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사는 "크리스 마스" 씨즌만되면 아직도(59년전) 첫사랑의 그 장면이 쌩쌩히 떠 오르며 할일(?)이 바빠진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처음보는 사람이다.
전기불이 나가고 촛불을 들고 찬양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천사가 따로 없었다.
바로 흰까운을 입은 ”白衣의 天使“였다.
(홍하사 "첫사랑 이야기" 에서 부분 퍼옴)
"사랑은 永遠한 幻影속에서만 아름답게 살아있다. 永遠한 神秘는 永遠한 사랑을 約束한다."
---金來成 先生의 "愛人" 에서
(여기까지가 1편이다. #10609 "홍하사의 잡다한 이야기"---(1116) (인생 이야기)---(42)홍하사의 '첫사랑 이야기')
모든 예배순서가 끝나고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되었다.
순서대로 그녀가 일어났다.
"KSH”- K여중 2학년 재학중 취---취미의 취자만 쓴걸로 봐서
시간에 무척 쫓기었던가 보다.
이름만 알아도 된 것이다.
수건 돌리길 하는 도중 아까부터 눈여겨 두었던 종이 쪽지를
얼핏 내 손아귀로 오게 만들었다. 아하! K가 아니고 O씨 였구나!
"OSH-K여중 2학년 재학중 취---” 이 쪽지를 갖음이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이틀후인 27일 날 이었다.
설렘을 안고 혹시나 하고 우연히 교회앞을 지나는데 육중한 철문 옆 작은 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와 맞닥뜨린 순간 살짝 비껴선 그녀가 빠알간 벙어리 장갑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미소 짓던 순간
난 쇠뭉치로 뒷통수를 얻어 맞은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래! 바로 이 소녀야 .내가 찾던 사람이---앞으로 영원히 사랑 하기로 맘 먹었다.
그녀는 대체 나를 아는가 모르는가? 아님 왜 아는체를 했을까?
그 후부터 난 세상살이가 즐거웠다.
힘들었던 철공소 생활에도 그녀만 생각으면 고단하지가 않았고,
괴로움이 있어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행복 했었다.
그때부터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에게 매일매일 보고하던 일기가 그녀에게로 향한
그리움의 편지로 바뀌어졌다.
그 후부터 2년 동안 나는 나만의 가슴앓이의 짝사랑을 하게된 것이다.
그녀조차도 아무도 몰라주는 나만의 짝사랑였지만 난 생각는것 자체가 얼마나 즐거웠고
인생의 환희와 행복에 도취됐는지 모른다.
맘속엔 언제나 앉으나 서나, 언제 어디서나 난 그녀와 함께 밥을 먹었고
영화 볼때도 언제나 동행했고 잠도 함께 잤고, 그녀와 함께 행동했다.
실로 아름답던 척애였다.
그녀가 T여고 1학년이 된 1966년
친구들로 부터 아무런 직책을 씌우지 않기로 다짐을 받은후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되었고
친구들의 요청에 의해 찬양대만 함께하기로 했으나 차츰 학생회를 다시 나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대학입시 공불하느라 입시준빌 않는 내게 학생횔 맡아달라고 했다.
3학년 2학기엔 회장선거 및 임원선거가 있게 되었는데 그런데 뜻밖의 일들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남자 임원인 회장엔 P와 총무엔 후배인 김장로님의 아들인 K가 무난히 뽑혔으나
친구 한넘이 처음 약속을 깨고 나를 그만 서기로 추천하여 그대로 되고 말았다.
또한 부회장엔 예상을 깨고 1학년인 그녀가 뽑히고 말았다.
나도 2년전 2학년으로써 중등부 회장을 2년간씩이나 맡은게 대단했지만
그녀는 1학년생으로 부회장이 된다는데는 남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가 있었음은
부인할수 없으며 미모가 한 몫을 차지 한것도 기정 사실이다.
그녀는 평소의 패려웠던 성격답게 부회장이 되는순간 문을 박차고 나가버려
몇주째 나오질 않았다. 나중에 안 얘기였지만 표면상으로는 많은 언니들이 있는데
하급생인 그녀가 어떻게 부회장직을 맡을수 있느냐였지만
내가 서기가 아니고 회장이 되었다면 하는 눈치였었다.
우리들의 사전 조율을 모르고 내가 안할려다 억지로 맡은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모든 남학생들이 그녀에게 피를 봤다는 얘기다.
그런데---그 패려웠던 성격도,피를보여 준것도 그녀가 정을 붙힐곳이 없다고 나는 여겼다.
다시 말해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로 해석했는데 얼마안되어
바로 사실로 나타났다. 또한 온순한 양으로 만든게 ---그게 바로 나였다니---
까다로운 성격과 유난히도 자존심이 강했던 그녀가 봄눈 녹듯 사르르 녹으며
열심히 교회에 봉사 하는것 이라던지 내게 뜻밖에 사랑을 고백한것은
나로썬 또다른 고민이 아닐수 없었다.
따라서 1966년 9월부터 이듬해
입대하기(1967년 6월)전까지의 약 십개월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정의 행복한 시절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녀보담 2년전 부터
먼저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녀를 내가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알려줄 수 있을까를 걱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입대하기전 거의 너댓달을 두고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일기를 아무도 모르게 그녀에게 주기로 말이다.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당시 난 섬유공장의 사환으로 일하게 되었을적 이었는데
밤에 현장에선 야간 작업을 하기에 사무실에서
항시 일기를 다시 옮겨 썼다.
그리고 두어달의 정성들여 쓴걸 상업은행 돈 봉투에 넣어 갖고 다녔었다.
그러나 좀체 기회가 오질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교회의 목사님 이하 모든 어른들에게 내가 가장 깨끗하게
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누굴 좋아하고 누구는 누구와 함께 영화를 자주 보러 가는둥,
어떤이는 누굴 집에 찾아갔다는둥---상당히 난잡 하였던바
유독 서기인 나만은 모든이에게 인정을 받았기에 더욱 배신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더 일찍이 나쁜넘이었는데도 표현만 안했지---점점 초조해 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누굴 통해 그녀에게 알린다는건 참을수 없는 모욕이며
자존심이 허락질 않았다. 군에 가기전에 목사님이 나를위해 특별예배를 마련해 주셨고
기어코 그녀에게로의 향한 내마음의 비밀을 알리지도 못한채 입대하고야 말았다.
내일이 입대일, 오늘 저녁에 도저히 방법이 없어 친한 친구에게 대신 전해 달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 본인에게 전해달라며 신신당불 하면서 논산행 열차를 탔었다.
그러나 한달 후 친구로 부터의 편지에 의하면 그녀에게 주려고 집앞에서 불러 내었지만
외삼촌이 나와서 전해줄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외삼촌은 특히 나를 믿고 인정해 주셨던 우리학생회의 교사였던 것이다.
난 지금도 그녀가 내 편질(일기장) 읽었는지? 아니면 영원히 안받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전화 한,두 통화면 그녀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수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원치않는다.
어디까지나 “첫 사랑은 이루는것 보다 간직하는 것”이라고 믿고있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난 그 험난했던 68년의 울진,삼척 무장공비가 나타나서
하루 9시간씩 밥도 거른채 추운 겨울에 보초를 잘 섬도,
월남의 그 어렵던 쟝글 타던 시절도 그녀를 생각으며 잘 참아 내었다.
그날그날의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으며 한장 한장 일기장을 넘기며 반추함으로
아름답던 추억을 되살린다.
앞으로 십년 후,
이맘때 오늘쯤은 이 사연이
아마 책으로 만들어지질 않을까 여겨진다.
어느누군 내게 말한다.
그렇게도 어렵게 어린시절을 보냈다면
지금은 더욱 악착같이 벌어
수전노처럼 살아야 하는게 아닌가라고---
그러나 난 그녀를 알고 난 후부터
내 꿈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목표가 분명해졌다.
사랑의 힘은 정말로 위대하다.
홍하사가 좋아하는 독일가수 "헬렌 피셔" 의 '사랑의 힘'(The Power Of Love)을 들어보십시다.
---계속---
첫댓글 이제야 말할 수 있다.그녀는 경북여중 2학년 '오상희' 였으며 2년후엔 대구여고를~
그리고 당시 학생회를 맡었던 외삼촌은 하순직선생님이셨고 그녀의 오빠는 오상호로 나완
같은 나이로 나중에 친구(?)가 되었는데 장기둔적도 있었으며 나보고 상당한 고수라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