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을 밟으며 만경강과 김제 뜰을 걸은 서해랑길(#52)
2023. 12. 24. (일) 날씨 : 흐린 후 갬
기온 : 섭씨 영하 4~영상 2도
거리/시간 : 18.4km/5.5시간 동행 : 27명
복교리 새창이 다리-(4.5km)-만경 낙조 전망대-(7.1km)-
진봉면사무소-(5.3km)-망해사-(1.5km)-심포항
가지 않은 길(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길은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누구도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순 없다.❞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은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다”라고 썼다.
길에는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My Way)’도 있고, 오래된 흑백영화 ‘길’도 있다.
특히 삶의 벼랑 끝에 몰린 프로스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종장은 늘 서늘한 위로를 준다.
길이란 결국 자신이 선택한 대로 만들어진다. 대로가 있으면 막다른 골목도 있다.
돌이켜보면 순조롭고 무난한 인생보다 치열하고도 파란만장한 삶이 훨씬 더 아름답고 보람 있는 과정이었음을 느낀다.
시인들은 말한다. 새는 날면서 뒤돌아보지 않으며, 바다는 고향이 없다고….
복교리 새창이 다리
만경강 하류에 있는 구 만경대교는 김제시 청하면과 군산시 대야면을 잇는 530m의 다리이다.
1933년 김제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건설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창진(新倉津)이라는 포구의 지명에서 지명을 따 ‘새창이 다리’라 부른다.
낡고 오래된 새창이 다리에 하트 다리로 알려져 있다.
하얀 눈이 내려 역사적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도 김제와 군산을 잇고 만경강을 건너는 교량이었다는 의미는 남다르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린 것은 8년 전이라고 한다. 밤새 내려 쌓인 눈이 도로를 얼게 해 버스가 달리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27명의 많은 귀연 식구들이 하얀 눈을 보며 함께 걷는 서해랑길 52코스 여정에 함께 했다.
김제평야 만경강 변을 걷는 오늘 여정은 오랜만에 만난 인연들이 추억과 반가움을 엮어 가는 해를 아쉬워하는 자리가 된다.
만경(萬頃)은 ‘만 개의 이랑’이라는 뜻이다. 이름부터 넓은 들판을 품은 만경강은 ‘호남평야의 젖줄’이라 불린다. 전라북도 북서부를 가로지르는 80km의 물길은 완주군 동상면 밤샘에서 발원해 완주와 익산, 김제, 군산을 거쳐 서해로 흘러든다.
만경강은 20여 개의 습지를 품고 있으며 강폭이 넓고 보가 많아 습지가 형성되기 좋은 환경이다.
삼례읍 하리 근처의 신천 습지는 광활한 규모에 독특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갈대와 억새는 만경강 전역에 분포하는데 예로부터 노전백리(蘆田百里)라는 말이 전한다.
만경 낙조 전망대는 만경강의 아름다운 노을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만경강과 바다가 만나 소중한 생명을 품고, 수많은 철새가 반긴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갈대와 낙조가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하얀 눈을 밟으며 좋은 날씨와 포근한 하루를 들판과 산자락을 넘으며 한 해의 끝자락을 보낸다.
적은 인원으로 고전했던 지난 여름이 생각난다.
회원들의 도움으로 두 번에 걸쳐 버스가 시끌벅적했다.
반가운 식구들을 보니 함께 걸었던 산행의 기억과 추억으로 생기가 났다.
누군가의 도움과 성원으로 산행의 정이 가득한 여정이 되면 힘들어도 즐거움이 가득할 수 있다.
멀고 험난한 여정이지만 서로 돕고 이끌어서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적을 만들면 좋겠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던 만경강 걷기가 즐거웠다.
진봉 방조제 : 김제는 본래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루는 넓은 평야였지만, 일본이 식량 수탈을 목적으로 간척 사업을 실시하여 이곳에 방조제를 쌓아 1,928ha의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이 방조제는 1924년 준공되어 진봉지구와 심포지구로 구분 관리하여 왔으며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심포리, 상궐리 일대 1,075.5ha로 몽리 변적은 957.1ha였다.
이곳은 진봉면 고사리 지선이다. 관기 갑문의 배수로는 구배가 완만한 데다 물길이 길어 배수에 시간이 걸려 상류 지역에 침수가 잦았다.
일본은 본국의 부족한 쌀을 보충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증산 계획을 세워 이곳에서 생산된 미곡을 수탈해 갔으며,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충효비각
걷지 않은 새하얀 눈밭
석소마을 쉼터
서해랑길 52코스
간척지 논
양곡보관소
산속 눈길을 지나는 모습
제방 통과
오랜 만에 대열을 갖추어 걷는 서해랑길
망해사를 향해 눈길 언덕 통과
만경강
극락전
망해사
만경강 하류 서해에 접하여 멀리 고군산 열도를 바라보는 곳에 있는 망해사는 오랜 역사에 걸맞지 않게 규모가 작은 편이다.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이곳에 와 사찰을 지어 수도한 것이 시초이다.
그 뒤 중국 당나라 승려 증도법사가 중창하였으나, 절터가 무너져 바다에 잠겼다.
조선시대인 1589년(선조22) 진목대사가 망해사 낙서전을 세웠고, 1933년 김정희 화상이 보광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
진목대사가 망해사에서 있을 때는 바닷가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어 해산물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하루는 굴을 따서 먹으려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왜 스님이 육식을 하느냐며 시비를 걸자
스님은 ‘이것은 굴이 아니라 석화(바위에 핀 꽃)'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석화의 어원이 되었다.
종루에서 세 번 종을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망해사 극락전
두곡서원(杜谷書院)은 성리학자 강원기(康元紀 1423~1498)의 거처가 있던 곳으로, 배향되어 있는 사람은 포은 정몽주, 봉호당 문헌공 강원기, 난계 함부림 등이다.
강원기는 야은 길재, 정몽주와 더불어 경전을 읽어 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그가 경원과 은성 두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때 풍성과 효도의 길을 가르쳐 주는 ’이존록‘이라는 책을 만들어 집집마다 나누어 주기도 했다.
태조 때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그 후 간청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만경현에 정착해서 이곳의 세 가지 폐단을 고쳐주어 주민들의 고충을 풀게 되었다.
그 뒤 지방 사람들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두곡서원을 세우고 배향하였다. 그는 후세에 봉호집(鳳湖集)을 남겼다.
심포항
심포항 낙조
2023. 12. 24. 17:00 심포항 낙조
첫댓글 어제는 정말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에 길을 만들며 걷는 하루였지요.많이는 못 걸었어도 망해사에 들러 종도 쳐보고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난 일본 수탈만 알았지 김제뜰에 간척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항상 청산님의 글에 공감하며 좋은 정보 많이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산님의 잔잔한 글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항상 편안해집니다
문장이 매끈하고 여행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촬영 솜씨도 보통은 아니구요
청산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단체사진, 무심코 지나친 눈덮인 망해사와 심포항 낙조사진 다운받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