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권동진
흔들린다고 비웃지 마세요. 강변의 늪은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이요, 필연적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운명이기에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삶이랍니다. 솔직히 사철 푸른 소나무의 기개나 곧은 절개를 자랑하는 대나무의 태생이 부럽습니다. 인적 드문 강변에서 찬 서리 모진 바람에 서걱서걱 울며 신세타령으로 자괴감에 젖을 때도 있습니다. 송죽처럼 사군자의 반열에 오른다면 시인 묵객이 아니라도 기꺼이 일상의 뜰에 두고 봄직 하겠지요. 뉘라서 늪의 갈대를 품위 있다 하여 가까이 두고자 하리오. 술이라도 거나해져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이라며 변심의 모상처럼 낙인찍어 한 소절 불러 제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변심이라니요. 삶의 터전을 지키고 바람과 공생하는 살풀이춤이 어찌 흔들리는 순정인가요. 근거 없이 변심이라는 멍에를 씌우지 마세요. 태생이 곧고 푸르다 하여 다 고고하고 지조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흔들린다고 비웃지 마세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모진 세파 이겨내려는 군무(群舞)랍니다. 마파람. 높새바람, 하늬바람이 동류는 아니듯이 갈대는 항상 새로운 생명의 춤을 춥니다. 사계절 춤사위가 다르고 하루 중 석양이 지는 시간의 무희가 더 아름답지요. 간혹 무도장에 짜르르 짜르르 무희 복이 끌리는 소리를 엿들을 줄 아는 관객이라도 만나면 절로 신이 납니다. 바람결에 어우러진 뭇 새의 지저귐과 풀벌레의 합창, 고요한 수면을 활주로 삼아 날아오르는 백로의 비상, 먹이를 찾는 물새들의 자맥질, 황혼에 남실대는 갈대의 춤을 알아주니 얼마나 반가운가요. 석양이 질 때 초대장 없이도 강변의 무대를 찾아온 관객과 함께하면 낭만이 깃든 풍경이 연출되지요. 틀에 박힌 관념을 깨고 마음의 눈으로 보세요. 늪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이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됩니다.
흔들린다고 비웃지 마세요. 바람은 대지의 만물을 휘돌아 가는데 갈대만이 흔들린다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세상사 흔들리지 않은 자 뉘 있으리오. 갈대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상생의 이치를 실천한답니다. 바람을 막아 물새 알을 품어주고, 늪에서 숨어 사는 어종과 다양한 생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지요. 비록 강변에서 자생해야 하는 슬픈 운명이지만 비관하지 아니하고 서로 감싸주며 더불어 살아간답니다. 회오리바람이라도 불면 코를 박고 허리를 굽히지만 변심하거나 혼자 살겠다고 버티지 않습니다. 최근 외교부 수장인 유명한 사람이 자녀를 특별 채용하려다 국가의 명예를 훼손하고 자신의 얼굴에 먹칠했지요. 과욕을 부리다 화를 입은 것이니 자업자득이지만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깝습니다.
흔들린다고 비웃지 마세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가없는 생명의 축제요 질곡의 노래입니다. 명주 꽃 같은 하얀 꽃송이를 갈바람에 날리던 날 당신은 어디에 계셨나요. 청명한 하늘 아래 하얀 손 흔들며 부르던 갈대꽃의 축제를, 무심해서 몰랐다니 안타깝습니다. 혹 노위(蘆葦)라고 들어 보셨나요. 갈대의 약명은 노위랍니다. 대부분 사람은 흔하고 쓸모없다지만 열을 내리고 몸에 쌓인 갖가지 독을 해독해주는 것이 갈대랍니다. 인체의 면역력을 키워주며 소변을 잘 나오게 하는 약효가 이 보잘것없다 비웃는 갈대에 있답니다. 화려하고 겉만 번지르르하여 쓸모없는 것에 비하면 갈대의 삶이 차라리 더 낫지 않으세요. 장미만 아름답다 편애하지 마세요. 세상에 온갖 꽃들이 공존하기에 장미가 돋보이는 것이랍니다. 비록 사군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화려한 꽃을 피우지는 못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갈대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갈대의 삶을 노래하고 춤추며 살아갑니다.
나는 갈대의 삶을 살아갑니다.
첫댓글 no
내가 가장 큰 문제로 본 것은 이 작품의 갈대는 의물화 된 것이 아니면서 마치 의물화 된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게 한다는 점이다. 만약에 이 작품이 시창작(시적 발살의 산문적 형상화)이 되었다면 그점은 오히려 장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 문단마다 되풀이 되고 있는 <흔들린다고 비웃지 마세요>가 뒤에 따라오는 문장에서 시를 길어내지 못하고 산문편에 기울고 있다고 생각되어 앞서 말한 의물화 착각이 점수를 잃었다고 보았다.
다른 분들 의견은 어떤지 토론해 주기 바란다.
'송죽처럼 사군자의 반열에 오른다면 시인 묵객이 아니라도 기꺼이 일상의 뜰에 두고 봄직 하겠지요. '와 같이 갈대의 세상이 아니라 사람의 입장에서 쓴 문장들 때문에 의물화로 되지 못하다 보니 선생님께서 산문이라 하시지 않았나 합니다~~
어렵습니다.
끝 문장 '나는 갈대의 삶을 살아갑니다.'가 의물화가 아닌 결정적인 문장이 아닐까요
작품은 못구했고 저도 착각을 일으키게하는 점을 평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선택했어요
오덕렬이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의믈화 된 갈대의 이야기와 화자 시점의 이야기가 혼용된 느낌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