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주동기가 카톡에 올린글.. 한번읽고 사라지기엔 아까운 글이기에 옮겨 놓습니다..
"논쟁이 길어진다면 그것은 쌍방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볼테르(Voltaire)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프랑수아 마리 아우레(Francois-Marie Arouet)가 한 말이다.
이는 우리가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주제로 심력을 소모하는 것을 안타까워 한 말이라고 본다.
오늘은 우리 방의 두 시인이 다루었던 허수아비를 주제로 한 어느 고승(高僧)의 얘기 한 토막을 전해 볼까 싶다.
일견(一犬)이 호폐(嘷吠)하니 만견(萬犬)이 전실(傳實)이다.
개 한 마리가 달그림자에 놀라 짖으니 온 동네 개들이 도둑이 든줄 알고 따라서 짖는다.
이는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남의 말만 듣고 부하뇌동하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럼 직접 보면 그 즉시 진위를 가려낼수 있을까?
枯草弊衣化作人(고초폐의화작인)하니
野禽山獸總疑眞(야금산수총의진)이로다.
마른 풀과 헤진 옷으로 허수아비를 만드니
들새와 산짐승이 사람인줄 안다.
荒年險世無憂客(황년험세무우객)이요
戰國徵兵漏籍民(전국징병루적민)이로다.
허수아비는 흉년이 들거나 험한 세상에도 근심이 없는 손님이요
전쟁이 나서 병사를 부를 때도 호적에서 빠진 백성이라 징병이 되지 않는다.
態勢長時終似舞(태세장시종사무)하고
形容深夜更生新(형용심야갱생신)이로다.
태도와 자세는 오랜 시간 춤을 추는 것 같고
형상과 용모는 깊은 밤이 지나면 다시 새로워진다.
家牛有力兼明眼(가우유력겸명안)하여
直入田中喫偶身(직입전중끽우신)이로다.
집에서 키우는 소는 힘이 있고 눈도 밝아
곧바로 밭으로 들어가서 허수아비를 뜯어 먹는다.
산이나 들에서 자란 짐승은 허수아비를 본 적이 없기에 직접 눈으로 봐도 착각에 빠질수 있지만 집에서 키우는 소는 이미 알고 있기에 바로 알아채고 속지 않는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험과 학습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을 바라보는 안목이 길러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럼 경험과 학습을 거치고 나면 누구나 그 즉시 진위를 가려낼수 있을까?
한로축괴(漢獹逐塊) 사자교인(獅子咬人)이라는 속담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에 한로(韓獹)라는 두뇌가 명석한 개가 있었다고 한다.
한로(韓獹)는 사람들이 고깃덩이를 던지면 달려가서 받아먹곤 했다.
그런데 누군가 흙덩이를 던져도 쫒아가게 되니 여기에서 한로축괴(韓獹逐塊)라는 말이 생겼다.
이는 익숙한 경험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반면 사자(獅子)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물어버린다.
여기에서 사자교인(獅子咬人)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는 문제의 본질을 바르게 볼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흔히들 하는 말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바라보라"고 하는 얘기가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멀리 있는 달은 보지 않고 가까이 있는 손가락만 보는 데서 나온 말이리라.
요즘은 어딜 가더라도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을 많이 겪어보게 된다.
아마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것이 쌓이고 쌓여 겉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리라.
마음이 이런 상태가 되면 멀리 바라보고자 하는 여유를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때때로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산을 오르거나 물을 즐겨 찾곤 한다.
산 위에 서서 가슴을 열어 젖히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면 쌓인 화도 가라앉게 되고 마음의 여유도 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요 지자요수(智者樂水)라는 속담을 돌이켜 보니 인자무적(仁者無敵)이 어찌 생겨난 것인지 알 것도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가 보다.
아마도 멀리 바라보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