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가牧歌
글보라
우듬지에 걸터앉은 구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소슬소슬 부딪히는 자장가 소리
눈썹에 걸린 자장가 들으며 깜박 잠들고 나면
외롭거나 슬프거나 아픈 그 모든 일이 치유된다
마음에 냉기가 스미면
숲속으로 가 숲을 귀에 꽂고
나무의 노래를 듣는다
노랫가락을 잘라다
솜털구름 포근히 감싸 안고
소슬소슬 불러주는 평온
살그머니 불을 끄는 숲
밤새 꿈속에서 들은 노래는
네이버 메일 앱에서 보낸 목가였다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이서빈 외, {길이의 슬픔}에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아름다운 대자연의 시골에서 살고 싶은가, 아니면 대도시에서 살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요즈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도시에는 학교와 병원과 백화점과 수많은 영화관과 모든 문화시설이 아주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나 아주 넓고 푸른 대자연의 주거 환경 속에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초고층의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의 대답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의 행복은 주거환경에 의해서 결정되고, 따라서 대부분이 매우 쾌적하고 넓은 대자연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온갖 문화시설이 아주 잘 갖추어진 대도시에서 살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아름답고 쾌적한 전원도시에서 살고 싶어한다. 대한민국은 남북분단에서 보듯이 매우 기형적인 나라이며, 이것은 도시와 시골의 주거환경에서도 사실 그대로 나타난다. 아름다운 대자연의 시골 마을은 대부분이 다 텅텅 비어가고, 아주 작은 수도권 지역에만 전체 인구의 50%가 모여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대한민국의 불행은 주거환경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골마을은 공동화되어가고 있는 반면에, 수도권 전체가 마치 개사육장과도 같기 때문이다. 전국토의 그 좁은 지역에 전체 인구의 50%가 살고 있으니, 자그만 층간 소음과 몸 부딪힘에도 살인이 일어나고, 전, 월세와 주택문제로 날이면 날마다 소송전을 벌이며, 수많은 개들처럼 으르렁거리며 살아간다.
어느 독일의 시골 마을은 전체 인구가 3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이 자그만 시골 마을에 세계적인 독일 연구소가 3백여 개나 있다고 한다. 그 고장의 사람들에게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와도 같은 대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절대로 그 시골 마을을 떠나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하기 때문에 사교육비가 하나도 들지 않고 주거환경이 너무나도 쾌적하고 즐겁기 때문이었다.
“우듬지에 걸터앉은 구름”처럼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소슬소슬 부딪히는 자장가 소리”에 “외롭거나 슬프거나 아픈 그 모든 일이 치유된다.” “마음에 냉기가 스미면/ 숲속으로 가 숲을 귀에 꽂고/ 나무의 노래를 듣는다.” “노랫가락을 잘라다/ 솜털구름 포근히 감싸 안고/ 소슬소슬 불러주는 평온/ 살그머니 불을 끄는” 글보라 시인의 [목가牧歌]에서처럼 모든 불쾌지수가 사라지고, 전인류의 소망인 행복지수가 무한대로 상승한다.
호머의 시집을 늘 옆에 두고 살았던 알렉산더대왕이나 나폴레옹황제는 그야말로 독서광이었고, 그들이 대한민국의 황제가 되었다면 벌써 미군철수시키고, 중국마저도 식민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칸트와 헤겔과 니체 등은 전인류의 스승들이었고, 그들이 우리 대한민국의 학자들이었다면 전국토를 아주 균형있게 만들었을 것이고, 독서중심의 글쓰기교육으로 해마다 노벨상을 타게 만들고, 주택과 땅값 문제로 그 어떤 싸움도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숲속에서 산새 소리를 들으며, ‘너와 내’가 진정한 ‘우리’로서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글보라 시인의 [목가牧歌]는 자연예찬의 시이자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의 노래’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