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을 다녀온 후
“엄마, 나 시집 안가면 안되까?”
“아니 왜야, 날도 받고 청첩장도 다 돌렸는디. 니가 좋다고
해놓고 파혼하믄 쓰것냐 이 소가지(속알머리) 없는것아,”
“집도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집은 없겄데, 부엌으로 안방
들어 갈 때는 몰랐는디 마빡(이마) 찧게 생겼고 마당은
내 넓덕지만큼(엉덩이) 밖에 않해?”
“잘살고 못사는 것은 니 분복이다. 연분은 연분인께 그런
소리 허지마라.마대댁 봐라 삼현육각 짚고 시집 왔어도
빌어 묵드라.”
그 때 살이 없었던 나는 혼인날을 받아놓고 고민에 차
없던 살이 쑥쑥 빠져 피골이 상접해 버렸다.
어머니는 말라가는 나를 보며 걱정을 하시며
“혼인은 미닥거려야(빨리) 허는 것인디 날짜가 길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되고 먹는대로 그냥 나와 버렸다.
그 때 난생처음 아니 아직까지도 보약을 안 먹고 살았는데
보약을 들이댔다.
남편은 내게 제안을 했다.
“내 폐물은 허지 마시오. 대신 우리 어머니 냉장고나
사주시오, 난 거추장스러운 게 딱 질색이오.”
혼인을 하기로 한 이상 난 삼종지도를 따랐다.
남편의 반지를 생략하고
시어머니께 냉장고 가스렌지와 압력솥 짤순이까지 해드렸다.
식을 올리고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다녀 온 남편은 반지하
단칸전세방 얻을 때 100만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부모님과 오빠들이 부담을 했으므로 나는 단칸방 하나를
얻을 수 있을만큼의 지참금을 쥐고 있었으므로 빚을 갚고
남은 돈은 지인에게 빚을 놓아 삼부로 챙기고 지인의 소개로
직장을 다녔다.
남편은 내게 말을 했다.
“우리 죽을 때까지 애 낳지 말고 단 둘이 삽시다.”
“예?지금 시방 멋이라고 했소, 단둘이 살자고롸,
선 볼 때 말하지 그랬소.”
“그럼 시기를 늦춥시다.”
난 남편이 사육하는 대로 한 마리 양이 되어갔다.
남편 몰래 밤이면 뭐가 그렇게 서러워 울었다.
자신이 바보스럽고 내 의지는 없어지고 그래도 난 밖에
나가면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나타나니 누가 내
고민을 알겠는가?
87년 4월에 혼인을 하고 농협에서 내 놓은 농어가목돈
마련저축이 금융권에서 이율이 제일 높은 것을 알고
남편과 상의해서 상품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시골 사람들의
명의를 빌려 계좌당 6만원 9구좌를 넣었다.
그 상품은 공모주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있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돈을 버는 재미도 솔솔했다.
2년만에 아들도 출산을 하고 3년 만기가 되니 시부모님
땅을 사서 집을 지어 달라고 요구 하시니 남편 왈
“지어 드리세, 그래야 자네가 편해 할머니 장흥유지 딸이
삼현육각 짚고 시집 오셨는데 남의 집에서 가시게 할 수는
없네.” (할머니의 고모부는 유명한 일제 강점기의 재벌
현준호씨가 고모부이시다)
“그럼 그렇게 해”
그래서 동네 입구에 350평 땅을 구입해 집을 지어 드리니
새집에 구색이 안 맞는다며 텔레비전 장롱등을 사드렸다.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며 그야말로 동동 떠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다시 15구좌를 구좌 당 6만원으로 5년 만기로
저축해 나갔다.
공모주해서 남은 돈이 저축을 하고도 남은 돈이 되었다.
공모주 심부름을 아버님이 하셨는데 주식을 투자 하시고
유흥비로 그야말로 젊은 호기가 다시 살아나 탕진을 하셨다.
한 푼도 나는 만져 보지도 못하고 아버님 빚 갚는데 고스란히
바치고 말았다.
내가 움켜쥐고 한 공모주와 주식 투자가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다시는 저축을 시골에 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도 아버님은
우릴 믿고 개인 빚이며 농협 빚을 빌려 탕진을 하셨고
돈 쓸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수금하러 올려 보내셨다.
어머니 허리수술 관절수술비가 1000만원이 들어도 부담
없이 해주니 아버님은 기세가 더 등등 해졌다.
세 번에 걸친 아버님 빚과 집 지어 드린 돈을 합치면 글쎄
난 계산을 하지 않는다.
IMF가 힘들었다고 했지만 더 많은 돈을 벌었다.
헐어빠진 가방에 현금 다발과 수표다발을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삼성동으로 잠실로 송파로 가락동에 있는 각
증권회사를 다니며 공모주는 물론 전환사채 높은 정부사채
회사채를 하고 주식을 하면 다 먹혀 들어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생각이 되어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하고 부동산으로 돌립시다. 집 한 채라도 사야
되지 않겠소, 우리 늙으면 세라도 받아먹어야 될 것 아니요.”
“부동산 버블이네 버블”
하며 펀드에 가입 하고 그 좋던 호시절이 내리막길을
치달아도 남편은 시루에 물을 주고 않할거야를 반복해도
계속 하는 바람에 곤두박질을 쳤다.
송파에 대출 없이 빚 안지고도 살 수 있었던 3~4체 값의
돈들은 산산이 부서지고 휴지조각이 되었다.
남편은 내리막길 5년을 술로 노래방을 전전하며 살았어도
편드에 넣은 300은 매달 나와 생활 하기는 괜찮았는데 작년
초부터 그 돈마저 끊어지니 남편은 신혼 때의 의지를 살려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당신 노래방 다닐 때가 좋았지, 당신은 술로
달랜다지만 달래 집디요? .나는 뭘로 달랬을까?”
친정 부모님이 가시고 내 마음은 허전하고 그러다 찾은 곳이
이 싸이트였고 나는 내 꿈같은 시절을 소리로 달랬다.
슬프면 눈물이 나고 즐거움이 있으면 흥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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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정 어머님이 돌아 가셨군요. ㅠㅠ 아까운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