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10월호 <문화야 놀자>코너에 게재된 졸문 인터뷰 원고입니다. 편집과정에 조금 수정이 되었으나, 99% 원문 그대로여서 전재합니다. 한 전각예술인의 삶과 생각, 작품을 감상해 보시면 고맙겠습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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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유아독존, 전각예술인 진공재
“마음을 돌에 새겨 꽃을 피우다”
여기 한 예술인이 있다. 돌에 글자를 새겨 꽃을 피우는 예술, 이른바 전각篆刻에 반 세기 동안(정확히는 47년) 몰두, 그 분야에 우뚝 선 전각서예인 진영근(진공재. 64), 바로 그 사람 이야기이다. 어느 분야든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경지가 이른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그만의 피와 땀의 열매이겠으나 ‘대추 한 알도 저절로 붉어질 리 없’듯이(그 안에 태풍, 천둥, 벼락, 번개 몇 개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시를 아시리라) 그만의 처절한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환희와 절망이 긴 세월 켜켜이 쌓이고 쌓인 소산일 터. 더구나 스승이 없는 독학자습이라니, 그게 어디 녹록한 일이겠는가.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는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일 터. 30대초에 『채근담菜根譚』(유불선을 담아낸 명철보신의 도를 엮은 책) 12,611자를 하나하나 돌에 새기기 시작, 9년만인 41세에 완각을 하고나니 머리와 눈썹이 온통 하얘진 것은, 옛날 설화(천자문 별칭이 백수白首文인 까닭)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것이리라. 그로부터 수 년 후 검은 머리로 돌아왔다. 은문恩門(자기 작품을 알아준 사람)인 석도륜 선생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은 증표”라고 했다한다. 그가 오죽했으면 돌에 마음을 새긴다는 뜻으로 ‘심각心刻’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것인가. 문득, 대하예술소설 『혼불』을 남기고 요절한 최명희 작가의 “글을 쓸 때마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간다”는 어록이 떠오른 소이연이다.
그 길이 무엇이길래 팔뚝의 인대가 끊어지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석도필묵石刀筆墨(돌칼과 붓 그리고 먹물)’ 오직 그 외길을 걸어온 사람, 다시 태어나도 그 길을 가겠다고 호언을 하는, 호가 56개(공재空齋, 찰지인察地人, 심인방心印房, 행공자行空子 등)나 되고, 이사를 40번도 넘게 하다 마침내 회갑을 넘겨서야 군포에 집 한 채 마련한 가난하고 고독한 예술인. 그의 탯자리는 남원군 대산면이다. 1974년 2월 14일 밤 7시 28분, 16세 소년은 자전거 판 돈 3400원을 들고 ‘나 홀로 출가(출향)’를 감행했다<그는 중학교때 14세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친 부재의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라고 생각, 간신히 2년을 버티다 급행열차를 탔다고 한다. 그가 이렇듯 특정 연월일시를 명징하게 기억하는 것은 삶의 중대 결단을 할 때마다 마침표를 찍는 지점이기 때문이라며 2003년 9월 9일도 예를 들었다. 그날은 33세인 1991년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전각부문에 어떤 연줄도 없는 전라도 출신 무명인사인 그가 최고상인 우수상을 거머쥔 이후 10여년간 활발히 활동하던 대한국민서예대전 심사, 2001 동아미술제 심사, 한국서예협회 이사, 경기도지부장, 한국현대서예문인화협회 이사, 한국전각협회 감사 등 여러 직함을 하루 아침에 때려치우고 지리산으로 은둔한 날이자 본격적으로 인생유전이 시작된 날이란다>. 한때 87년 경인미술대전 최우수상, 90년 월간서예 서예대전 우수상, 95년 중국 서령인사 전각평전에서 당시 한국인 최초로 우수상, 97년 서예문화상 등 상복도 잇따랐다. 또한 원광대학교 서예학과, 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전각학 출강도 했으니, 나름 자수성가를 했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하여 중국집 배달 등 10여 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2년여만에 정착한 곳이 안양 어느 골목의 도장 파는 가게. 어린 나이부터 체험한 밥벌이의 고통을 죽는 순간까지 갖고 가는 것은 그의 천복賤福일 터이지만, 이왕이면 재밌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 독공獨工을 시작한 게 ‘글씨 제대로 알고 쓰기’였다. 오서五書(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와 중국 고전 등을 공부하고 돌에 새기면서 서화동원書畫東原(글과 그림이 같다는 것)도 알게 됐다. 판소리의 득음得音마냥 전각 득도得刀의 경지까지 뼈를 깎는 고통이 있었다.
취미가 특기가 되고 그것이 생업生業이 되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고 행운임에 틀림없는 일. 더구나 그것이 예술일진대,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무소의 뿔처럼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독불장군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 그 길을 걸었다. 주위의 시선이 무슨 소용 있으랴. 다만 실패한 가장家長의 회한은 깊을 수밖에 없었으리. 45세에 <실패한 가장의 방황/어디로 갈까? 나>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고 수행자처럼 먼 길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했으나 맨처음 공방의 둥지를 튼 곳이 수구초심首丘初心, 전북 남원이었다. 지리산으로, 부산으로, 인사동으로, 의왕으로, 수리산으로 인생유전을 하면서도 ‘고난은 항해하는 자들의 벗’이라는 신념 하나로 그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15회가 넘는 전시회를 통해 그의 진가眞價가 세상에 제법 널리 알려졌으며. 경북도청 신청사 1층 로비에 '심상서화각의 향연'이라는 제목의 대작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 대작은 처음으로 작가의 살림살이를 조금은 윤택하게 해줬다고 한다. 또한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박람회 초대전(장서인藏書印 시연)은 그에게 제법 많은 윤자潤資(작품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자금)를 안겼으며, 해외문화여행 순례까지 하게 했다.
어디 그뿐이랴. 서예의 원류가 한자이고 조형적 미감에서는 한글이 한자보다는 부족하다지만, 그의 한글사랑 또한 유별났다. 한글폰트(글꼴) 6체 24종을 개발하여 한글 1만6천여 글자를 돌로 새겼다. 작가의 글꼴은 다운을 받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그 마음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의 바람은 한결같이 전각을 통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 공헌하고, 고전의 좋은 메시지들을 세상에 전달하는데 일조하는 것. 그리고 다음 생에서도 석도필묵의 길을 걷는 것. 그가 탄탄한 내공만큼 독불장군의 길을 걷는 까닭이다. 그는 말한다. “눈을 사랑한다면 얼어죽을 각오를 해라”“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이면 하지 말라”“꽃은 나무를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입만 열면 판판이 어록이다. 그가 제자를 쉽게 두지 못하는 이유이다.
군포의 옹색한‘석가사夕佳舍’공방을 찾은 날, 작가는 하필이면 행정기관의 말단 공무원과 전화로 거세게 다투고 있었다. 어느 사람의 이름 중‘밝은 명’자를 인감도장에 그림과 비슷한 전서로 팠는데, 담당공무원이 글자가 아닌 그림이라며 인감도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 무식이 하늘을 찔러도 분수가 있지. 행정안전부에서도 인정한 증거가 있다. 사과하라”며 윽박지르던 작가는 오늘도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심각한 거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노을이 아름다운 공방을 나서며 그의 예술적 건승을 비는 마음 충만했다. 그가 즐겨 말하는 인사말 “나마스테(인도나 네팔에서 합장하고 머리를 살짝 숙이며 주고받는 인사말)”와 수리산지기를 자처하는 작가의 <사철가>를 문득 듣고 싶어졌다. 전각부문의 피카소가 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