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와 내 삶의 천일야화
“7월 21일 금요일 모임의 애피타이저(‘울산 부모교육협동조합’ [물음표와 느낌표] 독서동아리 모임)”
말린 고사리 한 뭉치
무게를 누군가 묻는다면
하여튼 묻는다면
내 봄날을 살아낸 보람 정도라
답으로 준비한다
곰곰이 생각하여도
그러하였으니까
말린 고사리 두어 뭉치 더 담아서
이름난 백화점 봉지에 넣어서
사랑스런 분에게 주었다 치자
또 받았다 치자
잘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며 그 무게가 궁금은 하겠지만
우리들이 한 해 살아온 보람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그렇구 말구
말린 고사리
-정석남, 〈뺨에 서쪽을 빛내다〉,‘말린 고사리’, 창비
말린 고사리 한 뭉치, 누군가에겐 하잘것없이 가벼운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을 뚫고 나온 봄의 소식이며 빛의 시간을 온전히 견뎌낸 보람이 아니던가. 그렇게 내게로 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된 말린 고사리 한 뭉치. 가슴이 뭉클했다.
》》》 『숲속 책방 천일야화』 중에서 발췌
노미정 선생님이 주관하는 ‘울산 부모교육협동조합’ [물음표와 느낌표] 독서동아리 7월의 책 『숲속 책방 천일야화』를 읽는 중에 말린 고사리에 대한 시를 읽고 여러 가지 미묘한 감정과 기억들이 올라왔다. 그 첫 번째 감정은 올해 1월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국산 말린 고사리를 잔뜩 주문하셨고, 일부는 삶아 두셨다. 결국, 드시지 못한 말린 고사리와 삶은 고사리가 아직 냉장고에 있다.
두 번째 기억은 2013년 무렵 대구 농수산물 도매시장인 매천시장이다. 고사리를 비롯한 다양한 나물을 도매하는 집에서 1년 정도 일했는데, 새벽 4시 출근하자마자 중국산 말린 고사리를 매일 삶았다. 나물 집에 일하면서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국산 고사리인 줄 처음 알게 되었다.
세 번째 기억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신경과 전문의인 올리버 색스의 책 『오악사카 저널』에서 읽은 양치식물인 고사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양치식물인 고사리는 고생대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의 영웅(?)에서 지금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석탄은 기본적으로 양치류처럼 원시적인 식물들이 커다란 압력에 눌려 만들어진 것이다. 양치류는 이렇다 할 변화 없이 10억 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을 살아남았다. 공룡 같은 다른 생물들은 지상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겉으로는 아주 연약해 보이는 양치류인 고사릿과는 지금까지 지구가 겪은 모든 멸종 사건과 그 밖의 흥망성쇠를 이기고 살아남았다. 내게는 선사시대라는 세계에 대한 감각, 엄청나게 먼 과거까지 이어지는 시간 감각이 고사리라는 연약해 보이는 식물에 의해 상기되곤 한다. ‘종속과목강문계’ 학창시절 한 번쯤은 외우곤 했던 생물 분류 단계를 제안한 스웨덴의 박물학자 겸 식물학자의 칼 폰 린네는 18세기에 양치류가 어떻게 번식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 비밀스러운 수수께끼를 표현하기 위해 ‘은화식물(隱花植物)’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고사리처럼 이파리에 포자가 달리는 양치류는, 꽃이 피지 않는 대신에 포자를 이용하여 번식하는 식물들로 고지식(?)하게 아직도 고생대의 번식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꽃이 피지 않았던 고생대에는 곤충들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포자는 오로지 바람과 물의 힘으로 퍼져나갔다.
『숲속 책방 천일야화』를 읽으며, 내 삶의 천일야화가 떠올랐다. 책에 소개된 ‘말린 고사리’란 시를 읽으며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려졌고,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삶았던 고사리가 떠올랐고, 양치식물을 사랑한 올리버 색슨의 이야기가 되새김질 되었다. 2020년 2월 9일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 장편 영화상을 받으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수상 소감을 말했다. 어머니랑 함께 시상식을 시청하며 우리나라가 참 대단한 나라라고 이야기한 기억이 떠오른다. 『숲속 책방 천일야화』 이 책의 작가인 책방지기 백창화 님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며 내 삶의 천일야화가 개인적이지만, 또한 창의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고사리처럼, 내 삶의 포자들이 우리 삶의 포자들이 언제든 번식하고 있다. 그것에 의미를 두는 순간 이야기로 천일야화로 말이다.
P. S.
양치식물에 대한 기억이 한 가지 더 떠올랐다. 나는 3년 전부터 가끔 울산 석탄 부두에서 소위 말하는 투잡을 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린 아직도 고생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석탄 부두에서 일한 천일야화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