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은 여인들의 로망이요, 화려한 인생의 상징이다. 촉촉한 황금색 액체를 컵에 따르면, 크리스털처럼 터져오르는 기포가 시선을 끈다. 한 잔 따라서 코앞에 놓고 바라만 봐도, 정말 ‘바라만 봐도 좋은 당신’ 같은 술. 와인 강의마다 나는 강조한다. “샴페인과 스파클링 와인은 180도 다릅니다”라고. 세상의 기포를 뿜는 모든 와인을 ‘스파클링 와인’이라 한다면 그중의 단 1%, 아니 0.00001%만 샴페인(정확한 통계는 아닌, 내 기분상의 수치), 발포성 와인인데 그 태생이 프랑스 산(産), 더 정확히 말해서 프랑스의 샴페인 지방에서 태어나야지만 비로소 ‘샴페인’이라 불릴 수 있는 법. 아, 어렵다!
이렇게 샴페인은 그 출생부터 선택되어 세상에 나온다. 한정된 수요가 최상급의 노하우에 의해 최상급의 와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희소성이, 오랜 노하우로 만들어진 맛과 향기가 전 세계 샴페인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 가끔 샴페인을 손에 넣을 때마다 아껴 마신 지 10여 년쯤 지났을까. 파리에 수년을 살았어도 선뜻 다녀올 기회가 없었던 그곳. 태어나서 처음으로 샴페인, 아니 본토 발음으로 ‘샹빠뉴’에 다녀왔다.
샴페인의 본고장, 랭스
파리의 북동부 100km, 차로 1시간 반 정도 거리에 위치한 랭스(Reims)는 에페르네와 더불어 샴페인의 주요 생산지다. 수채화 같은 전경이 파리-랭스 간 고속도로를 따라 이어지다가, 이윽고 눈앞에 ‘뵈브 클리코(Veuve Cliquot)’라는 노란 간판이 보인다. 랭스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동네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노란색. 낯익은 노란 라벨이 붙은 문이 바로 샴페인 뵈브 클리코 본사의 입구다.
뵈브 클리코는 샴페인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이름이다. 프랑스의 남쪽 지방보다 추위가 일찍 와서 그만큼 일찍 멈춰버리는 1차 발효와 다시 효모와 당을 넣은 2차 발효를 견디는 동안 탁해질 수밖에 없던 빛깔을 맑게 만든 장본인이 클리코 여사였기 때문. 우리가 어떻게 하여 맑디맑은 샴페인을 마시게 되었는가를 랭스에 가면 배울 수 있다.
대부분의 와인 투어가 그러하듯, 일단 뵈브 클리코 사의 셀러로 향했다. 지하 깊숙이 내려가면 눅눅하고도 찬 공기가 몸에 닿는데, 고요한 그곳이 바로 수백 년간 샴페인을 숨 쉬게 해주고 있는 곳. 그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간 샴페인들과 샴페인을 만든 이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다.
뵈브 클리코 셀러는 역사가 서려 있으면서도 상당히 모던하다. 지하 동굴의 윤곽은 고스란히 보존하고, 조명이나 동선은 세련되게 업데이트했다. 클리코 여사의 업적인 ‘르뮈아쥬(Remuage, 술을 맑게 거르는 일)’를 가능케 한 와인 랙, 비스듬히 와인을 엎어 꽂을 수 있는 받침대가 눈에 띈다. 그렇게 병을 꽂아두면 불순물이 병목에 모이고, 모인 불순물만 뽑아내면 깨끗한 액체 상태가 되는 것! 스물 몇 살에 남편을 여의고, 시댁이 하던 샴페인 사업을 덜컥 이어받은 젊은 여사장의 업적이었다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과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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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 투어를 끝내고 와인 원액 시음이 있었다. 뵈브 클리코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샴페인을 구성하는 3종의 포도, 피노 누아와 피노 뫼니에, 샤르도네 원액을 마실 수 있었는데 같은 피노 누아라 하더라도, 어떤 해의 것은 더 달고 어떤 해의 것은 덜 달다. 그렇게 해마다, 종마다 다른 원액을 예민한 비율로 섞어가며 각 와이너리가 추구하는 통일된 맛을 이뤄나간다는 사실이, 그런 정교한 작업을 통해 샴페인 한 병이 만들어진다고 하니 감동할 수밖에. 상큼하고 향긋한 고급 원액 시음으로 입 안에 침이 고일 대로 고인 나는 시내의 레스토랑을 찾아 움직였다.
뵈브 클리코 사의 PR을 맡고 있는 이자벨(Isabelle Pierre)은 그야말로 ‘랭스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그녀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이자벨이 나를 데려간 곳은 ‘카페 뒤 팔레(Cafe du Palais)’라는 레스토랑으로, 1930년에 문을 연 랭스의 사랑방.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장 루이(Jean Louis)가 오너, 그의 아내가 셰프 그리고 아들이 홀 서빙을 돕는 그런 분위기의 맛집이다. 나는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이 집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천장에 매달린 슈즈와 기타 오브제, 벽마다 걸려 있는 그림들이 괴짜 아티스트의 작업실에 온 듯한 착각을 주었으니까. 그 안에서 사람들은 행복하게 웃고 먹고 마시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카페 드 파리가 랭스 시청 앞의 명소이다 보니 이쪽에 본사를 둔 와인업자들은 죄다 단골이라는 점. 그래서일까? 한 테이블은 유독 크루그(Krug)를, 다른 테이블은 폴 로저(Pol Roger)를, 우리는 뵈브 클리코를 마셨다.
피노 누아의 탄탄함과 풍부한 향기가 살아 있는 로제 샴페인에 맞춰 장 루이는 푸아그라 조각이 깔린 메추리 가슴살 샐러드를 권했고, 그의 제안에 따른 푸드 매칭은 대성공이었다. 스모키하게 구운 메추리 가슴살을 씹으며 로제 샴페인을 입에 가득 머금으면 여린 새의 가슴팍으로 장밋빛 와인이 스며들면서 살결이 보드라워지고, 향긋해지는 것이었다. 행복해!
한때 화가였던 주인장은 분위기 메이커였다. 꽤 넓은 레스토랑을 가득 메운 손님들이 1분마다 장 루이를 불러댔다. 본인이나 친분 있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걸어두고, 친한 사진가의 작품을 엽서로 만들어 한켠에 파는, 음식이 푸짐하며 맛있고 세상 시름을 잠시 잊게 만드는 곳. 그 느낌이 바로 우리가 샴페인을 마시는 이유와 맞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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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과식을 하고, 로제 샴페인도 한 병을 다 비우고는 거리를 걷기로 했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상점들은 신문이나 잡지를 팔고, 사탕을 팔고, 로션을 팔고 그랬다. 랭스의 대성당은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옛 건축물로 꼽히는데,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다. 수많은 프랑스 왕들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했고, 그 가운데 샤를 7세는 1429년에 잔 다르크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관식을 갖기도 했다.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리는 독일 쪽의 협약도 랭스 성당에서 이루어졌으니, 성당에 서린 기운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제 1 .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손상된 부분은,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모두 복원이 되었다는데.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샤갈이 만든 스테인드글라스로, 성당의 맨 안쪽에 자리한다. 파아란 바탕에 너무나 샤갈스러운 모티프들이 떠다니는 유리 공예는 다분히 종교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고. 꽤 오래 멍하니 바라보았더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많은 이들이 나처럼 파란 유리 앞에 한참을 머물다 갔다.
마누아 드 베르지가 있는 작은 마을, 몽타뉴 드 랭스
샴페인 지방에서 포도 재배지라 AOC법으로 규정된 면적은 3만5천 헥타르. 그 면적은 다시 5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몽타뉴 드 랭스(Montagne de Reims), 발레 드 라 마른(Vallee de la Marne), 코트 데 블랑(Cote des Blancs), 세자네(Sezannais) 그리고 코트 데 바르(Cote des Bars)다. 그 가운데 몽타뉴 드 랭스에는, 뵈브 클리코 사가 1백년 넘게 소유해온 전원주택이 있다고 하여 방문해보기로 했다.
특별한 이벤트나 시음, 프레스를 위한 런치 등이 열리는 곳인데, 운 좋게 하룻밤 머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곳의 정식 명칭은 ‘마누아 드 베르지(Manoir de Verzy)’로 베르지라는 조용한 마을에 있는 예쁜 집이었다. 베르지 집으로 가는 길, 몽타뉴 드 랭스의 너른 포도밭에 멈춰 포도를 구경했다. 앞서 시음 때 마셨던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샤르도네. 포도를 구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줄기가 뻗어나간 모양이 품종별로 다르기 때문. 포도를 수확하는 계절에는 전 세계의 와인 마니아들이 ‘파트 타이머’를 자청하며 포도 수확을 도우러 온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멋지다. 나도 포도 따러 다시 오고 싶다고 하니, 포도밭 사람들은 “뿌르쿠아 빠?(Pourquoi pas? 안 될 것 없잖아)” 라고 말한다.
랭스 시내보다 한적한 몽타뉴 드 랭스의 포도밭을 걸으면서 알이 잔 포도송이를 만져본다. 요것들이 풍만하게 자라서, 마지막 한 방울의 즙까지 우리에게 주고 간다는 생각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마누아 드 베르지에 도착했다.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외관에 ‘꺄!’ 작은 탄성을 질렀다. 딱 그림 같은 모습. 현관을 들어서면 왼쪽과 오른쪽에 크기가 다른 다이닝 룸이 있고, 오른쪽 다이닝 룸은 주방과 연결되어 있다. 뒷문으로 나가면 조촐한 정원이 있는데, 거기에 또다시 포도밭이 펼쳐진다. 하룻밤 신세 질 방은 2층에 있는, 분홍빛으로 꾸민 그야말로 ‘아가씨스러운’ 방. 창문이 뒷마당을 향해 열려서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들어오고, 저 멀리 포도밭이 보이는 꿈 같은 잠자리였다.
‘마누아 드 베르지’의 하이라이트는 뵈브 클리코 전속 셰프가 준비하는 푸드 페어링 디너였는데, 나는 저녁 시간보다 일찍 주방에 내려가 셰프가 준비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잠깐, 여기서 샴페인을 위한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셰프 프랑수아의 조언을 들어보자.
우선, 마늘이나 통후추, 초콜릿 등 고유의 향이 너무 드센 식재료는 피하는 것이 좋다. 견과류 가운데 피스타치오도 같은 원리. 고유의 향이 너무 강해서, 한입만 씹어도 혀에 맛이 배기 때문에 샴페인을 온전히 즐기기에 무리다. 그러나 다양한 재료, 소스를 시도하는 것은 권장한다고. 예를 들면 간장을 발사믹 식초처럼 약간만 쓴다든지, 생강을 설탕에 절여 쓴다든지 하는 방법이다. 간장이나 생강 모두 언뜻 듣기에는 샴페인과 어울리지 않을 듯, 상당히 동양적인 식재료들이 아닌가. 그렇게 따지자면 오신채를 배제하여 만든 사찰 요리는 샴페인과 궁합이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과일을 많이 쓴다는 사실. 결국 샴페인은 포도로 만든 과즙의 발효액이다. 그러니 요리 사이사이에 과일을 쓴다면, 샴페인 속 숨어 있는 과일향을 두 배 세 배 이끌어내기가 쉬워진다는 얘기. 특히 샴페인과 찰떡궁합인 가금류, 예컨대 메추리나 닭, 오리 등을 요리할 때 달콤한 포도나 자두, 체리 등을 함께 요리하여 음식의 맛을 화려하게 만든다면, 샴페인에 딱 어울리는 메뉴를 만들 수 있겠다.
서울에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났어도 랭스의 성당과 몽타뉴 드 랭스의 포도밭, 베르지의 좁은 골목이 아른거린다. 평화로운 포도밭 너머에 묵묵히 돌던 소박한 풍차, 골목을 돌아서면 나오던 작은 샴페인 명가들. 마누아 드 메르지에서 좋은 음식과 좋은 샴페인 향기로 심신을 가득 채우고 잔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이 뜨였다. 포도밭으로부터 불어오는 이른 아침의 공기가 창문 틈으로 나를 깨웠다. 자박자박 작은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작은 다이닝 룸에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갓 구운 빵, 치즈와 과일, 집에서 만든 마멀레이드 그리고 카페오레. 아 참, 바로 짠 오렌지 주스까지! 그렇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움직이고, 또 잘 먹은 40여 시간의 추억의 힘으로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은 나의 일상’으로 다시 뛰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