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보살이 최초로 “염”이 곧 “칭”임을 알리다
정토종의 전승조사들이 본원문의 “내지 십념”의 “염”을 “칭념”으로 해석한 것은 용수보살의 “이행품”에서 비롯되었다.
“내지 십념”을 어떤 사람은 관상觀想이나 관상觀像 또는 실상實相의 염, 내지는 『아함경』의 십종 념으로 해석하거나 『미륵보살왕생경』의 십종 자비의 념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이런 해석들은 사실 아미타부처님의 제18원과는 서로 조금도 관계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고, 오직 “칭념”으로 해석해야만 정확합니다. “칭념”으로 해석한 것은 선도대사님의 5부9권 곳곳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석도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선도대사님 개인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전승이 있는 것입니다. 선도대사는 도작대사로부터 전승 받았고, 도작대사는 담란대사로부터 전승 받았고, 담란대사는 천친보살로부터 전승 받았으며, 동시에 용수보살로부터 전승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 법맥전승의 조사님들 가운데 제18원의 “내지 십념”의 “염”을 “칭념”으로 해석한 것은 용수보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은 『이행품』의 핵심인 본원문에 아주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은 이와 같다: 만약 사람이 나를 염하여 칭명하며 스스로 귀명한다면 즉시 필정에 들어가리라” 이 본원문은 분명히 제18원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19원은 “보리심을 발하고 여러 가지 공덕을 닦는 것”이고, 제20원은 “나의 명호를 듣고 나의 나라를 생각하며 온갖 공덕의 근본을 심는 것”이지만, 제18원에서는 단지 “내지 십념”만을 말하고 다른 것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불법은 설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이해할 수 없다”, 자고로 각종각파의 고승대덕들께서 경전에 대해 평어와 주해를 달아주셨지요. 우리 범부들이 직접 경전을 봐서는 당연히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고승대덕들의 평어와 주해를 봐야만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승대덕들의 평어와 주해 가운데 우리가 선택한 것은 선도대사님 계열의 해석입니다. 용수보살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본의를 이해할 수 있었지요. 선도대사께서 해석하신 “중생이 칭념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경전을 봐서는 이해할 수가 없고, 또 그렇게 많은 고승대덕들의 해석도 각자 다를 뿐더러 심지어 매우 큰 차이가 있는데, 그럼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우리는 선도대사님의 이 법맥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 용수보살님의 해석을 믿는다는 것이지요.
용수보살은 “제2의 석가”라고 불리었고, 중국 불교 8대종파의 공조共祖로서, 그 당시에는 그 어떤 수행자도 용수보살과 견줄 수가 없었습니다.
명호 속에 모든 공덕을 구족하고 포함한다
규기대사窺基大師의 『서방요결西方要訣』에서 말씀하시길 “제불의 원행으로 이 과명을 성취하신 것이니,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모든 공덕을 구족하고 포함하게 되는 까닭에 큰 선이 되어 왕생을 버리지 않는다(諸佛願行,成此果名,但能念號,具包衆德,故成大善,不廢往生)”고 하셨다.
규기대사는 당나라 때 아주 유명한 현장대사님의 수제자이자 유식종唯識宗(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부름)의 조사이기도 합니다. 대사님이 쓰신 『서방요결』의 전체 이름은 『서방요결석의통규西方要訣釋疑通規』인데, 『대정장』 제47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중생들에게 극락세계로 왕생하라고 권도하고 있고, 아울러 염불왕생과 관련된 일부 문제들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여섯 구절 24글자는 매우 간단하지만 힘이 넘칩니다.
“제불의 원행”, 시방삼세의 갠지스 강 모래알 수와 같이 많은 제불들께서는 당신들의 인지의 원과 닦으신 육도만행으로써 당신들의 명호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한 분 한 분의 부처님마다 모두 이러하여 원행이 원만해야만 성불할 수가 있지요. 그렇다면 그분들의 원행에는 어떤 속뜻이 있을까요? 당연히 원행의 의의에 의거하여 그분들이 성불할 때의 명호를 정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제불의 원행으로 과명果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모든 공덕을 구족하고 포함한다”, 이 부처님의 명호를 칭념하기만 하면 이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원만히 포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큰 선이 되어 왕생을 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큰 선근・많은 선근, 큰 복덕・많은 복덕을 갖추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왕생하고 장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규기대사님은 여기서 요 몇 구절을 가지고 『아미타경』에서 설한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를 해석하신 것입니다. 무엇이 많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일까요? 바로 “집지명호”입니다. 규기대사님은 문답을 통해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우선 규기대사님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부처님의 명호만 부른다면, 명호는 한 마디에 불과해서 아무리 전념하고 아무리 집지를 해도 한 마디밖에 안 되어 많지 않기 때문에, 큰 선이 될 수 없고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이 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규기대사께서 해석하시길, 여기서 말하는 염불은 “원만한 수행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이어서 이 한 구절 “제불의 원행으로 이 과명을 성취하신 것이다”라고 하셨지요. 왜냐하면 비록 한 구절 명호이지만 이 명호는 부처님께서 인지에서 발한 크신 서원과 닦으신 제행諸行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이 부처님의 여러 가지 공덕을 원만히 구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큰 선이지 작은 선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용수보살님의 해석도 이와 같습니다. “나를 염하여 칭명하며 스스로 귀명한다면”에는 이런 “모든 공덕을 포함하는 까닭에 큰 선이 되어 왕생을 버리지 않는” 기능이 갖춰져 있습니다.
보배구슬・보배자루・금융카드의 비유
따라서 부처님의 명호는 부처님 공덕의 결정체이자 부처님 공덕의 총체로서, 부처님께서 인지에서 닦은 모든 공덕을 원만히 구족하여 조금도 누락되거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니보주와 같아서, 비록 자그마한 한 알에 불과하지만 이 구슬에는 온갖 보물・온갖 물질들을 생성해낼 수 있는 기능과 작용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뭐든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마니보주는 그것을 토해낼 수 있지요. 또 마치 보물을 가득 담은 큰 자루와도 같아서, 이 자루만 있으면 모든 보물들이 다 있습니다.
또 마치 한 장의 슈퍼급 금융카드와 같아서, 은행의 모든 재산이 들어있는 이 금융카드만 있으면 이 작은 카드 한 장이 은행에 있는 모든 돈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부처님 명호의 공덕이 광대하고, 동시에 부처님의 명호에 불가사의한 힘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염불공덕 역시 불가사의하게 광대하여, 일생동안 십악・오역・정법비방의 죄를 짓고 임종할 때 지옥의 불길이 발밑까지 타올라 금방이라도 지옥에 떨어질 중생이 한 번만 부처님 명호를 불러도 불꽃이 연꽃으로 변하게 됩니다. 만약 이 명호 속에 공덕이 없고 불가사의한 위신력이 없다면, 어떻게 지옥의 불길을 끌 수 있고, 어떻게 지옥을 벗어나고 나아가 삼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비록 흰 종이에 검은 글자로 된 부처님 명호이고, 단지 하나의 소리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여섯 글자가 아니고, 이 소리도 평범한 소리가 아닙니다. 이속에는 부처님의 공덕을 내포하고 있어서, 이 소리 즉 부처님의 명호는 부처님 자신의 공덕과 자체의 기능, 나아가 부처님의 본체와 한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