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어두운 집
배정숙
뒤란을 둘러친 흙담이 나지막하여 호박살구나무가 자꾸 바깥세상으로 손을 뻗는 집
장광의 배불뚝이 항아리에 장물이 봄볕에 짓 닳던 집
까맣게 그을은 아궁이 이맛독을 고운 매흙으로 정성껏 맥질하던 풋감 같은 큰언니나
탱탱한 가지 몇 개 동동 떠 있는 물두멍이나
착한 밥사발들이 공손히 엎드려 공양기도 올리는 살강이나
삼베 보자기 덮어 천장에 걸어둔 보리쌀 곱삶이 밥바구니나
다른 세상의 물정에는 다 어두운 부엌 속이었다
장마철 천금 같은 햇볕에 보릿짚 널어 말릴 때면 곰팡냄새 가득 날리던 마당이나
팔월염천 바치고 선 바지랑대가 소나기구름을 찔러 갑작스런 장대비가 다녀가시곤 하던 그 여름이나
바쳐놓은 푸작나무지게 갈잎 위로 생리혈처럼 번지던 칠월의 북새*이거나
혈관 속으로 연년이 맑게 흘러 가을 하늘에 닿았다
저녁마실 건너오신 음산 선호아저씨가 북통같은 방 등잔불 밑에 바투앉아 장화홍련뎐 배비장뎐을 목청 다듬어 읽어 주시는 보름날 밤
잿간 지붕 위에서 숨죽여 듣고 있던 박꽃이 댓돌 위 가지런한 고무신을 주고 보름달을 바꾸어 오는 셈이 어두웠던 집
대청마루 가득 찰그락 찰그락 어머니의 칠승 모시 짜는 소리나
사랑채 여물솥에서 구시렁구시렁 끓던 쇠죽을 푸던 아버지나
쑥 태우는 모깃불 연기 속으로 방방 뛰어다니던 나와 언니들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게딱지만한 그 저녁이나
* 노을의 방언으로 하늘이 붉게 물드는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