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킨 선교사는 1892년 11월에 서울에 도착하였고 드루 의료선교사는 1893년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 그리고 풍토적응을 위해 서대문에서 1년 동안 거주하였다.1894년에는 농민혁명(동학혁명)으로 말미암아 서울에 체재하였다. 1895년 봄 그들은 드디어 군산에 도착하여 수덕산 중턱에 농가 2채를 구입하였다. 당시 군산은 작은 어촌으로 해망동 일대에 70여 가호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열고 진료소를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군산을 개항장으로 지정하고 현재 구시가지로 불리는 해망동, 영화동, 장미동, 영동, 중동, 중앙로 1가 지역 대략 17만 3천평의 땅을 다 조차하자 그들은 선교본부를 임피면 구암리 일명 궁멀(궁말)로 불리는 곳으로 이전하였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의 도착지점을 알리는 도로변에 있는 표지판. 그들은 공식적으로 군산에 발을 디딘 최초의 서양인이다.
군산시가 그들의 도착을 기념하여 세운 표지석이다.
전킨.드루 선교사 도착지점 바로 건너편에 있는 1908년에 세워진 세관 건물이다.
세관 뒤에 있는 1908년에 세워진 세관부속 건물인 창고! 내부만 개조하여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살거리가 선을 보이고 있다.
세관 창고 앞을 지나 좌측 앞으로 나오면 수덕산 올라가는 길이 도로 건너 편에서 보인다.
수덕산은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월명산의 끝자락이 아니고 독립된 작은 야산이다. 지금은 신흥교회 뒷산이라고 하면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표지판이 신흥교회 주차장 옆에 서있다. 그러나 출구가 신흥교회 주차장 쪽과 교회 정문 양쪽에 있다. 정문 쪽에서 올라가면 좌측으로 수덕산 대명사가 보인다.
오솔길로 올라가며 미국의 문명과 문화를 떠나 작은 나라로 들어온 선교사들의 마음, 생각을 생각한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가 조사 정원택을 통하여 구입한 호남의 첫 선교지 터이다. 이 교회를 군산교회 또는 군창교회라고 불렀다.
표지석으로도 감격이다. 장차에 농가 두 채가 복원되길 기대해 본다.
군산 성지 순례길 표지판! 지성스럽다. 많은 분들이 순례를 통하여 산티아고처럼 몸과 마음이 치유되길 기대해본다.
전킨 순례길과 만자산 옛길이 자세하게 나와있다.
이 길은 1900년대 초기 이 길들은 장꾼들, 보부상들의 길이었다. 복음은 장꾼들의 도로를 타고 퍼져갔다.
만자산은 지금의 대야를 말한다.
1899년 군산교회가 궁멀로 이사 갈 때 교인들의 일부는 군산에 남아 개복교회를 만들었고 일부는 궁멀로 따라 갔다. 당시 궁멀에는 전킨, 드루 선교사와 장인택 조사가 열심히 전도하여 모이고 있는 구암교회가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도보, 조랑말과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였다. 만경강과 금강을 따라서 배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이는 모든 포구에 교회가 세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사랑의 길이었다. 가는 곳마다 양반들의 냉대와 배척, 빈대와 벼룩과 이가 반겨주었다.
고군산열도도 그들의 복음전파에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나 지옥이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랑의 사람이었다. 두루 선교사는 안식년을 떠나고 못돌아왔지만 전킨 선교사는 1904년에 전주 선교부로 발령 받아 떠났으나 1908년 1월 2일 과로와 폐렴으로 소천하였다.
영명학교, 지금의 제일중고등학교,
멜볼딘학교, 지금의 영광여자중고등학교는 전킨 선교사 부부에 의해 세워졌다.
현 개복동교회와 구암교회, 지경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이 그에 의해 세워졌다.
2024년 5월14일 유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