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이상한 사람 바닷가에서 태어났으니 성은 이(李)요 이름은 재(栽), 자(字는 유재(幼材)일세 뜻은 있으나 재주 없고 또 때를 못 만났으니 바위틈에 초라함이 정말로 마땅하네 빛나리로다 내가 차고 있는 것 앞 어른들을 쫓아갈거나 즐기리로다 나의 즐거움 또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 시는 조선조 후기 대학자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56세때 쓴 작품 빈한과 고난으로 점철된 이재의 생애와 높은 포부 그리고 도(道)를 얻어 스스로 자족하고 고고한 사상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andong.net%2Fnews2007%2Fphoto%2F4683%2F2ae43971-bbd4-4743-81fa-cb09b9608120.jpg) |
>> 밀암집, 이재의 시문집,25권 13책. 목판본 1732년(영조 8) 아들 인환(寅煥)이 편집한 것을 바탕으로 19세기경 간행된 원집에, 저자의 자편고(自編稿)인 부여를 합한 것이다.ⓒ유교넷 제공 |
조선 유학사 또는 영남학맥상 큰 몫을 해낸 이재는 1657년 지금의 영양군 수비면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재령(載寧)이 본관인 그의 가계는 할아버지, 아버지, 자신 등 3대에 걸쳐 7현자(七賢者)와 7사림(七士林)을 배출한 명실 공히 당대에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6세때 아버지 이현일이 나이든 다른 형제들에게 가르치던 소학(小學)을 그에게 시험 삼아 가르쳐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쉽게 읽고 해독했다. 이재는 7세부터 조부전래의 가학(家學)을 본격적으로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의 연보를 보면 총명하고 영리함을 나타내는 사례가 많다. 한번은 할아버지 이시명(李時明)이 이른 아침 초가지붕위에 드리워진 소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글을 지어보라고 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재는 ‘소나무이슬이 이엉에 떨어지네’ 라고 답했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소학, 논어, 좌씨전(左氏傳) 등 모든 경전을 읽고 13세가 되는 설날아침에 스스로 큰 뜻을 품는 자경잠(自警箴)을 지었다. 예술, 학문, 부덕으로 신사임당과 쌍벽을 이루는 그의 할머니 장씨부인이 자경잠을 칭찬하는 5언절구를 지었다.
새해에 자계문(自戒文)을 지으니 너의 뜻이 지금 사람 같지 않구나 동자가 벌써 학문을 향해 나가니 가히 유자(儒者)의 참됨을 이루리 (新歲作戒文신세작계문/汝志非今人여지비금인/龍子巳向學용자사향학/可成儒者眞가성유자진) 할머니의 찬양시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재는 결국 대유(大儒)가되어 주리론(主理論)을 더욱 발전시켰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 천리길도 멀지 않다며 나서야하는 당시 상황에 비춰 이재의 학문적 환경은 너무나 좋았다. 아버지 7형제 모두가 출중한 인걸들이었으나 그중 이휘일(李徽逸), 현일은 영남학과를 대표하는 대학자였다. 또 이들의 학통이 퇴계학맥의 정통에 속했다. 퇴계 문하의 3걸인 정구(鄭逑),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을 두루 사사한 장흥효(張興孝)의 외손자가 이휘일, 현일 형제들이다. 따라서 이재는 이현일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의 학문은 영남학맥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의 연원(淵源)을 둔 영남학맥의 여러 갈래 중 가장 뚜렷한 맥을 이어받은 이재는 계승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그의 학문은 외손자 대산(大山)이상정(李象靖)-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유치명(柳致明)-서산(西山)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게 한 공로자이기도 했다.
한 말 대유(大儒)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은 신라에서 조선조 말까지 유학자들의 학설을 발췌 수록한 동유학안(東儒學案)을 저술했다. 여기에 이재는 물론 중부(仲父)이휘일, 아버지 이현일, 숙부 이숭일(李崇逸), 종제(從弟)인 이만(李만)과 함께 도산사숙학안(陶山私塾學案)에 채록되었다. 형제, 부자, 숙질등 한 집안에서 다섯명이 채록된 경우는 고금을 통해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이처럼 좋은 가문과 학통을 기반으로 한 이재는 타고난 재능을 외길, 학문쪽으로 기울여 진작부터 상당한 경지를 성취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33세 때 숙종을 특별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 이현일을 따라 몇 차례 상경하며 명유(名儒)들과 교유를 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정변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자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현일이 밀려나면서 이재의 생애도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현일이 유배길에 오르자 그는 시종 따라다니면서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 창구객일(蒼狗客日)이다. 영양-강릉-양양-원산-함흥-홍원까지 1천5백리를 갔다가 그 이튿날 다시 서울까지 되돌아왔다가 서울-포천-김하-천령-원산-영흥-함흥-홍원-북청-마운령-마천령-길주-명천-종성, 2년 뒤 다시 전라도 광양까지 3천리 거리를 이배(移配)하는 동안 지체한 역, 유숙한 곳은 반드시 명시하고 앞서 떠난 곳에서 다음 머문 곳까지 일일이 거리를 기록해 두어서 당시의 여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이재는 유배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지내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연구는 중단하지 않았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그는 부친의 시종을 드는 여가를 틈타 주자서(朱子書)등 성리학을 공부하는 한편 일과를 정하여 한치의 착오도 없이 각종 경서를 읽었다. 이러한 이재의 태도를 흐뭇하게 생각한 이현일은 ‘너는 나의 학문과 사상을 빛낼 사람이다’ 고했다. 8년간의 적소생활에서 풀려난 그의 아버지가 안동군 임하면 금소에 금양(錦陽)이라는 초당을 짓고 우거하자 사면팔방(四面八方)에서 유생들이 모여들어 배움을 청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andong.net%2Fnews2007%2Fphoto%2F4683%2Fe85c1d84-3b52-477d-84a1-67faafb622ed.jpg) |
>> 갈암금양강도지(葛菴錦陽講道址) ,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 위치해 있다. | 이때 이재는 찾아오는 유생들을 먼저 만나서 강론 질의를 거친 연후에야 연로한 아버지를 찾게 하였다. 한 평생 효성과 학문으로 일관해온 그가 48세때 대학자이며 뛰어난 정치가였던 아버지 이현일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애통함이 끝날 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부인마저 잃고 연이어 세 아들마저 잃는 비운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학문에 대한 정열의 불꽃을 끄지 않았다.
그는 당시 영남에서 두드러진 명유들이었던 식산(息山)이만부(李萬敷), 창설재(蒼雪齋)권두경(權斗經), 청대(淸臺)권상일(權相一), 하당(荷塘)권두인(權斗寅), 병와(甁窩)이형상(李衡祥), 고재(顧齋)이만(李만)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끝없는 사색과 독서를 통하여 회심처(會心處)가 있으면 그때그때 기록하여 두었다가 금수기문(錦水記聞)이라는 책을 엮었다. 72세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진리탐구에 마지막 정렬을 불태웠다. 아버지가 “나에게 기대했건만 지금 내가 곤궁하고 능력이 없어 아버지의 유업을 잇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은가”하며 집필에 전력하여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주자강록간보(朱子講錄刊補),주전집람(朱全集覽),심경질의고오변(心經質疑考誤辨) 등이다. 이밖에 그는 제산(霽山)김성탁(金聖鐸)가 함께 이현일의 문집을 간행하고 권두경과는 도산언행통록(陶山言行通錄)을 공저했다.
그가 74세로 생을 마치니 영남 유림 대부분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그의 높은 학덕을 추모했다. 그의 묘비명에는 징사(徵士)로 표기되었다. 징사는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도 않고 오로지 인격수행과 학문에만 전심한 기절 높은 선비에게만 주어지는 영예인 것이다. 정승 3명이 한사람의 징사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출처 :내고향 안동 원문보기▶ 글쓴이 : 고치면예쁜아
,,,,,,,,,,,,,,,,,,,,,,,,,,,,,,,,,,,,,,,,,,,,,,
密菴 李栽 硏究는 조선조 지성인의 典範이라 할 수 있는 밀암 이재에 대한 문학·철학·사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접근한 學際的 硏究의 결실이다. 이 책은 17·18세기 안동을 중심으로 한 知性人 集團이 관심을 가졌던 학술적 테마와 학술교류활동을 알 수 있는 책이다. 17·18세기 退溪學派에서 가장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밀암에 대하여 상세한 자료를 제시하여 주고, 정파들의 활동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으며, 영남 사림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사실적으로 설명하여 주고 있다. 특히 전기자료인 연보·행장·묘지명·묘갈명에 대한 현대화된 표현과 상세한 역주는 조선후기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조선조 지성인의 삶을 조망하는 데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며, 당시 밀암의 현실인식과 시대적 고뇌는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지침이 될 것이다. 倫理意識의 피폐, 도덕적 해이 등 무엇보다 윤리의식이 고양되어야 할 오늘날 밀암의 倫理 道德을 강조한 理中心的 사고와 實踐, 孝行과 國家意識은 현대인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조선 후기를 연구하는 학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읽어볼 가치가 있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특히 퇴계 탄신 500주년을 맞아 그의 철저한 계승자인 『密菴 李栽 硏究』의 발간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密菴 李栽의 삶과 學問>은 밀암의 삶을 가계, 수학, 성장, 청년기의 교류, 부친의 사환과 유배시의 수행, 금소강학기의 생활, 동문들과 교류활동, 서원에서의 활동, 강학과 저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密菴 李栽의 詩文學>은 밀암시에 대하여 연대기순으로 유년기, 득의기, 실의기, 곤궁기, 노년기로 나누어 고찰하고, 밀암시의 연원을 <詩經>, <楚辭>, <杜詩>를 들고, 밀암이 理趣詩를 짓지 않았음을 밝히고, 밀암이 다양한 시적 기교를 구사한 뛰어난 詩人임을 입증하고 있다.
<密菴 李栽의 文章觀과 그 實踐>은 밀암의 천부적인 문학적 재능, 簡札의 탁월성, 文章家로서의 높은 성취를 입증하고, 밀암 문장의 품격은 唐宋古文의 문장기법과 程朱의 문장관이 결합된것으로 그의 문장관은 文從字順, 明理博聞, 精練繩削으로 파악됨을 밝히고 있다.
<密菴 李栽의 『朱子書 硏究』와 『朱書講錄刊補』는 퇴계 이황이 편찬한 『朱子書節要』와 퇴계급문제자들이 작성한 『朱子書節要講錄』의 부적절한 부분을 깍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 글이다. 주자서연구와 『朱書講錄刊補』의 저술로 退溪學派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주자와 퇴계학문의 철저한 繼承者였음을 밝히고 있다.
<密菴 李栽의 性理學>은 밀암철학의 특징을 太極論, 理氣論, 心性論과 四七論, 人心道心說과 義理論, 爲學論과 修養論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그는 성리학적 논리구조를 일관되게 소통시키고 있으며, 主理論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理氣의 어느 한쪽에도 국한되지 않는 兩邊說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密菴 李栽 家門과 嶺南學派>는 밀암가문이 정치행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은 그 가문의 社會經濟的 基盤에 기인되며, 기호학파와 노론으로부터 철저한 탄압을 받았지만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嶺南學派를 영도하는 지위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肅宗 後半~英祖初의 政局과 密菴 李栽의 政治論>은 己巳換局·甲戌換局 당시의 상황과 戊申亂 발생시의 정국과 밀암의 動靜을 설명하고, 그의 정치론이 理事爲一論, 變法論, 經界說, 北伐議, 君子小人論으로 파악됨임을 밝히고 있다.
<密菴 李栽의 著述 解題> 는 밀암의 주자서에 대한 訓古註解書인 『朱書講錄刊補』, 『朱全集覽』, 『朱語要略』 등에 대한 해설과 갈암의 귀양 당시 수행하면서 적은 일기인 『蒼狗客日』과 밀암의 문집인 『密菴集』에 대해 풀이한 글이다.
전기자료인 <年譜>,<行狀>,<墓誌銘>,<墓碣銘>은 밀암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개괄적으로, 집약적으로 해설한 글이다. 특히 원문을 실어 번역문과 대조하여 볼 수 있게 하였다.
색인은 人名, 地名, 書名, 官名, 事項으로 만들어 관심있는 사항에 대하여 찾아보기 쉽도록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