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선족’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 때문에 말들이 많다. 지난 추석 때 서울 독산동 고모댁에서 논란이 되었던 영화 중 하나를 가지고 얘기를 나눴다. 그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 동네가 바로 고모댁에서 차로 10분도 채 안 걸리는 지역 시장이었다. 시장 상권을 둘러싸고 조선족 조폭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게 영화의 줄거리다. 얼마전 그 영화를 봤다는 고모부는 익숙한 동네가 나와서 놀랐다는 말과 함께,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조선족 이웃들 때문에 걱정이 많다는 푸념을 털어놨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TV 드라마에는 전라도 출신 등장인물이 깡패 내지는 사기꾼 배역을 거의 휩쓸듯 도맡았다. 어렸을 때 드라마를 즐겨 봤던 나 역시도 그런 기미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나와 익숙한 말투의 아저씨들은 늘 어쩐지 자세도 불량하고 직업도 불분명했다. 아마 내가 다른 지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면, 전라도 혹은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시나브로 쌓였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티는 안 내더라도 마음속 깊숙이 그런 이미지가 내재된 채로 말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조선족 역시 그런 이미지로 비치지 않을까.
조선족 또는 연변, 만주 일대에 대한 편견은 그렇게 얼마든지 여러 사람들에게 특정 이미지로 각인될 수 있다. 날씨도 춥다고 하고, 뭔가 거친 토양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그런 곳에서 건너 온 사람들은 왠지 외모도 투박하고 말씨나 행동거지도 사나워 보여서 언젠가 우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정체불명의 공포감이 싹틀 수 있다. 지하철이나 식당에서 만나면 나도 모르게 적대감이 새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혼불> 8권에는 유난히 전현직 깡패들의 고향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우선 백제 이야기가 구구절절 길기도 하다. 갑작스런 역사 공부에 줄줄이 암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전라도 학교에서 전라도 선생님이 전라도 학생들에게 전해 주는 전라도 역사 이야기. 어쩌면 역사는 그렇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수업 내용이 객관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일단 강의에 매서운 서릿발이 깃들어 있지 않은가.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보다는 그 눈빛을 보고 뭔가를 배우지 않았을까.
전라도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나는 매년 5월 18일만 되면 모든 과목 선생님들이 돌연 역사 선생님으로 둔갑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시위대에 합류하겠다고 교문을 나서려는 제자들을 만류하다가 결국 문을 열어 줄 수 밖에 없었다는 선생님의 떨리는 음성. 그리고 몇몇은 학교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을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던 선생님의 흔들리는 눈빛. 그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 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그렇게 선생님들의 떨리는 음성과 흔들리는 눈빛을 통해 배웠다.
작중 심진학 선생은, 백제 역사를 줄기차게 훑다가 갑자기 학생들의 관심을 북녘 만주 땅으로 돌려놓는다. 그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149쪽)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 모른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신랄하게 비판한 심진학 선생은 우리 민족에게도 저 중국의 대륙을 깊숙이 누비던 웅혼한 역사가 있었다고 상기시킨다.
“제 밥그릇에 밥 한 주걱 더 얹는 것이 급해서 밥상을 통째로 내주고 만 통일. 그것이 소위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것 아닐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들의 문자마따나 통일을 했다. 그러나 애당초 당나라 대군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힘에 겨워 고구려의 영토의 대부분인 원산만, 대동강구 이북은 포기하고 말았으니, 우리의 민족사상 천추 만대의 한이 아닐 수 없다. 그 ‘통일’을 한 뒤로부터 우리 민족은 저 중국의 대륙을 깊숙이 누비던 웅혼함을 잃고, 한반도에 국한된 소국으로 전락되어, 천삼백여 년이나 대국의 세력 앞에 무릎을 조아리며 사대주의로 연명해 온, 비운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당나라를 이 땅에 끌어들인 책임을, 이제 와 물어도 아무 소용없지마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힘이 모자라면 그만두고, 힘없으면 제 힘을 스스로 길러야지, 국토를 지키고 넓히는데 정당한 힘이 아닌, 남의 나라 힘을 편법으로 빌리어 등에 업고, 한 푼 어치 눈앞의 이익이나 좀 남기고 만, 역사 속의 처남 매부. 그러나 이긴 자는 끝없이 미화될 뿐이다.” (147-148쪽)
이제 훗날 제군들이 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 보면, 나의 말이 실감나리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만주 벌판에, 여기서도 저기서도 우리나라 초가지붕 앞냇물 뒷동산에 안기어서 달큰한 흙냄새 맡으며, 외갓집 큰집 안마당같이 낯익은 토질에다 고추 참깨 해바라기 오이 가지 기르는 풍경을 실제로 보면,
“여기는 확실히 우리 땅이었다.”
는 것을 뼈가 저리게 절감할 것이다. (149쪽)
강모가 회상하는 심진학 선생의 역사 수업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리창 바깥에 누런 아지랑이가 부옇게 드리워진 사월의 낮은 봄 하늘을 내다보며' 심진학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것은 황사다. 저 황사는 중국의 대륙 북부나 몽고 만주 황토가, 봄이면 이만 때쯤, 바람을 타고 온 하늘에 가득 끼여 노란 모래 흙먼지로, 여기 우리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까지 누렇게 밀려오는 것이다. 겨우내 얼어붙어 잠자던 바람이 흙을 깨워 데불고 날면 이토록 수만 리를 머다 않고 뒤덮으며 흔드는 것이다. 저것을 그저 봄바람 한때라고 생각해 버리면 일과성으로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이 먼지 하나가 중국의 몽고 만주 어느 산맥과 들판에서 홀연 바람에 말려 떠오른 끝에,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대동강 건너, 한강을 건너고 금강을 건너서, 이역 만리 타국땅 조선의 산천 초목을 온몸으로 쓸면서, 지금 이 남방의 전라도 하늘을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몸소 느끼어 보라. 아마 이 바람과 먼지가 무심히 스치면서 내 몸에 끼치는 감촉이 완연 다를 것이다.”
국경을 넘어온 바람
제 나라 땅을 떠나 남의 나라 땅으로 날아가는 흙.
유리(流離)
나는 왜 그런지 봄이 와서 목련꽃 피고 황사 아득히 흩날리는 사월이 되면, 회색으로 내려앉은 하늘의 먼 자락에 누런 먼지바람 회오리치며 몰려오는 이 풍경이 사무쳐 피가 설레곤 한다.
내 아직 가 본 일도 없는, 이야기 속의 중국과 몽고 만주가 육화 체감되어, 내 살에 실제로 파고드는 전율을 소스라치게 느끼는 것이다. 그때 나를 떨게 하는 것은 연결감이다. 내가 바둑알처럼 따그락, 따그락, 따로 떨어져 뒹굴면서, 흑이냐 백이냐로 명확하게 갈라져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경계를 넘나들며 섞이는 황홀감을 나는 맛보는 것이다.
내가 비록 이곳에 있지만 분명 저곳과 이어져 있구나 하는 실감.
보이지 않는 진맥의 실낱이 떨리면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그 존재의 밀의(密意)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기야 7권에서 강호가 숙항인 기채와 기표에게 강모, 강태 지내는 만주 봉천 서탑거리 풍경을 왜 그다지도 세세하게 들려 주었는지 궁금하긴 했다. 뭔가 그곳 동네 골목 구석구석까지, 거기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세시풍습과 일상 문화 하나하나까지 모두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간곡히 알려 주려는 듯이 말이다. 강호에게서 아들 강모의 소식을 전해 들은 기채는, 처음에는 "이 애들이 왜 갔단 말인가.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하러"(204쪽) 하면서 무겁게 눈을 내리 감는다. 그러다, 그곳이 '선조의 그리운 옛 강토, 전주 이씨 선조의 아득한 숨결이 일구어 낸 땅'이라는 것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기는 되어, 강모가 그 품에 든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205쪽)고 여긴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한창 TV 드라마에 동향 아저씨들의 기상천외한 비행이 쏟아져도, 내가 나고 자란 땅에 대한 편견이나 곡해는 쌓이지 않았다. 그리고 <혼불>을 읽은 것 때문인지, 제아무리 요즘 미디어가 조선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부각시켜도 좀처럼 저 압록강, 두만강 너머의 땅이나 그곳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가 보거나 그러지 못 하거나 '내가 비록 이곳에 있지만 분명 저곳과 이어져 있구나 하는 실감'을 품고 하루하루 살았으면 한다.
그런 한편, <혼불>은 아직 8권. 아직 두 권이 더 남아 있다. 심진학 선생의 팽팽하게 당겨진 진맥의 실낱과 대비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만주 한복판에 서 있는 강모는 정작 그리운 옛 강토에 가 있으나 여전히 가녀리고 파리하게 흔들린다. 강모는 심진학 선생의 역사 강의를 회상하면서, 자신의 누추하고 비루한 처지를 속쓰리게 절감한다. 드높은 이상과 남다른 기상에 심취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자유다. 하지만 그것을 자기 생으로 잡아당겨서 살이 되고 피가 되게 하는 그런 육화는 모두에게 허락되지는 않는 것 같다. 몸이 준비되지 않으면, 4월의 바람이 제아무리 거세게 불어온들 그것을 한 움큼이라도 제 몸에 품을 수 있을까. 그래서 <혼불>은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듯하다.
첫댓글 아, 벌써 두 권밖에 안 남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