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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자료는 이 곳에 스크랩 시는 어디에나 있다 |詩論 문학이론- 무지개...의 나비님 글
仁影 추천 0 조회 48 12.08.27 13: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는 어디에나 있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묻기를, “도가 어디에 있습니까?”하자, 장자는 “없는 곳이 없소.”라고 했다.

“어디에 있는지 꼭 집어서 얘기해 주시오.” “청개구리나 개미에게도 있소.”했다.

 “어찌 그리 하등한 것들에만 있소.”

 “기장이나 피에게도 있소.”

 “어찌 더 하등한 것으로 내려가오.”

“기왓장이나 벽돌에도 있소.”

“어째서 더욱 하등한 것으로 내려가오.”

 “똥이나 오줌에도 있소.” 이윽고 동곽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없는 동곽자에게 장자는 이렇게 일렀다.

“당신의 물음은 도의 본질에 미치지를 못했소.

예컨대 시장 관리인이 시장 감독자에게 돼지의 살찐 여부를 알아보게 했을 때 조사하는 부분이 꼬리나 다리같이 하잘것없는 부분을 조사할수록 다른 부분이 살쪘는지 아닌지를 더 잘 알 수 있소.

당신은 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한정하려고 했는데, 이는 잘못 된 것이오.

지극한 도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오. 위대한 도를 말하는 말도 그와 같아, 周·?·咸의 세 글자가 그 이름은 다르지만 그 실제의 뜻은 같은 것으로, 어느 것이나 도가 두루 존재한다는 뜻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하나요.” _『장자』, 「知北遊」




시는 말의 꾸밈이 아니요, 말 그 자체다. 말은 만물과 그 징조를 드러내는 기호다.

시인은 그 징조에 감응하여 노래한다.

사람은 말을 쓰는 자일뿐만 아니라 말 그 자체다.

사람은 말의 밖에서 살 수 없다. 아울러 말의 안에서도 살 수 없다.

사람은 말과 더불어 살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말로 사람과 소통하며 천하를 부리고 우주만물의 움직임을 고무할 수 있다.

사람은 말과 더불어 흥하고 쇠한다.

사람이 그러하듯 말 역시 변전의 운명을 내재화한다.


시인은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몸으로 산다.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득세하는 문명 세계에서 쓰는 것만으로 존재를 지탱하려는 자들은 무용한 열정에 들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들은 빗방울에서 움직이는 우주를 보며, 모래알에서 궤도에서 이탈한 별의 현존을 보며, 꽃봉오리를 흔들고 지나는 한 줄기 바람에서 탐미에의 몸짓을 본다.

시집이 안 팔리고 시가 헐값 취급을 당하는 이 세태의 천박함에 맞서 시인은 시로써 내면의 소리를 붙잡고, 세속이 품은 神聖을 직시하며, 언어로 우주를 건설하려고 한다.

시인은 無痛文明의 시대에 사람들이 떨쳐 내는 고통을 제 몸에 품고 진주를 키우는 정신의 천연기념물이다.

시인들이 있기에 권태와 허무와 절망마저 뜻과 생기를 얻고, 우연의 응축들로 이루어진 모든 삶들이 빛난다.


시는 심미 본능에 바탕을 둔 언어 예술이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가 시의 목적은 아니다.

시는 일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뜻의 곡진함, 말법의 새로움, 생동하는 기운이 한데 어우러질 때 시는 제 빛을 낸다.

감히 시가 생계를 견인하는 일보다 갈급하며 숭고한 사업이라고 단언하지는 못 한다.

하지만 심미 감각을 세련되게 하며 세상을 보는 다른 눈과 다정한 인격을 키워주는데 제격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때때로 사람은 먹고 사는 것과 결부된 합목적성을 넘어서서 숭고함의 본질 속에서 우리 삶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다.

시는 그 숭고한 욕망의 구체적 현존이다.

그래서 시를 아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 곧 우주를 아는 것이다.


시는 경험을 청취하되 경험을 넘어간다.

시는 오래된 기억이기 보다는 反記憶, 혹은 기억의 代贖이다.

시는 역사에 기생하지만 제 존재가 나온 근원이며 숙주인 역사를 부정한다.

역사의 언어는 화석의 언어이고 시의 언어는 생물의 언어인 까닭이다.

시는 의미의 정언적 요청이 아니라 의미를 갖고 노는 놀이이다.

시는 역사에 투항할 때가 아니라 역사와 맞서며 긴장관계를 이룰 때 빛난다.

 시를 빚는 욕망과 기억들은 역사가 내장한 도덕과 계시의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쾌락과 즐거움에 따라 움직인다.

시는 환원불가능한 것을 화석화시키는 대신에 생물로 끌어안고 그것과 연애한다.

시인은 온갖 사물들과 연애를 하지만, 사물에 몰입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뒤집어 이면을 본다.


시는 언어 이전에 있다. 시가 언어의 질료성을 제 실존태를 삼는 게 사실이라면 정서 그 자체는 시가 아니다.

정서에 언어가 입혀지는 순간 그것은 불가피하게 시인의 개성과 기질을 드러낸다. 시는 언어를 쓰되 언어를 넘어선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강을 건너는 나룻배다.

강을 건넌 자는 나룻배를 버린다.

시는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 리듬, 비전을 추구한다.


시는 언어도 아니요, 그것을 다루는 기교가 아니다.

그것들을 버리고 나아가는 데 시가 있다.

노자는 『도덕경』의 첫 장에서 말과 문자가 도를 한정지을 수 없고 그것에 의지해서는 도에 닿을 수 없음을 단호하게 천명한다.

“말로 드러내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요, 이름을 지어 부르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없음은 천지의 처음이고, 있음은 만물의 어미됨이다.

그러므로 없음에서 도의 실재를 살펴야 하며, 아울러 있음에서 도가 작용함을 살펴야 한다.

이 둘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것으로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 둘은 다 같이 幽玄하다.

그 깊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어 온갖 도리와 변화를 아우르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도덕경』제1장) 말은 만물에 앞서지 못하며, 따라서 天地의 시작이며, 萬物의 어머니라 일컫는 도를 말이 앞설 수는 없다. 말은 분별하고 규정하는 인식의 도구일 뿐이다. 만물의 있음 뒤에 말이 생겨났다.

그 우주 만물의 처음은 텅빔이며, 그것은 어떤 이름으로도 부를 수 없는 無極이며 太虛다. 노자는 그것에 도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도는 텅 비어 있으되 차 있지 않음을 쓰는 듯하다. 깊고 깊은 것이 만물의 기원인 것 같다.

그 날카로운 것을 꺾어 보려 하면 그 빛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 같고 그 얼크러진 것을 자세히 풀어 헤치면 그것은 먼지와도 같다. 맑고 맑아 혹 있는 것도 같은데 나는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상제보다 더 먼저인 것만 알 따름이다.

道, 沖而用之, 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노자, 『도덕경』 제4장) 노자는 도를 우주 만물을 있게 한 태초의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텅빔으로 존재한다.

말은 그 텅빔을 채울 수도 없고 그것을 바로 부를 수도 없다.

말 위에 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노자는 “말로 드러내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요, 이름을 지어 부르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시는 언어를 쓰되 궁극에서는 그 언어를 버려야 한다.

시가 항상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의미를 끌어내려는 것,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과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압축파일을 지향하는 게 그 증거다.

시는 언어의 금욕주의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수다를 추문으로 만든다.

시는 언어를 진술의 방법적 도구로 쓰되 언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영원한 모순명제를 산다.

시의 본래면목이 진술이 아니라 울음이며 노래이고,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계시로 어두운 하늘에서 우는 천둥이며 번개인 까닭이다.


經書들은 변화무쌍한 물물의 세계 속에 작용하는 항구불변의 이치를 추구한다.

만물을 아우르며 그것에 작용하는 영원하며 지극한 도리를 찾고 그 도리를 기둥삼아 인간사의 기강을 확립한다.

그러나 시는 만물에 작용하는 변화무쌍에 조응하여 말을 변통하고 활용하며 변화무쌍과 더불어 노는 것이다.

하찮은 벌레의 울음소리, 대숲에 이는 바람, 진눈깨비 내려치는 들판, 우뚝 솟은 산과 구비쳐 흐르는 강, 해와 달의 빛, 봄의 생동하는 기운과 가을의 쇠퇴하는 기운, 사계절의 순환, 만물의 나고 죽음..... 등등이 그 변화무쌍 속에서 流轉한다.

멈추고 흐르지 않은 것은 죽음이다.

멈추지 않고 흐르며 나아가는 것이 삶이다.

멈춘 것은 굳고 강해지는데, 이는 죽음의 현상이고, 흐르는 것은 부드럽고 유연한데, 이는 산 것의 불가피한 기질이요 바탕이다.

노자는 “사람이 태어남에는 부드럽고 약하나 그 죽음에는 뻣뻣하고 강하다.

풀과 나무도 태어남에도 부드럽고 연하나 그 죽음에는 말라비틀어진다.

그러므로 뻣뻣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이 때문에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도 강하면 꺾이니, 강하고 커다란 것은 밑에 처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처한다.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兵, 强大處下, 柔弱處上.” (노자, 『도덕경』제 76장)고 했다.

그래서 부드럽고 약한 것이 늘 굳세고 딱딱한 것을 이긴다.

노자가 본 바 사람은 그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존재다. 그렇다고 시가 만물에 작용하는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옛 경서에서 “시는 생각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말을 길게 읊은 것이다.

詩言志, 歌永言.”(『尙書』「舜典」)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는 경전에 보이는 시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또 『漢書』에서도, “그 말을 읊은 것을 시라 하고, 그 소리를 읊은 것을 노래라 한다. 誦其言, 謂之詩. 詠其聲, 謂之歌.” (『漢書』「藝文志」)고 하였다.

시와 노래는 한 몸이었는데, 훗날 둘로 나뉜 것이다.

『禮記』에서 “시는 그 생각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그 소리를 읊은 것이며, 춤은 그 모습을 움직인 것이다.

이 삼자는 마음에 근본을 두고 있으며 그러한 뒤에 즐거움이 뒤따른다.

詩, 言其志也. 歌, ?其聲也. 舞, 動其容也. 三者本於心, 然後樂氣從之.”라고 하였다. (『禮記』「樂記」) 이렇듯 시란 생각이 움직여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마음에 담은 것은 생각으로 여물고, 생각은 말에 의지해 外示되는 것인데, 그게 韻을 갖추면 시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예기』의 주에서는 “시는 이어받은 것을 말한 것이다.

詩之言承也.”라 하였고, 劉?은 “시란 지(持)다. 사람의 성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

시경』 삼백 편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결국 내용에 사악함이 없다는 순수성으로 귀결된다. 이에 시를 지(持)라고 풀이한 것은 논리에 맞는다.

詩者, 持也. 持人情性, 三百之蔽, 義歸無邪, 持之爲訓, 有符焉爾.”(유협,『文心雕龍』「明詩」)라고 하였다.


경서가 사람이 마땅히 따르고 본받아야 할 이치와 도덕을 세운다면 시는 감정에 바탕을 두고 만물과 조응하여 일어나는 심정을 화창하게 하는 기율을 따른다.

경서가 심지를 바르고 굳세게 세운다면, 시는 누리고 즐기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경서와 시의 바탕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 그 근본 바탕은 사람이고, 사람을 비로소 사람이게 하는 마음이며 마음에서 지은 말이다.

白居易는 「與元九書」에서, “六經에 대해서 말하면 시가 으뜸이다.

왜 그런가 ? 성인은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데,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것으로는 감정 보다 나은 것이 없고 말보다 먼저인 것이 없으며 소리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내용보다 깊은 것이 없는 까닭이다.

시란 감정에 뿌리를 두고 말에서 싹틔우고 소리에서 꽃피우고 내용에서 열매를 맺는다.

 就六經言, 詩又首之. 何者? 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 感人心者, 莫先乎情, 莫始乎言, 莫切乎聲, 莫深乎義. 詩者, 根情, 苗言, 華聲, 實義.”라고 하였다.

백거이는 당나라 代宗 大曆 7년(722) 정월 20일에 鄭州 新鄭縣에서 季唐의 차남으로 태어나 사람이다. 백거이의 자는 樂天이고, 만년에는 호를 醉吟先生 또는 香山居士라 하였는데, 이름으로 삼은 居易는 『中庸』의 “군자는 편안한 위치에 서서 천명을 기다린다.

君子居易以俟命”는 말에서 취하고, 자로 삼은 樂天은 『易·繫辭』에 나오는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

樂天知命故不憂”는 말에서 취했다. 1천3백 년 전 사람 백거이는 감정과 내용이 시의 안쪽에 숨은 본질이고, 말과 소리는 시의 바깥으로 드러나는 외형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경서의 큰 줄거리는 도덕이고, 경서의 효용성은 도덕을 통한 인성의 교화에 둔다.

그러나 교화가 늘 경서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시 역시 교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언급은 옛 서책들에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禮記』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나라에 들어가면 교화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사람됨을 부드럽고 너그럽게 하는 것이 시의 교화이다.’

 孔子曰, 入其國, 其敎可知也. 其爲人也, 溫柔敦厚, 詩敎也.”(『예기』「經解」)라고 하였다. 『예기』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봄과 가을에는 禮樂을 가르치고, 겨울과 여름에는 詩書를 가르친다. 春秋敎以禮樂, 冬夏敎以詩書.”(『예기』「王制」)는 구절을 볼 수가 있다.

章學誠은 『文史通義』에서, “후세의 학문은 六禮에 근원을 두고 있으나 대부분은 詩敎에서 나왔다. 後世之文, 源於六禮, 而多出於詩敎.”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시가 예와 도덕의 근간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시는 시이면서 詩敎였던 것이다 !


시는 낭랑한 말이며, 만물의 형상과 마주하여 마음에 일어나는 그림이다.

좋은 시는 소리를 잡고 그림을 내치지 않고 그림을 잡고 소리를 배제하지 않는다.

좋은 시는 소리와 그림을 함께 붙잡아 그것으로 文采의 지극함을 만든다.

시는 文采와 聲韻이 조화롭게 어울릴 때 비로소 위대해질 수 있다.

유협은 시가 마땅히 따르거나 피해야 할 여덟 가지의 풍격을 논하는데, 첫째 典雅, 둘째 遠奧, 셋째 精約, 넷째 顯附, 다섯째 繁縟, 여섯째 壯麗, 일곱째 新奇, 여덟째 輕靡가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여섯 가지는 문장의 격식으로 모범삼아야 할 것이고, 뒤에 언급한 두 가지는 삼가고 멀리 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경서에 이르는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요,

둘째는 깊고 간곡한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요,

셋째는 대충대충 함이 없이 세밀하게 따지고 살피는 것이요,

넷째는 표현의 기율이 바르고 분명하며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요,

 다섯째 두루 해박하여 비유와 수사가 거침없는 것이요,

여섯째 그 논지가 고매하고 기획이 웅대해서 아름답고 특출한 문채를 이루는 것이요,

일곱째는 옛것을 멀리 해서 새롭고 기이한 것만 따르는 풍조요,

여덟째는 들뜬 표현과 알맹이가 없이 세속의 유행에 치우치는 것을 말한다.


유협에 따르자면 이상적인 문장은 ‘風’과 ‘骨’과 ‘文采’가 두루 어우러져야 한다.

풍은 작가의 사상과 감정, 기질적인 것에서 유래한 구체적인 표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글을 기운생동하게 하는 힘이다.

풍에 따라 글은 부드럽거나 강건해진다.

골은 몸을 지탱하게 하는 뼈대로 표현의 짜임새와 체계를 바로 세우는 것을 뜻한다.

풍과 골이 살아 있어야 글에 생기가 있고 수사가 빛이 난다.

그것이 빠지면 글은 김빠진 탄산음료와 같이 밍밍해지고 만다. 풍격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뒤에 거기에 문채가 더해져야 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뜻은 정확해야 하고, 그 체계가 바로 서야 하며, 거기에 수사의 화려함이 더해져야 한다. ‘采’는 수사적 아름다움을 뜻한다.

문학의 즐거움은 이 채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채의 실질은 사물에 감응하는 느낌의 총체다. 그 느낌의 총체를 유협은 ‘情’이라고 했고, 그것이 채의 내적 본질이라고 정의했다.

그 정이 외시적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채다.

그 둘은 안과 겉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서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을 유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려한 꿩이 갖가지 색들의 깃털을 두루 갖추고 있으나 백보밖에 날지 못하는 것은 살은 쪘으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매가 아름다운 깃털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은 골력이 강건하고 그 기운이 맹렬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재능과 역량도 이와 유사하다.

만일 風과 骨은 있으나 문채가 없다면 문학의 영역에 야생조류들만 있는 것과 같을 것이고, 문채는 있으나 풍과 골이 없다면 문학의 숲에서 도망 다니는 꿩과 같을 것이다.

오직 빛나는 문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높이 날아오를 수 있어야 문장에서 봉황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夫?備色, 而?저百步, ?風而力沈也, 鷹준乏采而翰飛戾天, 骨勁而氣猛也, 文章才力, 有似於此, 苦風骨乏采, 則雉集翰林, 采乏豊骨, 則雉竄文유, 唯藻耀而高翔, 固文章之鳴鳳也. ”(유협, 『문심조룡』, 「풍골」) 나는 우리 문학의 숲에서 여러 야생조류들을 보았는데, 그 중에는 깃털이 화려한 꿩도 있고, 성정이 거칠고 메마른 매도 있었다.

꿩은 잘 날지 못해 우스꽝스럽고, 매는 꼴이 사납고 흉해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다. 높이 날며 깃털이 아름답다는 봉황은 아직까지 찾아보지 못했다.


오늘의 한국시단은 가히 백화가 한꺼번에 꽃을 피우고 방향을 공중에 퍼뜨리는 만화방창의 시절이다. 갖가지 기화요초가 만개했으나 그것을 진정으로 아끼고 즐기는 사람은 적다.

시인은 많지만 시집은 팔리지 않는다.

오늘의 시인들은 물에 비친 제 그림자만을 무력하게 바라본다.

“슬픈 꽃이여, 홀로 자라며 마음 설레게 하는 상대라곤 / 오직 물속에 무력하게 보이는 제 그림자뿐.”(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시인들이 무력해서 제 그림자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 그림자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무력해지는 것이다.

오늘의 시인들은 제 그림자를 보고 저 혼자 감탄하고 저 혼자 설렌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 사람들의 미에 대한 기호가 편벽되어 있기 때문일까 ?

시의 풍격과 문채가 오늘의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화창하게 하는데 부적절하기 때문일까 ?

아니면 오늘의 시인들이 너무 표현의 신기성만 좇다가 절실함과 심오함을 잃고 문학의 풍기를 쇠미하게 만든 탓일까 ? 사람이 시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것은 시절이 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성정은 거칠어지고, 당장에 실용이 안 되는 것은 멀리 한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문학을 정신의 精華로 여기지 않는다.

옛사람은 “문학은 나라를 경영하는 것과 같은 큰일이며 불후의 사업이다.

蓋文章, 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라고 했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 말이 공감은커녕 비웃음을 살 만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오늘의 시인들이 문학에 임하는 심령과 재기가 옛사람의 그것을 능히 따라가지 못하는 일면도 있다.

“문예의 규율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그 성과를 날로 새롭게 한다.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지속되고 전통을 지속함으로써 결핍을 면하게 된다.

시기를 맞이하면 반드시 과감해야 하고 기회를 탔을 때는 겁내지 않아야 한다.

당대를 바라보아 특이한 표현들을 창작해내고 이전 것을 참조하여 문예활동의 법칙을 정한다.”

文律運周, 日新其業, 變則可久, 變則不乏, 趨時必果, 乘機無怯. 望今制奇, 參古定法. (유협, 『문심조룡』, 「통변」) 모름지기 새것으로 제 이름을 내려는 자들은 옛것에 통달하여 그것을 잇고, 그 바탕 위에서 새것을 창출해내야 한다.

오늘의 시인들이 쓰는 표현과 수사법은 신기하고 복잡해졌으나 자주 핵심적 본질을 놓치고 그 기세는 허약하다. 옛것에 대한 공부가 덜된 탓이다.

우주만물에 미치는 신령한 이치를 궁구하는 시인들은 적고, 헛된 명성을 좇는 시인들은 많다. 오늘의 문학을 어지럽히는 혼탁한 사조는 시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문학의 숲에서 봉황은 찾아볼 수 없고 살찐 꿩과 굶주려 미친 매들만 득실거린다 해도 남 탓 할 일이 아니다.

오늘의 시인들은 대선배이신 백거이의 말을 새겨야 한다.

“문장은 시대에 부합하게 짓고, 시가는 시사에 부합하게 지어야 한다.

文章合爲時而著, 歌詩合爲事而作.”(백거이, 「與元九書」)


그럼에도 좋은 시인들이 아주 없지는 않고 그들이 피를 찍어 쓰는 시집은 노닐 만한 꽃밭이다.

시인들은 고독하고 피곤하지만 그들이 짓는 시의 ‘집’들은 무릉도원 속에 있다.

그것은 “자수정의 정원들”(스테판 말라르메)이다. 시의 집들은 피안이고 동굴이다.

그 동굴은 인류 발생의 모태와 닮아 있다. 그것은 “신비와 두려움 어린 어떤 입구”다.

우리가 꿈꾸는 은신처, 고요한 휴식과 휴식의 꿈이 양육되는 곳이다(가스통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시의 집들 속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다.

왜냐하면 우울한 기분을 화창하게 하는 까닭이다.

다시 한번 유협의 언술을 빌려오자. “작가의 창작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작품의 뜻과 감정의 여운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어휘의 기세가 함께 모여들어 이상적인 작품의 풍격을 연출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을 독자가 눈으로 보면 비단에 수가 놓여 있는 듯하고, 귀로 들으면 관현악을 듣는 듯하며, 이를 음미하면 풍부한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이를 감상하노라면 꽃의 향기가 나는 듯하다.”(유협, 『문심조룡』,「총술」) 우리는 여러 오솔길들을 거쳐 꽃밭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 꽃밭에 이르러 눈앞에 펼쳐진 꽃들의 아름다움에 취해 “꽃이여 !”라고 말하는 순간 그 꽃들은 무슨 환각인 듯 눈앞에서 사라진다.

눈앞에서 사라진 것들은 마음속에서 “그윽하게, 솟아오른다.”고 말한 것은 말라르메다.

“내가 ‘꽃 !’이라고 말하면, 내 목소리에 따라 여하한 윤곽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망각의 밖에서, 모든 꽃다발에 부재하는 꽃송이가, 알려진 꽃송이들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음악적으로, 관념 그 자체가 되어 그윽하게, 솟아오른다.”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황현산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우리가 사물의 이름을 불러 호명할 때 그것의 물질성으로 외시된 현존은 사라지고 순수한 현존만이 남는다.

사람들은 순수 현존을 음악이나 관념에서 느낀다.

음악은 알 수 있고 느낄 수는 있으나 만질 수는 없다. 물질 현존이 사라지고 순수 현존만이 그윽하게 솟아오를 때 비로소 “시라는 이름을 가진 미의 기적이 일어난다.”(황현산) 꽃밭에는 물질로 화신한 꽃들은 사라지고 모든 꽃다발에 없는 꽃송이들만 휘황하게 피어 있다.

그 꽃송이들은 꽃으로서가 아니라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음악으로 그윽하게 솟아오르는 것이다.


「老子詩話」는 그 꽃밭으로 가는 한 장의 지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집들을 두루 널리 구해서 읽은 뒤 그 지도를 그려내는 일일뿐 그 꽃밭 속에서 꽃향기에 취해 유흥과 도락의 날들을 누리는 것은 오로지 당신들의 몫이다.

아래의 목록에 적은 시집들을 곁에 끼고 즐겨서 여러 번 읽었으나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따라서 내 지도를 그리는데 필요한 도움을 이것들로 한정해서 구하지만은 않겠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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