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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긴장 속에서 보냈습니다. 여태 이런 경로가 없었다지요? 나라의 심장부를 확실하게 꿰뚫고 지나갔습니다. 그에 비하면 크게 당하지는 않은 듯하여 마음이 놓입니다. 장마 때 당한 것에 비하면 한결 덜 하지요. 그래도 상처는 생겼습니다. 아무튼 금년 여름이 쉽지 않습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태풍은 9월까지도 올 수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같이만 대비하면 잘 지나가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오곡백과 잘 여물도록 햇빛이 잘 비춰주면 좋겠습니다. 풍성한 열매가 있어야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커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가을을 꿈꿉니다. 아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합니다. 이겨내기 한결 수월해질 것입니다.
그 사이 말복도 지나갔습니다. 옛날 같으면 여름 다 갔다 싶겠지만 이 지구가 하도 뜨거워져서 얼마큼 더 연장해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갑니다. 조금 더딜 뿐이지요. 지난 화요일 입추 아침 날씨가 기억납니다. 마치 가을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금방 뜨거운 햇빛에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런 아침을 자주 보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청포도를 굴리며 청사과를 씹으며 가을은 서서히 오고 있습니다. 하기야 기다리거나 말거나 시간은 갑니다. 그러나 따라가지만 말고 끌고 가려면 계획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다시 한 주를 기다립니다. 즐거운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8월 12일 김종우 목사 드림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욥기 26 : 7 - 8)
<더 문>
사람이 어딘가에 홀로 고립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물론 그 고립된 장소가 폐쇄된 곳인지 아니면 열린 공간인지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일단 공포심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존인데 그 첫째 조건이 양식 아니겠습니까? 무엇을 어디서 구해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안전입니다. 어찌 보면 안전이 먼저이겠지요. 죽으면 먹는 것도 소용없으니 말입니다. 주변에 공격해올 대상은 없는지, 위치한 곳이 안전지대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두려움이 커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먹을 것 걱정이 들 것입니다. 먼저 심리적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아마도 생존 본능 때문에 얼마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숨 쉬는데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지구 안에서의 일입니다. 만약 지구 밖 우주에서 고립된다면 우선 산소의 양부터 계산해봐야 합니다. 규모가 큰 우주선을 타고 있다면 자체 생산하기에 걱정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규모 이동선이라면 면밀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먹을 것은 고사하고 일단 산소를 보충할 방법부터 찾아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온도 유지입니다. 햇빛이 없다면 그야말로 영하의 기온일 것입니다. 아무리 우주복을 입고 있다 해도 그 자체 난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열을 어디서 얻겠습니까? 지구 안에서도 남극이나 북극에서 고립된다면 온도 유지는 큰 숙제입니다. 그러나 우주에서는 그 이상일 것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다른 땅은 달입니다. 화성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화성은 거리만 해도 몇 배나 멀리 있습니다. 밤하늘 뒤져봐야 육안으로는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달은 가까이 있고 친근합니다. 그 변해가는 모습으로 시간도 계산합니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달을 쳐다보며 상상과 이야기도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 토끼는 진작 사라졌지만 우리 대부분 즐거운 동화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람이 가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20세기에 드디어 인류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온 세계가 기뻐하며 반겼습니다. 그리고 원대한 우주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달 탐사 작업에 들어갔고 엄청난 자원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이제 본격적으로 우주개발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선 상상의 이야기부터 만들게 되었습니다. 있을 법한 이야기지요. 평이한 이야기보다는 재난을 곁들이면 한결 긴장감과 흥미를 더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꾸며졌습니다. 5년 전의 실패를 딛고 세 사람의 우주인이 다시 달을 향하여 떠납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달을 향하여 순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주선 바깥에서도 작업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양의 흑점 폭발로 태양풍이 불어 닥칩니다. 그리고 우주선 바깥에서 작업하던 대원이 우주에서 객이 됩니다. 우주선 안에 젊은이 혼자 남습니다. 어쩌지요?
포기할 수 없습니다. 희생한 두 사람의 대원들의 품었던 뜻과 5년 전 우주여행의 시도에서 희생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 ‘황선우’ 대원은 홀로 달로 향합니다. 지구에 있는 우주센터에서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첫 시도에서 실패하고 소백산에 묻혀 살고 있는 전임 센터장 ‘김재국’까지 다시 불러들입니다. 전 인력과 기술을 합하여 남은 대원을 구하려 총력을 기울입니다. 일단 달에 무사 착륙합니다. 얼마나 큰 기쁨과 기대를 갖게 합니까? 그러나 위험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법입니다. 중요한 자료들을 채취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유성들이 들이닥칩니다. 마치 포탄을 퍼붓는 듯합니다. 여기저기서 터집니다. 목숨이 간당간당합니다.
가장 문제는 산소의 양과 체온 유지입니다. 위기를 벗어나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남은 동력을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할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지구의 우주센터도 바쁩니다. 그런데 통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돌아올 길이 막막해집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돌아오게 할 우주선도 없으니 말입니다. 천상 달 궤도를 돌고 있는 유인우주선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NASA에서 일하는 유인 달 궤도선 메인 디렉터 ‘윤문영’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과거의 개인적인 관계를 빌미로 압박(?)을 가합니다. 타국에서 온 개인전화까지 받고는 이상한 지시를 내리고 있으니 국가기밀 유출의 의심을 받습니다. 이러저러한 장애물을 딛고 우주선에 연락을 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지구 안에서라면 서로 대치할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 밖에서는 한 인류입니다. 우주에 또 다른 인간은 없습니다. 어쩌면 이 태양계의 유일한 인간, 우주에서 보니 바가지만한 땅덩이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겁니다. 이 안에서나 내꺼 니(네)꺼 따지지 저 널따란 공간에서 싸운다는 것은 의미도 없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살아 귀환합니다. 온 세계가 조마조마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합니다. 한 사람의 사건이지만 온 인류의 꿈을 담은 일이었습니다. 예, 거기까지만 했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네 신파만 빼면 그야말로 특산품입니다. 영상만 봐도 아깝지 않다 싶습니다. 영화 ‘더 문’(The Moon)을 보았습니다.
오해와 이해의 차이
드라마를 한 번 보게 되면 끊기가 어렵습니다. 그날 방송의 마지막 부분은 시청자로 하여금 다음 시간에도 꼭 보도록 만듭니다.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이 그 시간을 기다리게 만들지요. 그렇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잘 사용되는 것이 오해입니다. 오해로 인하여 갈등이 증폭됩니다. 어떻게 풀려나갈까 하는 궁금증이 다음 시간을 기다리게 만듭니다. 오해는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시청자들은 오해임을 알고 드라마 속의 인물들이 그것을 어떻게 풀어갈지 마음을 졸이며 따라갑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혹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생활의 문제로 끝난다면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로 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 자체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요?
똑같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생각들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부활을 믿든 안 믿든 예수님을 대적하는 데는 마음이 일치하였습니다. 제사장 계급이라는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율법 신명기 25장에 기록된 계대결혼을 빙자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남자가 후사가 없이 죽게 되면 그 동생이 그 여자에게 장가들어 낳은 첫 아들을 형의 후사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7형제가 차례대로 다 자식이 없이 여자를 남겨두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매우 합리적인 사고에서 나온 문제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답하십니다. 마 22 :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을 오해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구약성경 신 25장을 빗대어 질문했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해한 것이라 지적해주신 것이지요.
지금도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로 인하여 괜한 것을 이단이라 정죄하고 서로 반목하고 싸우고 결국은 갈라집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듯이 수많은 교파와 교단들이 생겨났습니다. 아직도 서로 자기가 옳다고,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만이 옳다고 고집합니다. 때로는 서로 교류도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탄식이 절로 들립니다. 고전 1 : 11 - 13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하나님 보시기에는 참으로 딱한 일이지요. 한 분 하나님, 한 분 그리스도, 하나의 성경을 가지고 제각각이니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오해하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정표를 잘못 읽으면 엉뚱한 길로 갑니다. 노량진으로 가야 하는데 사당동으로 가는 꼴이 됩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한다면 천국으로 가야 하는데 지옥으로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신앙생활 한다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성경은 그냥 책이 아닙니다. 물론 거룩할 ‘성,’ 글 ‘경’ 해서 ‘거룩한 글’ 곧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구약’과 ‘신약’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지요. 다시 말해서 성경은 ‘언약’ 또는 ‘약속’으로 되어 있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약속(언약)입니다. 약속은 혼자서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쌍방이 있습니다. 누구와 누가 한 약속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해도 생판 모르는 사람과 약속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알기에 약속합니다. 그리고 지킬 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약속합니다. 전혀 지킬 생각도 능력도 없다고 판단되면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지요.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까, 안 지키려고 하는 겁니까? 지키지도 않을 약속은 해서 무엇 합니까? 지킬 것을 기대하고 약속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서 웬만큼은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시 89 : 3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 약속을 하십니다.
하늘 영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하늘에서 쫓겨나 세상을 장악했습니다. 세상이 그의 손아귀에 잡혔습니다. 마귀의 하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 4 : 8 - 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은 그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하시려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창 2 :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비로소 영이 산 자(생령)가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 자리에 두십니다. 그리고 경계하시지요. 언약하시는 겁니다. 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잘 아는 대로 아담은 그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백성도 모두 죄인으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원해 내실 계획과 역사를 펼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역사입니다.
성경을 세계사로 보면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역사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 역사가 있습니다. 국사라고 하지요. 중국에는 중국사가 있고 미국에는 미국사가 있습니다. 각 나라에는 자기 나라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속에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계사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담 이후의 족보를 따라오면 예수님까지 4천 년이 됩니다. 예수님 이후 오늘까지 약 2천 년이 되었으니 인류의 역사가 6천 년밖에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게 과학적으로 말이 됩니까? 그럼에도 아직도 인류의 역사가 6천 년밖에 안된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자기나 무식하면 되었지 왜 하나님을 모욕합니까? 성경을 오해함으로 빚어지는 결과입니다. 성경은 언약이고 약속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약속입니다. 때문에 성경 속의 역사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입니다.
2.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디오 빌라도가 당시 그 지역의 식민지 총독으로써 재판을 주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예수님 죽음의 원인자로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에도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행 2 : 22 - 23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누가 죽였다고 말씀합니까? ‘너희’입니다. 너희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곧 유대인들이고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 백성입니다. 다만 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의 손을 빌렸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는 사형시키는 권리가 없기 때문이었지요. 요 18 : 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그렇습니다. 자기들끼리 죽이기로 이미 작정하였으나 사형권이 없으니 이방인의 법을 빌려다가 사형시킨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서도 증언됩니다. 행 7 : 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설명해줍니다. 행 13 : 27 - 28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을 모르니 이런 기막힐 일을 저지릅니다. 그러면 글을 몰라서 성경을 모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안식일마다 외웠답니다. 수십 번 읽고 외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르면 소용없습니다. 모르면 오해할 수 있고 무식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자행합니다. 죽일 죄를 찾지도 못했는데 이방인에게 죽여달라고 청합니다. 이야말로 살인행위지요. 살전 2 :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합니까?
물론 본디오 빌라도의 죄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원인 제공자는 분명히 본디오 빌라도가 아닙니다. 본래의 살인범이 있고 공범이 있습니다. 어느 쪽의 죄가 무거울까요? 예수님도 이 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밖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입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죽을 죄를 찾지 못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예수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요 19 : 10 - 11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너도 죄가 있으나 나를 넘겨준 자 곧 유대인들의 죄가 더 크다는 말이지요.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죄도 없는 예수를 시기하여 죽이려는구나 하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마 27 : 17 - 18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그래서 갈팡질팡하다가 할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줍니다. 어쩔 수 없이 유대인들 살인극의 보조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살인극의 주인공이 누구이겠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입니까, 유대인들입니까? 누가 뭐라 해도 살인범은 유대인입니다. 마 27 : 24 - 25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우리는 그들의 이 말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그들이 당한 고초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서 당했던 홀로코스트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를 본디오 빌라도가 뒤집어써야 하는 것입니까? 마치 살인자는 내버려두고 살인에 사용된 식칼을 감옥에 넣어두는 꼴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성경을 모르거나 오해하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3. 지구 종말입니다. 예수 재림 때이기도 하지요. 그리스도인들조차 무시무시한 종말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3차 대전이 일어나고 핵전쟁이 일어나서 지구가 박살이 나든지 아니면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져서 박살이 나든지 무시무시한 재앙이 발생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하기는 그렇게 설교하는 목자들도 있습니다. 성도들을 겁주어서 뭐 하려고요? 성경을 전혀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입니까, 우리의 영혼입니까? 이 답은 잘들 알고 있습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럼에도 성경을 오해합니다. 왜요?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 29 :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선지자나 선견자는 오늘날로 말한다면 목자들이지요.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감기셨습니다. 성경을 본다 한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자기들 나름대로 연구를 하고 짜 맞출 수밖에 없지요. 그 결과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고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종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마 24 : 6 - 8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전쟁 기근 지진 등 지구가 몸살을 앓게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29 - 30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하늘에서 엄청난 재앙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별이 하나만 떨어져도 지구가 남아있지 않을 텐데 별들이 떨어진답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당하고도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과연 그런 일인가 되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이니까 일호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런 오해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하신 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백성입니다. 마 1 :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방인은 그 다음입니다. 우선 하나님 백성을 살려야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아담에게 당부하신 말씀도 그것입니다.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백성이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그 다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우선 그 영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영을 살리는 이야기이지 육이 아닙니다. 영이 살아야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영의 이야기를 육의 이야기로 들으니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성경이 무슨 책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막연히 ‘하나님 말씀’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언약서’라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약속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속은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말씀으로 하셨지만 모세 때 와서 성문화해주셨습니다. 모세는 그 전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을 창세기에 약술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사건들은 사실 모세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정리해주신 것이지요. 소위 하나님 백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역사로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오해가 생겼겠습니까? 반세기 전 처음 신앙하면서 성경을 읽고 배웠는데 고민이 참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니 믿기는 해야 하겠는데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의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얼마나 편해집니까. 더구나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말씀은 영이지 육이 아니다 하신 것이 마음에 찔렸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 : 12)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데 온통 육체들의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무식하게 오해하고 있었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목자들이 있습니다. 기가 찰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탄식이 귀에 쟁쟁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 4 : 6) 누가 망합니까? 이방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왜 망합니까?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 세상 지식이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을 배워도, 알아도 올바르게 배워야 하고 바르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은 한 마디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얻어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천국 가는 길, 그래서 영생을 얻는 길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길을 올바로 알고 찾아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데로 갈 것입니다. 단순한 엉뚱한 길이 아니라 바로 지옥길입니다. 무식해서도 안 되고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르게 배워서 깨달아 이해하고 믿는 것과 오해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좀 과한 말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목자가 바르게 증거하고 있는지 늘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목자를 핑계 삼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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