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3장 통일교, 세계로 뻗어나가다 4. 세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다 여성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은 많은 역사가 증명한다. 일본의 통일교 여성 신도들이 보여준 봉사와 헌신의 힘은 눈물겨운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사람들은 일본 여성들이 왜 그토록 헌신적인지 의하해 한다. 그것은 그들의 주장처럼, 통일교가 지닌 고유의 원리와 구원의 메시지, 가정과 순결의 중요성, 완벽을 지향하는 도덕성,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일관된 사상 때문이다. 1965년 일본에 통일교가 전파된 이래 수많은 여성 신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 봉사의 소명을 저버리지 않고 문선명의 뜻에 따라 언제나 희생의 길을 걸었다. 이는 한국이나 미국, 유럽의 어느 국가 여성들보다 월등하다 할 수 있다. 일본은 기독교의 국가적 기반이 없는 나라다. 문선명은 일본을 명실상부한 해와국가로 세우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어머니 국가로 자리 매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본 여성 신도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의 특별수련회를 열었다. 수련회는 그 이전부터 지역별, 소규모별로 자주 있어 왔지만 1992년 6월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1개 차수에 2,500~3,000명씩 모두 25차례에 걸쳐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그 숫자는 전부 16만 명에 달했다. 본격적인 교육은 제주도에서 했으나 그 출발은 알래스카에서 시작되었다. 제주도 국제수련원에 모인 신도들을 대상으로 문선명은 매일 설교를 하면서 16만 명 교육에 1,600시간 넘게 투입했다. 해를 넘긴 1993년 10월부터 한학자 총재는 한국 40개 대학을 순회하며 강연했는데 이 기간 중에 제주도 연수원에서 3박 4일 동안 5만 명의 특별수련회가 열렸다. 수련회는 12월까지 총 25회에 걸쳐 진행되었고 문선명은 '참부모와 중생', '탕감복귀의 고개를 넘어가자'등의 주제로 각 수련회마다 20시간 이상 설교를 했다. 또한 한 총재의 대학가 순회강연 상황을 전화로 연결해 수련생 모두가 동참하도록 했다. 제주도에 있는 국제연수원은 3,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강당인데 누군가 그 모습을 보고는 "이것을 설계한 사람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 아닌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된다고 이렇게 큰 강당을 지었단 말인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3개월 동안 5만 명이 밀려오자 경탄을 금치 못했다. 3개월 동안 5만 명을 교육한 뒤 제주도에서 계속 하고 싶었으나 장소가 비좁아 이후에는 구리 중앙수련원으로 옮겼다. 한꺼번에 3,000명씩 오는 식구들을 맞이하기 위한 자원봉사자만 150명이 넘으니 그 분주함과 역동성이 잘 짐작될 것이다. 구리 중앙수련원에서는 1994년 3월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원리교육이 진행되었다. 11월 20일까지 이어진 수련회는 일본 전국에서 온 수련생 3,000 ~5,000명의 신도들로 늘 가득 찼다. 문선명은 개회식에서 '참된 자신을 찾자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으며 교육은 늘 새벽 3시에 끝났다. 수험생들은 두 시간 동안 잠깐 눈을 붙인 뒤 새벽 5시에 일어나 또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문선명은 언제나 자신을 완전히 투입하는 심정으로 수련생 사이사이를 종횡으로 다니며 전심전력을 기울이면서 항상 자상하게 설교를 했다. 또한 한학자 총재도 여러 차례 수련원을 방문해 일본 신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 것은 고생 끝에 1994년 11월 19일 제38회 특별수련회 마지막 날 '16만 명 교육 대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38회에는 7,166명이 참가해 강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에리카와 야스에 회장은 "1993년 6월 7일 알래스카에서 122명의 일본 여성이 수련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알래스카에서 총 2,000명, 제주도에서 5만 1,802명, 구리에서 16만 1,631명이 참부모님으로부터 귀한 은사를 받았다"고 감격해 했다. 언론에는 이 놀라운 업적에 대한 기사가 실렸으며 특히 「세계일보」는 '회개하고, 용서하며, 민족 갈등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다'라고 대서특필했다. 1994년에는 5만 명 수련생 가운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여성 신도들을 다시 불러들여 21일 교육을 했다. 교육이 끝난 후 참가자 전원의 사진을 붙인 앨범을 만들어 일일이 살펴본 후 1,600명을 뽑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중대한 사명을 맡겼다. 어머니 국가가 된 사명감으로 전 세계로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평화와 화합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과제를 맡긴 것이다. 세계 160개국에 1국가에 10명씩 선교사로 내보냈다. 그 여성들은 전부 자신감이 충만하고, 세파를 헤쳐 나갈 강단이 있으며, 통일사상으로 단단히 무장한 평화의 일꾼들이었다. 그녀들에게 문선명은 임지를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여성 지도자들이 각국에 10명씩 세계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전도와 봉사활동에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참어머님 대신으로 어머니의 입장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임지를 배정받은 선교사들은 준비가 끝나는 대로 모두 임지를 향해 출발했고 고난의 선교와 봉사활동이 이어졌다. 자신을 내던지는 헌신과 봉사, 다양한 문화행사 등을 통해 현지에 적응해 나갔으며 통일원리와 평화사상을 꾸준히 전파했다. 문선명은 그녀들에게 최소한 3년은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으며 모두 그 약속을 지켰다. 영국으로 파송된 시바자키 이츠꼬는 온갖 고생을 겪어내면서 4년 반 영국에서 활동한 후 2000년에 돌아왔다. 일본 여성들의 해외 봉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96년 9월부터 4,200명을 대상으로 3차례에 걸친 특별수련회가 제주도에서 또 이어졌다. 16만 명 교육 내용을 재차 강조하고, 각자의 신앙을 확인하고, 하나님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들 대부분은 교육 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날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수련생 중에는 연배가 높은 여성들도 많았으나 언제나 열정과 활기로 가득찼다. 4,200명의 여성들은 1주일 동안 수련회를 받고 북미・중미・남미의 35개 나라로 떠났다. 그녀들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고, 현실 세계에 대한 망설임이나 미련도 없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떠나는 그녀들은 마치 전쟁터를 향해 출발하는 병사와 같았다. 매일 수백 명씩 바다, 강, 육지, 하늘의 모든 교통기관을 이용해 각자의 임지 국가로 출발했다. 각 나라에 120명이 배정 되었는데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큰 나라는 문제가 없었으나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들은 갑자기 일본 여성 120명이 몰려들어오자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여성 선교사들은 입국, 체류, 출국, 재입국, 입국 거부, 재입국 등의 혼란스럽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차차 자리를 잡아갔다. 입국이 거부되었다 하여 포기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임지 국가에 도착해 맡은 소명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한 땀과 눈물 그리고 정성이 중미와 남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카라과에서는 피부가 갈라질 듯한 뜨거운 햇살 아래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이끌고 가가호호 방문하여 봉사활동과 축복활동을 펼쳤다. 북미는 기독교가 강한 곳이고 남미는 가톨릭이 강한 곳이기에 두 곳을 통합하는 것이 과제였다. 문선명은 이 임무를 일본의 여성 신도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 노력의 결과 1997년 4월 13일에 제1회 축복식을 거행하여 현지에서 116쌍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축복식의 엄숙함과 신성함에 깊은 감동을 받아 눈물이 그칠 줄 몰랐으며 사람들은 먼 타국에서 온 여성들의 위대한 힘에 감복했다. 가톨릭이 강한 남미에서 이러한 결과는 엄청난 고행의 열매였다. 가난한 나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사법을 보급하고, 식량과 깨끗한 물을 얻도록 해주고, 더 나은 주거지에서 살도록 해주고,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은 종교와 문화, 학식, 인종을 떠나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기본 도리라고 문선명은 강조했다.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또 남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여성들도 동참할 수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여성의 활동이 더 눈부시다. 그것은 여성에게 사랑과 헌신의 모성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일본 여성 신도들은 온갖 고난을 이겨내면서 인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헌신한 것이다. ● 미국 : 세계화의 거점이 되다 1.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1971년 문선명은 51세의 나이로 전국 순회 집회를 했다. 그때 일본 도쿄호텔에서 국제승공연합 주최로 한일 교수세미나가 열렸는데 문선명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입국을 거부당했다. 사실 문선명은 철저한 반공산주의자인데도 공산주의로 오해를 받아 그 이후 성화(별세)할 때까지 일본에 입국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이때부터 미국을 비롯한 세계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미국에 체류 중에 캐나다로 잠깐 건너가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공식'으로 설교를 했고 12월 18일에는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리틀엔젤스 공연이 열려 미국인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희생'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해서 미국인들의 마음에 신앙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 전에 일착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김영운 선교사는 고난 중에서도 고난의 나날을 보냈다. 선교비가 없었고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1월 4일 미국에 도착해 오리건대학교에 연구생으로 취학했다. 학업을 하면서 온갖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는데 그때 나이가 44세(1915년 생) 즈음이었다. 전도는 토요일, 일요일에만 할 수 있었고 기독교 잡지에 원리를 소개하는 글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소모임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한 끝에 도리스 월더, 폴린 필립, 아일린 월치 부부, 패티와 게일린 펌프리, 조지 노튼 등을 신도로 입교시켰다. 김상철 선교사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침례교신학교 신학생 자격으로 도미해 1972년까지 미국 서부 7개 주를 맡았다. 신분이 노출돼 퇴학당할 처지가 되자 자퇴를 하고 미국에 남아 선교를 계속했다. 1961년 2월 25일에는 박보희가 세 번째 선교사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주미대사관 무관보좌관으로 공적 업무를 처리하면서 통일교 전도에 노력했다(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한국전에 참전했으며 통역장교를 지냈다. 소령으로 예편 후 평생을 통일교에 헌신했고 리틀엔젤스가 소속된 한국문화재단을 이끌고 있다). 김상철은 서부, 김영운과 박보희는 동부를 맡았다. 이로써 1960년 전후로 3인의 개척 선교사가 미국에서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리고 1970년대 초 드디어 문선명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0년대의 세계는 지금과 달리 그렇게 평화롭지 못했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덩어리에도 아픔과 분열은 쉼없이 계속되었지만 세계는 더 큰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문선명이 세계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곳은 미국이었다.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세 차례에 걸쳐 세계 순회를 했다. 1965년, 문선명은 첫 번째 세계 순회 길에 올랐다. 가방에는 한국의 흙과 돌을 가득 담았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국의 흙과 돌을 각 나라에 심고자 했다. 이는 한국을 세계에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세계 120곳에 성지를 정했다. 10달 동안 40개국을 순회했으며 두 번째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해 신도들과 만난 후 곧바로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순회했다. 6월 25일, 펜실베이니아 게티스버그에 이르렀고 은퇴 후 그곳에 살고 있는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전 대통령을 만났다. 문선명은 그에게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강력한 반공운동의 필요성, 도덕적 붕괴를 막는 일, 생명력 있게 활동하는 종교의 필요성이었다. 세계는 지금 반공운동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도덕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만약 누군가가 젊은이들에게 강한 신념을 주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하며, 그들을 훈련시켜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한다면, 공산주의를 패퇴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젠하워는 진심으로 문선명의 말에 동의했다. 5분으로 예정된 방문은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굳은 악수를 나눈 후 두 사람은 서로의 건승을 빌며 헤어졌다. 1973년 여름, 미국은 베트남전에 항의하는 시위와 소요 사태로 들끓었다. 닉슨(Richard Nixon)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정치적 생명이 몹시 위태로운 때였다. 만약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다면 공산주의 정권의 참담한 만행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닉슨은 미국인 모두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 중에 첫 번째로 꼽혔다. 워터케이트 사건은 매일 TV와 신문을 장식했으며 미국을 분열시켰다. 1973년 10월 「타임」은 '닉슨 대통령은 사임해야'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미국 국민 대다수가 동의했다. 문선명은 만약 닉슨 물러나면 베트남은 공산주의에 멸망할 것이며 뒤이어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 염려스러웠다. 그때 21개 도시를 순회하는 '희망의 날' 강연을 시작했는데 뉴욕, 볼티모어, 필리델피아, 보스턴, 워싱턴DC에서 강연을 마쳤다. 5개 도시 강연 후 뉴올리언스, 댈러스에 갔고, 이어 남동부의 플로리다로 돌아왔다. 강연장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어떤 도시에서는 시장에 의해 소개 받고, 기념 열쇠도 받았다. 이는 미국인들이 환영의 뜻을 표하는 전통이었다. 아홉 번째 도시인 애틀랜타에서 강연을 마친 후 미국 전역에 들끓는 위기감을 절감했다. 문선명은 2주 동안 순회강연을 연기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산에 올라 홀로 기도를 했다. 그런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73년 11월 30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해 각 주의 50여 신문에 전면 광고를 냈다. 닉슨 대통령 사진과 함께 '문선명 목사의 성명서:미국의 위기, 워터게이트에 대한 해답-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였다. 시민들은 이 광고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심지어 신도들 역시 왜 치명적 오점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전면 광고에서 문선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이 16살 때부터 끊임없이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수없이 많은 오묘한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1월 1일, 하나님은 또 다시 나의 기도 중에 현현하시어 미국에 건너가 미국 사람들에게 소망과 통일을 명제로 외치라는 엄숙한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문선명은 미국인들에게 워터게이트 사건을 하나님의 뜻, 보다 큰 선을 위해 품어줄 것을 호소했다.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고 호소한 것이다. 한 달 후인 12월 21일, 하원의원 가이 반더 자그트(Guy Vander Jagt)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여 문선명의 성명서를 하원에 제출했다. "통일교회 창시자 문선명 목사의 메시아는 미국에 감동적으로 양심에 호소한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특히 정치적 긴장감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는 지금 너무나 적절하다. 나는 기쁘게 그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원에 있는 동료들의 관심을 촉구한다." 광고를 내보낸 후 문선명은 중단된 21개 도시 순회강연을 다시 시작했다. 해외에서 온 선교사들로 구성된 4개의 세계통일십자군(IOWC)은 문선명을 도왔다. 1974년 1월 31일, 7개의 IOWC를 만들어 32개 도시 '희망의 날'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날 저녁, 약 150여 명의 신도들이 백악관 길 건너편에 있는 라파예(Lafayette) 공원에 모여 대통령을 위한 기도 집회를 가졌다. 촛불을 들고 성가를 부를 때 뜻밖의 손님이 나타났다. 바로 닉슨이 온 것이다. 그는 몇 명의 경호원만 데리고 백악관 밖으로 나와 통일교 신도들과 악수를 나누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문선명은 다음 날 닉슨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으로 갔다. 새벽 5시, 자동차로 백악관을 7바퀴 돌며 기도를 올렸다. 문선명은 그가 대통령 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닉슨은 통일교 집회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문선명에게 약간의 호기심도 있었다. 문선명은 만약 그가 사임하면 미국은 베트남으로 패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남아시아에서 무고한 수백만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런 다음 아주 직선적으로,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을 믿고 의존해야 하며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닉슨 대통령! 당신은 국민들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미국 국민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당신의 진의를 알고 감동 받으면 모든 과거를 용서하고 열광적으로 지지할 것입니다." 그의 반응은 차분했다. 하지만 이내 "그 제안을 고려해 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1시간여의 대화를 마치고 문선명은 백악관을 떠났다. 그러나 닉슨은 6개월 후인 1974년 8월 8일,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베트남에서 철군했다. 1975년 3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북베트남 공산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숙청과 대량학살이 이어졌고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탈출했으며 보트피플들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바다로 갔다.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Pol Pot ) 공산정권이 2백~3백만 명을 학살했다. 문선명이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화된 것이다. 죄 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의 기도를 올렸으나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