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월평빌라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는데, 선영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어디에요?”
“아직 월평빌라에 있어요. 점심은 드셨어요?”
“예.”
“저 점심 먹고 곧 갈 거예요. 출발할 때 한 번 더 연락드릴게요.”
“예.”
선영 씨는 오늘 하기로 약속한 일은 이루어질 때까지 확인하신다. 오늘은 선영 씨와 도서관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도서관에 가서 이력서를 고르고 같이 조금 채워보기로 했다. 약속한 대로 도서관 갈 준비가 다 되었는데, 언제쯤 오는 거냐고 확인 전화를 하신 거다.
선영 씨 아파트에 도착하니 파란색 티셔츠와 분홍색 반바지를 입은 채 입구에 서 계셨다. 이 옷들은 선영 씨가 새 마음, 새 뜻을 안고 구직활동 시작하기 위해 지난 금요일에 구매한 것이다. 파란색과 분홍색 조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선영 씨, 선영 씨가 저 도서관까지 가는 길 안내해주실 수 있죠? 저는 길을 몰라서요.”
“예.”
선영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선영 씨는 내가 중간중간 길을 잘못 들려 할 때마다 손짓으로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선영 씨에게 모든 걸 맡기고 걷는 길이 어딘가 어색했다. 선영 씨가 이력서 쓰는 일은 내가 조금 도와드려야겠지만, 도서관까지 가는 일에는 내가 선영 씨의 도움이 필요했다. 서로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조금씩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우리는 그런 관계로 만난 거였고 주변 사람들도 선영 씨와 그런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터다. 선영 씨의 인도에 따라 걷는 길이 즐거웠다. 중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을 누비며 축구하는 모습도 보고, 초등학교 앞에서 안전 지도를 하시는 듯한 선생님들과는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선영 씨에게는 이런저런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새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선영 씨에게 도서관 내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인터넷 검색을 해야 하니,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자료실 안내도 함께 부탁했다. 선영 씨가 망설임 없이 디지털 자료실로 걸어갔다. 자료실 안에는 사서 선생님이 나와 선영 씨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어보셨다.
“회원카드 있으세요?”
선영 씨가 가방을 손을 넣고 잠시 무언가를 찾는 듯하다가 이내 그만둔다. 아무래도 회원카드는 없는 것 같다.
“카드 안 갖고 오셨으면 성함 말씀해주세요. 어떤 분이 사용하시려는 거죠?”
선영 씨를 가리키며 이 분이 사용하실 거라고 말씀드리니 사서 선생님께서 선영 씨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신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선영 씨가 가방에 다시 손을 넣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카카오톡으로 들어가 첫 화면 첫 프로필에 나오는 본인의 이름을 사서 선생님께 보여드린다. 선생님이 “정선영”을 되뇌며 이름을 검색하셨다.
“혹시 핸드폰 번호 알아요? 정선영이 일곱 명인데... 아무래도 핸드폰 번호 뒷자리를 알아야 될 것 같아요.”
이번에도 선영 씨가 카카오톡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아무래도 카카오톡 어딘가에 선영 씨 번호가 적혀있는 것 같다. 선생님은 선영 씨가 번호를 찾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계셨다. 선영 씨가 번호 찾는 걸 어려워하는 것 같아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선영 씨, 혹시 번호 찾는 거 어려우시면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지난번에 선영 씨가 제게 알려준 번호 있잖아요. 그거 선생님께 알려드려도 괜찮을까요?”
선영 씨가 고개를 끄덕이신다. 내 핸드폰으로 들어가 선영 씨 번호를 찾았다. 선생님께 보여드리니 등록된 정보가 없다고 나온단다.
“컴퓨터 사용하시려면 회원카드를 만드셔야 해요. 2층 종합자료실에 가시면 카드 만드실 수 있을 거예요.”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 선영 씨와 같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러자 1층 서가 사이에서 가벼운 몸짓으로 걸어 다니는 주현 씨가 보였다.
“주현 씨!”
조용하게 주현 씨를 불렀다. 주현 씨가 우리를 보더니 반갑게 손짓하며 달려왔다.
“주현 씨, 우리 지금 회원카드 만들러 가요. 2층으로 가면 된대요.”
“예. 저는 이미 카드 만들었는데.”
주현 씨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이렇게 해서 셋이 함께 종합자료실로 이동했다.
종합자료실 사서 선생님께 회원카드를 만들려 한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이 우리를 회원가입용 컴퓨터로 인도해주시고 일일이 설명해주셨다. 가입을 위해서는 이름, 핸드폰번호, 생년월일을 입력하고 본인인증을 받아야 했다. 선영 씨가 타자 치는 걸 조금 어려워하자 주현 씨가 나서서 도움을 줬다. 이름도 입력해주고, 선영 씨 번호도 카카오톡으로 찾아서 입력했다. 선영 씨 생년월일은 주현 씨가 핸드폰 달력을 이리저리 뒤져가며 확실하게 확인하고 입력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일이었지만 사서 선생님은 천천히 기다려주셨다. 주현 씨가 선영 씨 도와 하나하나 입력할 수 있도록, 뒤에서 그저 지켜봐 주셨다.
결국 본인인증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 사서 선생님이 다른 방법으로 카드를 발급해주셨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만 만들어오라고 하셔서 선영 씨와 같이 의논해서 정했다. 주소는 주현 씨가 월평빌라 주소로 입력해달라고 말씀드렸고, 부가적인 연락처도 주현 씨 번호로 하기로 했다.
드디어 ‘정선영’ 이름이 박힌 회원카드를 발급받았다. 잃어버리지 않게 핸드폰 케이스에 꽂아두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케이스 뒤쪽에 한마음도서관 회원카드를 꽂으셨다. 카드를 들고 1층 디지털 자료실로 내려갔다. 사서 선생님의 도움으로 컴퓨터 사용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나중에 선영 씨가 다시 오게 되면 도와드리겠다고 하시면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적어가셨다.
컴퓨터를 켜고 본격적으로 이력서 검색을 시작했다. 선영 씨에게 구글 크롬 아이콘을 손으로 짚은 뒤, 이 아이콘을 두 번 클릭해달라고 부탁했다. 구글 검색창에 ‘이력서’를 입력해보자고 했다.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타자를 눌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구글 이미지에 무수히 많은 이력서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개중에 선영 씨가 가장 먼저 클릭한 이력서 한 가지와 내가 고른 이력서 두 개를 다운받아 비교해보기로 했다.
선영 씨가 고른 이력서가 가장 단순했고, 비교하기 위해 다운받은 다른 이력서는 보기에 예쁜 이력서들이었다. 세 이미지를 계속 살펴보며 어떤 이력서가 좋을지 선택해보자고 했고, 선영 씨는 처음에 고른 단순한 형태의 이력서에 손을 데고 “이거요!”하고 말했다.
최종적으로 고른 이력서를 선택해 인쇄해보았다. 선영 씨가 인쇄 버튼을 클릭하고, 주현 씨가 인쇄 일련번호를 외우기 쉽게 정해 입력해주었다. 인쇄기는 자료실 바깥에 있어 함께 나가 나머지 작업을 진행했다. 인쇄 버튼 누르고, 일련번호 입력하고, 확인 버튼 누른 다음, 카드로 결제하기... 결제하는 것 빼고는 모두 주현 씨와 선영 씨 힘으로 해냈다. 한 장의 이력서가 인쇄되어 나오자, 주현 씨가 이력서 종이를 복사기에 넣었다. 한 장 더 복사해서 넉넉히 사용해보자는 뜻 같았다.
인쇄 결제는 내 카드로 했다. 80원밖에 안 되는 저렴한 가격이기도 했고, 돈 쓰는 일로 의논하는 게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굳이 선영 씨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갑에서 내 카드를 꺼내 결제를 하니 선영 씨가 곧장 묻는다.
“이거 누구 카드에요?”
선영 씨가 쓰려고 뽑는 선영 씨 이력서인데, 왜 선생님 카드를 쓰냐는 말씀 같았다. 상황에 따라 내가 결제할 수도 있겠지만, 결제하기에 앞서 의논하는 절차를 생략한 것을 반성했다. 인쇄는 파일을 다운받고 인쇄 버튼을 누르는 일을 시작으로, 카드나 현금을 활용해 결제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중 어느 한 가지 과정을 임의로 건너뛴다는 건 당사자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까. 그리고 선영 씨는 이력서 작성을 선영 씨의 일로 여기고 있었다. 그 마음을 너무 쉽게 여기고 내 편의대로 행동한 것이 부끄러웠다.
두 장의 이력서를 들고서 이제 빈칸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어려운 낱말들을 풀어 설명하고 이 칸에 어떤 내용을 넣으면 좋을지 의논했다.
“성명란에는 선영 씨 이름을 적으면 돼요. 제가 옆에 적어드리면 따라 써주실 수 있겠어요?”
여분의 종이에 이름을 적으면, 선영 씨가 빈칸에 글자를 고스란히 따라 적었다. 학력란과 경력란을 채울 때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선영 씨, 혹시 선영 씨가 마지막으로 졸업한 학교 이름 알아요?”
선영 씨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대신 월평빌라 카페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는 듯 카페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검색해보려 했다.
“선영 씨, 여기에 검색하는 거 조금 도와드릴까요? 이 버튼 누르면 검색할 수 있어요. 검색어에는 어떤 단어를 넣으면 좋을까요?”
선영 씨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기다린다.
“음... 일단 선영 씨 이름을 입력하면 좋을 것 같고요. 그리고 선영 씨 어떤 학교 다녔는지 찾으려면 무슨 단어를 넣는 게 좋을까요? ‘학교’라고 검색할까요?”
“예.”
선영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선영 학교’라고 검색하니 게시물들이 여러 개 나열되었다. 선영 씨가 페이지를 죽 내리면서 어느 게시물에 들어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거창나래학교 졸업’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했다. 선영 씨에게 이 게시글에 들어가면 선영 씨가 졸업한 학교 이름을 알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선영 씨가 게시물을 클릭하고 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학교 이름을 드래그하여 파란색으로 표시하고, 여기 색칠된 글자가 선영 씨가 마지막으로 졸업한 ‘거창나래학교’라고 말했다.
“선영 씨, 이 글자를 학교란에 따라 적을 수 있어요?”
“예.”
선영 씨가 한 글자씩 따라 적어갔다. 삐뚤빼뚤했지만 선영 씨 필체로 쓴 선영 씨 이력서다.
“선영 씨, 여기 밑에 ‘경력’은 선영 씨가 이때까지 해왔던 일을 써보라는 거예요. 선영 씨 어떤 일 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
선영 씨가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사이, 옆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던 주현 씨가 무심히 한마디를 던진다.
“근로작업장.”
“주현 씨가 선영 씨 근로작업장에서 일하셨다는 데 맞아요?”
“예.”
선영 씨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근로작업장 말고 또 다른 곳에서도 일하셨다는 것 같았는데... 혹시 어디였죠?”
이번에도 주현 씨가 덥석 대답한다.
“미용실.”
이렇게 해서 선영 씨의 경력까지 정리되었다. 앞서 다른 칸을 채웠던 것처럼, 경력란 역시 내가 카페 게시글에 나온 대로 적으면 선영 씨가 따라서 적는 방식으로 채웠다. 주현 씨 덕분에 한 장 더 뽑게 된 이력서에 내용을 다시 써보았다. 선영 씨가 진지한 얼굴로 글자를 적었다. 한 자 한 자 마음과 소망을 담아, 있는 힘을 다해 썼다.
우리가 이력서를 썼던 과정이 조금 돌아가는 것 같고 번거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사회사업은 편한 길, 편리한 수단을 선택하지 않는 일이 많다.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지 않을 때도 많고, 사회사업가의 ‘권능’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일은 삼간다. 선영 씨 힘으로 적는 선영 씨의 이력서가 되려면,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듯 많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 스스로 글자를 적는 수고와, 모르는 건 찾아보고 물어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당사자가 자기 삶을 산다 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적은 이력서는 선영 씨가 집에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선영 씨가 한 손에 이력서를 꼭 쥔다. 이제 오후 예배에 갈 시간이라며 교회로 출발했다. 주현 씨는 박소영 선생님이 나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도서관 앞에서 함께 기다려주었다. 떠날 때까지 같이 있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2022년 7월 19일 화요일, 전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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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 선영 씨가 회원카드 만드는 동안 기다려주신 사서 선생님이 참 고맙네요.
2. 이력서를 고르는 과정부터 선영 씨가 직접 하게 도왔네요. 잘하셨어요.
3. 80원을 내준것도 선영 씨를 생각해서 그런거다 싶어요. 전채훈 선생님의 마음이 선영 씨에게 전달되었을 겁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길...
4. '선영 씨가 한 글자씩 따라 적어갔다. 삐뚤빼뚤했지만 선영 씨 필체로 쓴 선영 씨 이력서다.' 귀합니다.
5. 언니 이력서 쓰는 과정을 도운 주현 씨, 고맙습니다. 언니 위하는 마음이 기특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