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장기농가(長鬐農歌) 鬐갈기 기
1801년 40세의 나이로 초봄에 귀양 간 경상북도 포항 곁의 장기에서 지은 시들은, 정말로 고통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이자, 조선의 정다운 민족 정서였습니다.
병아리 새로 깨니 어린아이 주먹 크기 鷄子新生小似拳
연노랑 고운 털빛 너무도 사랑스러워 嫩黃毛色絶堪憐 嫩어릴 눈. 堪견딜 감
누가 말하랴 어린 딸년 밥이나 축낸다고 誰言弱女糜虛祿 糜죽 미 祿복 록(녹)
마당가에 앉아서 솔개를 쫓는 걸 堅坐中庭看嚇鳶 嚇웃을 하. 으를 하, 성낼 혁
가녀리고 섬세한 시어들이 잔잔하게 우리의 마음속을 흔들어줍니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농촌 풍경이 그대로 살아나고 있습니다. 밥이나 축낸다는 딸년은 병아리 잡아채는 솔개를 쫓고 있으니, 이런 것을 관찰하는 다산의 눈이 매섭습니다.
어저귀 삼은 초벌 순 베어주고 숫삼밭 김을 매라 檾麻初剪牡麻鋤
시어머니 헝클어진 머리, 밤 되어서야 빗질하네 公姥蓬頭夜始梳
일찍 잠든 영감(첨지)을 걷어차 일으켜서 蹴起僉知休早臥
풍로에 불붙이고 물레도 손봐야지 風爐吹火改繅車
「장기농가(長鬐農歌)」
농가의 농부들 삶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이 든 농부 부부의 생활,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했을까요. 사물의 깊은 내면을 통찰하는 안목이 없고서야 이런 묘사가 나왔을까요.
‘첨지(僉知)’란 벼슬 이름인데, 나이 든 농부들에게 그냥 ‘첨지’라고 부르는 말이어서, 그런 말과 같은 ‘영감(令監)’으로 바꿔서 번역했습니다. 정3품 당상관의 벼슬에 오른 사람을 ‘영감’이라 부르는데, 농촌에서는 나이 든 노인을 ‘영감’이라고 부르고, 특히 나이 든 아내가 남편의 호칭으로 부르는 통상의 말투였습니다.
아낙네란 역시, 얼굴에 로션이라도 바르고 머리에 빗질이라도 해야 하는 거지만, 온종일 일하느라, 어느 사이에 그런 얼굴이나 몸단장을 했겠습니까. 일을 마친 밤이 되어서야 머리에 빗질이라도 하는 건데, 이미 남편인 영감은 곯아 떨어져 잠이나 자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발로 걷어차 일으켜서는 내일 농사 준비를 시킨다는 것이니, 조선시대의 농촌 생활에 몸이 벤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는 구절입니다
번역
장기 농가 10장1
보릿고개 험하기가 태항산 같아
단오절 지나야 곡식 익기 시작하네.
【사월에 민간에서는 식량이 몹시 부족한데, 시속에 그것을 보릿고개라고 한다.】
누가 풋보리 끓인 죽 한 사발을 떠서
비변사 대감께 올려 맛보시게 하랴.
【방언으로 재상(宰相)을 대감이라고 한다.】1
麥嶺崎嶇似太行, 天中過後始登場。
(맥령기구사태항, 천중과후시등장.)
【四月民間艱食, 俗謂之麥嶺。】 艱어려울 간
(사월민간간식, 속위지맥령.)
誰將一椀熬靑麨, 分與籌司大監嘗? 椀주발 완. 熬복을 오. 籌투호살 주
(수장일완오청초, 분여주사대감상?)
【方言宰相曰大監。】
(방언재상왈대감.)
2
모내기 노래 애절하고 논의 물 번들번들할 때
아가가 별나게 수줍어한다고 시어머니 야단하네.
【방언에, 새 며느리를 아가라고 부른다.】
하얀 모시 새 적삼에 노란 모시 치마를
장롱 속에 꼭꼭 싸 두고 추석 오기만 기다리지.
【노란 모시는 경주(慶州)에서 난다.】
3
부슬부슬 새벽비 내리면 담배 심기 알맞아
담배 모종 옮겨다가 작은 울 밑에 심는다.
올봄에는 영양의 재배법을 따로 배워
금사연
【영양현(英陽縣)에서 좋은 담배가 생산된다.】
4
새로 돋은 호박 떡잎 토실토실하더니
밤사이 덩굴 뻗어 사립문에 얽혔다.
평소 수박을 심지 않는 것은
관노가 시비 걸까 무서워서.
5
병아리 갓 태어나 주먹만큼 작아
연노랑 털빛이 정말로 귀여워라.
어린 딸이 공밥 축낸다고 누가 말하나
뜰에 버텨 앉아 솔개 꾸짖어 쫓는 것을.
6
어저귀 갓 베어 내고 수삼 밭 매느라
늙은 할멈 쑥대머리 밤에야 빗질하고,
일찍 누운 첨지를 발로 차 일으키며
풍로에 불 지피고 물레도 고치라 하네.
【방언에, 자기 집 영감을 첨지(僉知)라고 부르는데, 아무 직첩이 없어도 함부로 그렇게 일컫는다.】
7
상추 잎에 보리밥 둘둘 싸 삼키고는
고추장에 파뿌리를 곁들여 먹네,
금년에는 넙치를 구하기 어려워라
죄다 말려서 관가에 바친다지.
8
송아지가 참외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서편 뜰 궁글대 옆에 옮겨 매 두자,
새벽에 이정이 와서 코를 꿰어 가며
지금 동래에서 하납 배에 쌀을 싣는다는군.
【하납(下納)이란, 영남의 세미(稅米) 절반을 일본으로 실어 보내는 것이다. 이웃에 도망한 사람이 있으면 그 포흠을 징수하는 것을 징린(徵隣)이라고 한다.】
9
마당 절반에 새로 배추 밭고랑 만들었더니
하필이면 벌레 먹어 구멍이 숭숭하다.
어찌하면 훈련대 밭 재배법을 배워다가
파초같이 푸른 배춧잎을 볼 수 있으랴.
【서울 배추도 훈련원 밭의 것이 가장 좋다.】
10
시골 사람 화초라곤 장독 가에
맨드라미 봉선화 그것이 고작.
쓸모없다 여기는 해석류가 불같이 붉기에
늦은 봄 옮겨다가 객창 앞에 심어 두네.
2
秧歌哀婉水如油, 嗔怪兒哥別樣羞。
(앙가애완수여유, 진괴아가별양수.)
【方言新婦曰兒哥。】
(방언신부왈아가.)
白苧新襦黃苧帔, 籠中十襲待中秋。
(백저신유황저피, 농중십습대중추.)
【黃紵布, 出慶州。 帔, 裙也。】
(황저포, 출경주. 피, 군야.)
3
曉雨廉纖合種煙, 煙苗移揷小籬邊。
(효우염섬합종연, 연묘이삽소리변.)
今春別學英陽法, 要販金絲度一年。
(금춘별학영양법, 요판금사도일년.)
【英陽縣産佳煙。】
(영양현산가연.)
4
新吐南瓜兩葉肥, 夜來抽蔓絡柴扉。
(신토남과양엽비, 야래추만낙시비.)
平生不種西瓜子, 剛怕官奴惹是非。
(평생부종서과자, 강파관노야시비.)
5
鷄子新生小似拳, 嫩黃毛色絶堪憐。
(계자신생소사권, 눈황모색절감련.)
誰言弱女糜虛祿? 堅坐中庭看嚇鳶。
(수언약녀미허록? 견좌중정간혁연.)
6
檾麻初剪牡麻鋤, 公姥蓬頭夜始梳。
(경마초전모마서, 공모봉두야시소.)
蹴起僉知休早臥, 風爐吹火改繅車。
(축기첨지휴조와, 풍로취화개소거.)
【方言, 家翁曰僉知。 雖無職牒, 亦得濫稱。】
(방언, 가옹왈첨지. 수무직첩, 역득람칭.)
7
萵葉團包麥飯吞, 合同椒醬與葱根。
(와엽단포맥반탄, 합동초장여총근.)
今年比目猶難得, 盡作乾鱐入縣門。
(금년비목유난득, 진작건숙입현문.)
8
不敎黃犢入瓜田, 移繫西庭碌碡邊。
(불교황독입과전, 이계서정녹독변.)
里正曉來穿鼻去, 東萊下納始裝船。
(이정효래천비거, 동래하납시장선.)
【下納者, 嶺南稅米, 半下納輸日本, 名之曰下納也。 隣有逃亡, 徵其所欠曰徵隣。】
(하납자, 영남세미, 반하납수일본, 명지왈하납야. 인유도망, 징기소흠왈징린.)
9
菘葉新畦割半庭, 苦遭蟲蝕穴星星。
(숭엽신휴할반정, 고조충식혈성성.)
那將訓鍊臺前法, 恰見芭蕉一樣靑?
(나장훈련대전법, 흡견파초일양청?)
【京城菘菜, 唯訓鍊院田最佳。】
(경성숭채, 유훈련원전최가.)
10
野人花草醬罌邊, 不過鷄冠與鳳仙。
(야인화초장앵변, 불과계관여봉선.)
無用海榴朱似火, 晚春移在客窓前。
(무용해류주사화, 만춘이재객창전.)
정약용은 1801년(순조 1) 2월 8일 신유옥사(辛酉獄事)가 일어나자 대각(臺閣)의 탄핵을 받고 3월 9일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다. 정약용은 자신의 눈에 비친 그곳 백성들의 생활 환경과 노동 현장을
객관적 태도로 묘사하여 칠언절구 형식의 짧은 시로 형상화하였다.
정약용의 다른 시 <기성잡시(鬐城雜詩) 26수>와 이 <장기 농가 10장>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작품들은 죽지사체(竹枝詞體)의 풍격을 취하였다. 본래 죽지사는 남녀 간의 애정을 애절하게 읊은
민간가요였으나, 당나라 유우석(劉禹錫)이 파유(巴兪)의 민간가요를 수집하여 신사(新詞)를 짓고서부터,
지방 풍물을 묘사하는 속에 남녀 애정을 표현하는 모작들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백거이(白居易)와 원굉도(袁宏道)의 죽지사는 우리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정약용은 죽지사체로
남녀 애정을 그려 내기보다 농어민의 생활상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관료의 실정을 풍간하려는 뜻을 담았다.
또한 동일한 글자나 어구를 거듭 사용하는 반복구를 사용하기도 하고, 토속어와 속담에 가깝다고 할 성어들을
과감하게 활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