸 배부른 음식만 권한다
묘 자리 잘못 옮겨 망한 가족사를 남루하게 걸치고 모여
옛 족보에 나오는 유복한 조상의 함자나
퍼줄처럼 제 돌림자에 애써 끼워맞춰보다가
솔밭에 빙 둘러앉아 원을 그리고
하릴없이 수건돌리기를 할 때
언제부터 그들이 만든 저 둥글고 쓸쓸한 테두리
유전자 배열처럼 서로서로 꼬인 것들이
저들을 엮어놓고 있었던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건돌리기를 하는 최씨들
그 푸석한 혈통의 새끼줄 따라 돌고 도는 햇무리, 해의 무리들
어디서 살든 서로 잊지 말자고 내년에 또 보자고
낡은 표정 한 장씩 서로의 품에 끼워주며
사진을 찍으면
눈알마다 어김없이 흘러나와 번지는 붉은 색
과부와 홀아비와 고아와 노인만 모였다가 가는 최씨 종친회
조용한 가족
최금진
노파는 파리약을 타 마시고 죽었다
광목으로 지어 입은 속옷엔 뭉개진 변이 그득했다
입 속에 다 털어 넣고 삼키지 못한 욕설들이
다족류처럼 스멀스멀 벽지 위를 오르내렸다
어디 니들끼리...... 한번 잘 살아봐라......
스테인리스 밥그릇처럼 엎어진 노파의 손엔
사진 한 장이 구겨져 있었다
손아귀에 모아진 마지막 떨리는 힘으로
노파는 흙벽을 긁어댔으리라, 뒤집혀진 손톱
그 핏물을 닦아내는 여자의 완고한 표정을
노파는 허연 게거품을 물고 맞서고 있었다
호상이구만 호상, 닭 뼈다귀 같은 노파의 몸을
꾹꾹 펼쳐놓으며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코를 막았다
서랍장 곳곳에서 몰래 먹다 남긴
사과며 과자부스러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 말고도
썩은 장판 밑에선 만 원짜리 몇 장이 더 나왔다
발가벗겨진 노파의 보랏빛 도는 입엔
서둘러 쌀 한 줌이 콱 물려졌다, 복날이었고
뽑힌 닭털처럼 노파의 살비듬이 안 보이게 날아다녔다
과부 삼대
최금진
아버지 기일인데
일찍 시집가서 일찍 늙어 돌아온 누이와
콩인지도 모르고 콩을 까서 바가지 같은 입에 자꾸 주워담는 할머니의 머리 허옇게 센 죄는 무얼일까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거둬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무제공책에 성경을 베끼시는 어머니는
곪은 할머니 귓구멍에서
밥상에 뚝뚝 떨어지는 우리 가족의 잘 안 낫는 죗값을 무슨 수로 다 틀어막나
하얀 목화솜을 말아 마개를 씌우듯 할머니 바깥의 소리를 봉하는 어머니 손바닥
그 함부로 그어진 빗금 속에서
잠시 서럽게 잠들다 간 사내들은
지금 어디서 홀아비가 되어 제 새끼를 키우나
할머니 손가락에 채워진 은반지는
낮에 잘못 나온 낮달인데
지금은, 시집갔다 이빨만 상해서 돌아온 누이의
텅 빈 입속에 걸려있고
할머니 조롱박 크기만 한 머리통에선
무슨 퀴퀴한 가락이
저렇게 많이 흘러나오나
어머니가 즐겨 쓰던 가면인 누이는
아비 없이 설움을 누구에게 가서 고해바쳐야 하나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거둬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상 위에 차려진 채 식어가는 젯밥,
우리집 과부들은
왜 아버지 죽음 앞에서 한없이 수척하기만 한가
할머니 고름냄새만 지독히 흘러다니는 아버지 기일
자매
최금진
사과를 깎아먹으며 TV를 보는 자매
여우원숭이처럼 킥킥킥 웃으며
주름이 지문을 다 파먹어버린 손으로
손톱을 세워 미끄러운 사과를 집는다
이를 잡아주듯 서로
사과쪽을 권하기도 하면서 가끔은
가려운 잇몸을 포크로 벅벅 긁기도 하면서
<동물의 왕국>을 본다 오후 다섯 시의
햇살이 누런 바나나껍질처럼
반지하 셋방 창살 틈으로 던져지고
눈두덩이에 검은 기미로 안경을 해 쓴 자매
작은 꽃발 같은 꽃이불 속에 들어앉아
알록달록 컬러로 꽃피는 TV를 본다
설인 사스콰치처럼
눈꽃 한다발씩 머리에 이고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폭삭 늙었나
서로를 싸다듬으며 보듬으며
웅크리고 앉아 모아 쥔 손으로
사과를 먹는다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다
바다거북
최금진
그는 수족관에 침몰선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에 문신을 한 아랍인의 우울 같은 것이
주름살을 파들어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유리를 들여다보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 앞발을 휘젓고 있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수족관에서
그는 알비노증에 걸린 사람처럼 등껍질 속으로
자주 희멀건 얼굴을 숨겼다
여기서 나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갑골문자야, 하지만
등껍질에 새겨진 세월의 이면은 점치지 못한다
한번도 깨진 적 없는
그는 몸을 벗어 던지려는 듯 한참을 끙끙거렸다
나는 신하도 하나 없는 왕이야, 그는
임금 王자가 새겨진 배를 유리에 문지르며
입을 뻐끔거렸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나마나 다 안다는 듯
그의 시선은 유리벽 밖에까지 맺히지 못했다
짤막한 꼬리로 물 속에 무수한 마침표를 찍으며
그는 그렇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등판에 펼쳐진 별자리판에서
제 운명의 슬픈 점괘 하나를 얻은 것처럼
알라, 알라, 코란을 읊는 것처럼 그는
자꾸 콘크리트 바닥에 몸을 끓어 앉히고 있었다
용
최금진
뒷산에서 주워온 뼈는 거대한 용뼈, 솥을 걸고 곰탕을 끓이면
한 사발씩 달게 마시고 늘어지게 한숨 자고 일어났네
지느러미 같은 산맥들이 동해바다를 향해 달리고
그 몸통의 절반이 동네 뒷산에 묻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용꿈을 자주 꾸어서 복을 많이 받았네
죽었을 때, 눈이 내렸으니까
내 꿈에도 붉은 용이 한 마리 내려와 앉았었는데
그때는 너무 어려서 나를 제물로 바칠 생각을 못했네
구름들이 빠르게 바람을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면 필시
먼 바다에서 용오름이 있는 것이어서
우리 마을 이름 없는 부족국가의 왕들이 일제히 일어나
탄성을 지르는 소리가 우리들 귀에도 쟁쟁히 들렸네
고갯마루에 깊이 묻힌 바위는 용바위,
마을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는 용두산,
깊이도 근원도 모를 곳에서 솟는 우물은 용천,
뒷산에서 주워온 용의 발톱 하나를 끓여
온 마을 사람들이 끼니를 때우던 때도 있었네
할아버지는 상여 꼭대기에 서서 팔자수염을 휘날리며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몰고 산으로 올라갔었네
관절염에 걸린 사람들이 삐걱삐걱 다 닳은 연골에 힘을 주며
저마다 들고 온 삽으로 구멍을 팠네
풀과 이끼와 나무들이 잔뜩 낀 산등허리에
망자를 심어놓으면 밭둑에 누런 콩이 스무댓 말쯤 열리는 생각들
산은 잠든 눈을 가만히 뜨고
허리를 들썩였네, 흙이 후두둑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마을 제일 높은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지붕들이
꼭 떨어진 작은 비늘조각처럼 빛났네
먼 바다에서 작은 구름이 똘똘 뭉쳐지면서 커다랗게 일어나
비를 쏟곤 하였는데, 빗방울에는 작은 꼬리가 달려 있어서
꼬물꼬물 사람들 입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곤 했었는데
용담사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는
흰 수염을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들이 가득했네
로또가 함께 하길
최금진
앞은 캄캄하나 우리에겐 로또가 있잖아요
촛불 대신 케이크 위에 칼을 꽂아요
그럴 배짱도 없다면 제발 아프지나 말아요
여기서 거긴 너무 멀잖아요, 혼자 가야 하잖아요
케이크 조각들을 이웃과 나누어 먹기엔
우리의 이웃들은 너무 점잖거나 고집이 세서
외롭다는 걸 이해하지 못해요
자살충동 따윈 잊어요, 그건 돈이 되지 않아요
서른아홉 개의 칼날 꽂힌 당신의 생일
꿈이 있다면 로또에 당첨되어 여길 뜨는 것
생일 축하해요, 로또가 당신과 함께 하길
구석에 앉아 찔찔 눈물이나 흘릴 거라면
아프지나 말아요
가만히 있어도 눈송이는 스스로 무거워요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저기 베란다 아래 환하게 불켜진 편의점에서
로또가 우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릴 향해 손을 흔들고 있어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아프지나 말아요
살구나무의 무거움에 관하여
최금진
어둠이 까놓은 알들이 눈을 뜬다
살구나무의 흔들리는 두통 속에서도
붉게 뇌종양이 켜 진다
그의 둥근 얼굴 위에 세워졌던 창밖의 가로등들이
안 보이는 커브길 로 사라진다
대문도, 문패도 없는 그의 막노동이
월급봉투처럼 행복하게 입맛을 다셔보았을
살구 싶다, 살구 싶다, 최면처럼 굵어진 살구알들
뇌수가 터져 발밑에 흥건하다
바람은 늦은 조문객이 되어 흥청거리고
일찍 온 사람들의 그림자는 가늘게 춤을 추는데
그가 누워있던 방은 안과 밖을 가른다
창밖으로 하루의 끝물인 날벌레들을 불러 모은다
텅 빈 까치집처럼 하늘에 달은 비어있고
살구 싶다, 살구 싶다, 울음 끝에
매달려 있던 살구알들이 떨어지는 밤이다
마흔 살
최금진
낮이든 밤이든 내가 나타나는 자리마다 물길이 열리고
월셋방에서 표류하는 식구들 오뎅처럼 불어터진 눈알이 슬슬 물러서고
오늘은 좀 어떠신지, 약은 드셨는지,
새끼지만, 나를 죽이고 싶은 어머니의 부처님 같으신 얼굴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나를 수시로 간 본다
술을 마시면 나비가 왱왱 사이렌을 불며 날고
나는 어린애처럼 주먹을 휘두르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더 멀리 갈 수도 있었는데 벌써 마흔이 된 나는
주님, 주님, 오래 전 애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꾸 외롭다
정말 되는 일도 없구나, 백수처럼 살아오며 깨달은 결론을
독버섯 백과사전에 열쇠처럼 끼워 돌리면
미치광이 광대버섯, 책속으로 사라진 한번도 오지 않은 나의 전성시대가
싸구려 벽지에 시커멓게 곰팡이 피는데
창밖에서나 꿈에서나 아무데서나 나를 발견하는 피해망상
장마비 속을 걸어다니는 귀신들도 나를 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를 왜 낳았는지도 모르는 가축 같은 어머니는 자꾸 웃고
아내의 머리통에선 앙파싹이 불꽃처럼 돋고
지겨운 생을 피워올리느라 아내도 지겹고
계란을 부화시켜 세상을 닭으로 채우고 싶은 아이의 소망은 바보 같고
무엇보다 그건 돈이 안 되고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식구들 일확천금은 장담할 수 없으며어머니의 퇴행성관절염은 뉴스에도 안 나온다돈 떼어먹고 달아난 집 주인은 나보다 힘이 세고 나는 두통밖에 믿을 게 없어서 툭하면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그릇을 집어던지면 아이는 슬금슬금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어릴 때 소주병에 잡아넣고 보던 반딧불이가 혼령처럼 떠다니는 밤숨을 쉬기 위해 최대한 숨을 아껴서 쉬어야 하고이것마저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은 게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는데교회조차 안 다니는 식구들의 미래가 갈수록 불쌍하고순한 가축처럼 힐끗힐끗아직 살아있니, 어머니가 든 생명보험 증권만 나를 간 보고 새벽에 거실에 누워있으면 꺼진 TV만 검은 혀를 내밀어 나를 핥고
동굴 속으로
최금진
동굴은 어둠을 꽉 물고 절대 놓는 법이 없다
한 어린 남자와 그의 늙은 기둥서방은
그들이 사냥개처럼 침을 흘리며 물고 있는 자신의 기이한 불행을
결코 놓지 못 한다
미련하고도 지루한 관광객들의 대열을 따라
왜 함께 동굴탐사를 따라 나섰는지
남들과 같을 수만 있어도 우린 구원받은 거예요, 동굴은
자꾸만 꺼먼 젖줄 같은 길을 그들에게 쥐어주며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와 똑같은 허기로
그들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지겨워, 이 깊이, 이 무수한 갈림길, 텅텅 울리은 당신의 말소리들
여기서 끝장을 냈으면 좋겠어, 한 남자와 그의 기둥서방은
추락사를 가장하여 동굴의 낭떠러지로 서로를 유인할 수도 있다
미친년 같은 고요는 숨어서 웃음을 참고 있고
관광객들은 멀찍이 뒤쳐져 따라오는 그들을 수군거리며
플래시 같은 눈빛으로 그들을 자꾸 흝어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형체도, 소리도 사라지고, 앞선 사람의 엉덩이에 머리를 박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의 실체를 마주 대할 때
한 남자와 그 남자의 기둥서방은 겨우 남들과 같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서로의 안 보이는 얼굴을 더듬을 수 있을까
당신이란 그릇 안에 담긴 우울한 침향 냄새가 좋았을 뿐이에요
여기까지가 우리가 갈 수 있는 전부네요, 어린 남자의 속마음을
늙은 남자는 더는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뒤로 와서 지긋이 목덜미를 물며 애무하는 동굴의 입
당신은 한번도 저를 놓은 적이 없어요,
플라스틱 안전모자를 벗고 더듬더듬
서로를 힘껏 포옹하는 동안은 불결한 희망도 감춰질 수 있을까
동굴, 사람들이 발 딛고 있는 땅 밑의 무수한 허공에서
새빨간 심장을 꺼내어 촛불처럼 들고 서 있는
한 어린 남자와 그의 늙은 기둥서방용서해 주지 않아도 좋다, 인생은 짧고 공허는 깊다
불
최금진
저 년을 당장 끄집어내어라, 여우 같은 년
온 집안을 깡그리 태워먹을 년, 이불을 덮어쓰고 앉아
그녀는, 그 년은
입 속에 넣고 오물거리는 붉은 구슬 같은 울음을
꺼냈다 도로 삼켰다 하였네
이빨을 부싯돌처럼 딱딱 부딪히며
하악, 하악, 허연 숨을 내몰아쉬며
집안 남자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차돌을 던졌네, 차돌은 가장 하얗고 깨끗하고 단단한데
차돌끼리 부딪히면 빨간 불씨가
홀딱홀딱 재주를 넘어 그녀에게까지 번지면 어쩌나
물오른 소나무 줄기 같은 그녀의 향긋한 몸에
불이 바늘처럼 파랗게 돋아나면 어쩌나
저 년이 들어와서 다 망했다고 두 주먹을 말아 쥔 노인이 울고
사내는 절망하여 귀때기가 너덜거리고
그녀의 이불에 타들어가는 빨간 모란꽃
불여우 같은 년, 저 년 꼬랑지가 얼마나 고운지
가죽을 벗기면 백만 원엔 팔릴 텐데, 예쁜 년, 예쁜 년
그 눈 속에 살아 움직이는 활활 타오르는
저녁 노을,
그녀는 방금 낳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아기를 안고서
무슨 주문처럼 중얼중얼
다신 안 그럴 게요, 안 그럴 게요, 울었네, 웃었네
에그, 망측한 것, 요망한 것
그러고도 방구석에 틀어박혀 썩 나오질 못하네, 꺼지질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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