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관한 루터와 에크의 논쟁
교황 레오 10세(Leo, Ⅹ, 1513-1521 A.D.)는 前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Ⅱ, 1503-1513 A.D.)가 착공하여 미완성인 채로 남겨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기금 조성을 위해, 이미 1506년부터 발매되고 있던 소위 “면죄부”(Indulgentia) 판매를 더 널리 대대적으로 확산 촉진시키기로 했다.
독일 내에서 “면죄부” 판매권을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도미니쿠스 탁발 승려인 웅변가 테첼(The Dominican monk, Johann Tetzel, 1465-1519 A.D.)은:
지금 맬수도, 풀수도 있는 권세를 받은 교회가 천당과 지옥의 문을 열어놓았다. 이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곧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 이 표를 사면, 그 은화가 돈 궤에 쨍그랑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함께 즉시 천당에 올라갈 것이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A.D.)는 독일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게시판으로 사용되었던 성당 대문짝에다 라틴어로 아래와 같이 “면죄부”의 효력을 밝히기 위한 토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하여, 나는 다음 항에 관해 토론하기를 요청한다. 여기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은 서면으로 논해주기를 바란다.
이런 서두로 시작된 95개 항목에 달하는 공개 토론 요구서는 루터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면죄부 판매 수익금이 갑자가 현저하게 떨어지자 이에 화가 치밀어 오른 테첼은 즉각 항의했고, 교황청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테첼보다 더 만만찮은 적수는 잉골스타트(Ingolstadt) 대학 신학교수 에크(Johann Maier von Eck, 1486-1543 A.D.)였다. 그는 “오벨리스키”(Obelisci-방첨탑-인쇄 부표로 단검-†)라는 주제로 한 반박문을 통해:
교회의 모든 관습은 교황의 권위와 동일하며, 그 관습에 관한 어떠한 질의도 이단이다.
라고 도전했다. 루터는 우선 텟첼의 항의에 대해서는 1518년 3월에 “속죄와 은혜”(Indulgence and Grace)라는 주제의 설교로 답했고, 에크가 보낸 논박서에 대해서는 “아스테리스키”(Asterisci-작은 별들-인쇄에 부표로 사용되는 ‘별표’-*)라는 주제의 저술을 통해 반증했다.
1518년 6월에 교황 레오Ⅹ는 루터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장을 보내는 동시에 도미니크 교단의 프리에리오(Silvestro Mazzolini von Prierio)에게 루터의 저술들을 검열해서 의견서를 내라고 명했다. 교황의 소환장에 프리에리오의 의견서가 첨부된 것이 그해 8월에 루터에게 전달됐다. 그 내용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로마교회는 추기경단(the college of Cardinals)을 대표하는 교회이며, 더 나아가서는 교황을 至上으로 여기는 교회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로마교회가 집행하고 있는 존중한 이 속죄권(regarding indulgences)을 부정하는 자는 이단이다.
1518년에 에크의 반박서에 나타난 논쟁점에 대해, 루터의 뷔텐베르크 대학 동료인 칼 슈타트(Kalstadt, 1480-1541 A.D.)가
온 교회의 권위보다 성서 말씀이 더 중요하다.
라고 공박했다. 에크가 이에 대하여 공개 변론을 요구하자 칼 슈타트가 응했다. 이에 루터도 자연히 휩쓸렸다. 그리하여 1519년 6월 27일부터 라이프치히에서 18일간이나 계속되는 대 공개 변론이 전개됐다. 처음 5일간은 칼 슈타트가 에크와 대쟁변했고, 6일째부터 루터가 나섰다. 주 논제들은 성만찬, 고해성사, 면죄부, 교권 등등이었다. 여기에 에크와 루터가 펼친 교회 권위와 성경 권위의 우월성에 대한 불꽃튀긴 논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루터: 로마교회의 권위란 역사에나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에크: 로마교회의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루터: 아니다. 교황 그레고리Ⅶ의 정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에크: 루터의 논설은 교황의 신성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루터: 교황이라고 반드시 신성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황은 없어도 신앙은 성립한다. 그리시아 교회는 현재 이를 실증하고 있지 않은가!
에크: 그리시아 교회는 이단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대공의회는 언제나 이것을 이단으로 의결해 왔다. 대공의회는 교권이며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후쓰를 비롯하여 모두 처형되지 않았는가! 루터여, 그대의 운명도 역시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루터: 종교 대공의회라고 해서 반드시 오류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후쓰의 의견이 전혀 오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후쓰의 신조 속에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참됨이 있었다. 요는 우리들이 신앙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는 오직 성경뿐이다.
에크: 교회는 성경과 상관없이 그 자체의 권위로 안식일 준수를 일요일로 변경시켰다. 이 사실은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가 우월함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루터: 아니다. 아니다....
에크: 성경은 교훈하기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하셨다. 그렇지만 교회는 그 자신의 권위로써 그 안식일을 성경과는 상관없이 주의 첫날로 바꾸었다. 그리스도는 산상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첫 총회 기간의 사도교회는 아직까지도 율법의 정지에 관해서는 거리낌이 없이 대담하게 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사도시대의 총회에서도, 성경은 선포하기를 ... 너는 피흘림을 삼가라 그리고 살인하지 말라고 분명히 규정하여 명시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 자신의 권위로서 이를 변경해서 피도 흘리고 교살도 했다. 이 사실은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음을 나타내보이는 것이다. 아니케투스 1세가 유월절을 주의 날에 축제하도록 명령했다. 처음에 피우스가 이를 다졌고, 최후에 빅토르가 완성하여 모든 교황들이 이를 지지했다. 안식일은 하나님에 의해 여러번 명령되었다. 그리고 복음서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에서도 안식일이 끝났다고 선포되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경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권위로 사도들을 통하여 주의 날을 설정했던 것이다.
에크는 라이프치히 논쟁 직후 자신의 승리를 교황청에 보고하면서 루터를 이단자로 파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1520년 6월 15일 발행된 파문장은 그해 12월에 교황 사절단에 의해 루터에게 전달됐다. 12월 10일에 루터는 그 파문장과 교회법전을 교수들과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에 소각하면서 로마교회에서 떠날 것과 종교개혁을 단행할 것을 선포했다.
E. G. White 은:
이와같이 택함을 입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큰 빛을 주사 여러 가지 로마의 오류를 깨닫게 하였으나, 그러나 저들이 세상에 드러낼 빛을 전부 다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로마교의 암흑에서 인도하여 내시되 저들은 여러 가지 큰 장애를 받아야 할 것이었으므로 저들이 감당할 만한 정도대로 한 계단씩 인도하여 내신 것이다. 저들은 저들의 빛을 한꺼번에 받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마치 정오에 햇빛과 같은 그러한 눈부신 밝은 빛을 오랜 암흑 가운데 있던 자가 단번에 받을 것 같으면 반드시 그 몸을 돌이키게 될 것이다.
종교개혁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이 루터의 시대에 마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땅히 세상 역사의 종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추신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함으로써 큰 일을 하였으나, 그러나 그는 장차 이 세상에 비추어야 할 빛을 전부 다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동안에 새 빛은 계속적으로 성경에서 나왔고 새 진리는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루터는 여러 해를 지난 후 자신이 이룩한 업적들을 뒤돌아 보며 회고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되 돌격해 오는 대적을 보지 못하도록 눈가림을 당한 준마와 같이 나를 인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