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충북 제천시에서 주관하는 ‘아우라 투어’를 하기 위하여
대전동창회에서는 대전역 08:30 출발, 제천행 기차를 타고 이렇게 떠났다.
아우라 투어는 제천과 단양의 관관명소를 두루 아우르는 투어로써
제천시 시티투어의 공식명칭이다.
제천역 도착
비를 맞으며 대전을 출발한 기차가 음성역 부근을 통과할 즈음에
때 아닌 함박눈으로 변하더니 제천역 마당이 이렇게 젖어 있다.
제천역 광장 한쪽에는 이런 조형물도 있다. 이름 하여 ‘박달이와 금봉이’
가수 ‘박재홍’이 불려 국민가요가 된 ‘울고 넘는 박달재’의 조형물이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조선 중기, 경상도 청년 박달(朴達)은 과거를 응시하기 위하여 한양으로 가던 중,
험준한 고개 아래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날 밤 주인집 딸 금봉이와 눈이 맞아 사랑을
약속한다. 한양 간 박달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랑과 과거시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박달은 과거에서 낙방한다. 금봉이는 매일 고갯마루에서 박달을 기다리다가 결국 상사병으로 죽는다. 금봉이가 죽은 지 3일 후 박달이 돌아온다. 금봉의 사연을 들은 박달이 낙심하며 고갯마루에 오르자 금봉의 환영이 나타난다. 달려가 끌어안으려는 순간 금봉이는 사라지고 박달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는다. 이때부터 고개이름은 ‘박달재’가 되었다.
이것이 박달이와 금봉이의 슬픈 사랑의 전설이다.
제천역 광장,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아우라 투어 1호차’가 대기하고 있다.
우리 일행 43명 만을 태우니, 말하자면 전용 버스이다.
차에 오르기 전, 그 사이를 못 참아 한 대를 피워 무는 친구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000,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아래 미인은 제천시 소속 ‘문화재 해설사, 장00’이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할 1호자 전속 해설사이다.
아우라 투어 첫 번째 코스인 비운의 임금,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에 도착.
단종의 어가를 둘러보려면 이곳 ‘서강’을 도강해야 한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곳인데, 왜 이렇게 코딱지 크기의 배를 대놓고 부산을 떠는지 --
하긴 여기에 다리를 놓는다면 청령포의 이미지도 문제려니와
도강에 따른 짭짤한 수입이 차질이 있을 테니까 --
어가 주변 소나무 숲과 언덕배기에 조금 전에 내린 눈발이 녹지 않고 허옇게 쌓여있다.
어가 뒤편 산자락에는 비구름이 휘돌아있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도강 중인 뱃전 친구들의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단종 어가를 둘러보기 위하여 우리 일행이 부지런히 가고 있다.
앞에 보이는 것이 초가 행랑채와 어가의 기와지붕이다.
청령포 안내판 및 안내도
단종 어가에 도착
2000년 4월 5일 단종문화제와 떄를 맞춰 건립된 단종어가는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나름대로 재연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다.
안방에 갓을 쓴 단종의 모습(모형)이 보인다.
단종은 1441년 7월23일(세종23년)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이다. 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 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2월(세종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 5월18일 문종이 승하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왕에 즉위 하였다.
계유정난 이후 1455년 6월11일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세에 상왕(재위기간 1452~1455년)이 되었으며, 박팽년,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3년)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1457년 윤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 후인 윤6월 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됨
그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또다시 떼죽음을 당하게 된다.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어린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하였다.
단종이 지었다는 ‘어제시’ 현판도 걸려있다.
어제시(御製詩) - 단종
千秋無限寃 寂寧荒山裡 천추무한원 적령황산리
萬古一孤魂 蒼松繞舊園 만고일고혼 창송요구원
嶺樹三天老 溪流得石喧 영수삼천노 계류득석훤
山深多虎豹 不夕掩柴門 산심다호표 부석엄시문
천추의 원한을 깊이 품은채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왼쪽 건물에 이곳이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임을 확인하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가 있다. (그림 인터넷에서 따옴)
관음송(觀音松), 천연기념물 제349호.
친구들 일부만 우산을 쓴 채 기년사진 찰칵,
관음송을 지나 망향탑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나무계단을 한참 오르면 이런 돌탑이 있다.
단종이 이곳에 올라 한양을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망향탑’인데, 글쎄 --
망향탑 전망대에서 나무계단을 돌아내려와 ‘노산대’ 쪽으로 가본다.
노산대는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절벽 위에 있는 바위에 올라,
절벽 아래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떠나온 한양을 그리워하던 곳인데,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이 자주 찾던 곳이라 하여 그 바위를 ‘노산대’ 라 명명했다.
노산대에서 망향탑 쪽을 보면, 깎아지른 절벽과 그 아래의 강물이 어우러져
그 경관이 그만인데, 오늘은 비구름에 가려 별로이다.
노산대 바위그림은 인터넷에서 따옴
금표비는 단종께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비석이다. 뒷면에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차후 니생역재당금 숭정구십구년’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이 뜻은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헤당된다. 숭정 99년’이라는 내용으로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청령포를 바라보고 있는 언덕 위에 왕방연 시조비가 세워져 있다.
시조비 위치는 1457년 10월 24일, 단종의 사약을 가지고 행차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다는 곳
관풍헌,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곳.
영월 시내 한복판에 있는 조선 초기의 동헌터로, 유배되던 해 여름에 큰 홍수가 나자,
단종은 이곳 관풍헌(강원도유형문화재 26호)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듬해 이곳에서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현재는 신라 문무왕 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관풍헌 동쪽에는 누각 매죽루가 있는데, 어린 단종이 피를 토하며 운다는 자규(소쩍새)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자규루라고도 불린다. 누각 남쪽에는 ‘매죽루’라는 현판으로, 북쪽에는 ‘자규루’로 되어있다
단종 어제 '자규사'
달밝은 밤 두견새 울제 시름 못 잊어 루 머리에 기대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첫댓글 제천 역사여행
다시 한 번
총정리 하는 참 좋은 재료에 감사드립니다.
역시 문화 해설사와 견주애도 손색이 없으이...
우리 노총장님
바쁘신중 언제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자료를 준비하셨나요? 공직생활에서 얻은 노하우인가요? 둘레길 탐방에서 보여주신 깊이있는 사고들의 연장인가보네요 아뭏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친구들 모두가 도와주셔서 아우라 투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대로 느낀대로 들은대로 정리해봤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동행의 길을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론은 건강입니다. 우리 모두 건강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