他人들! 작사: 신봉승, 작곡: 박춘석, 노래: 문주란
1. 당신과 나는 남남으로 만났다가 상처만 남겨놓고 남남으로 돌아섰다.
호수에 백조처럼 내가 가는데 사랑을 막아놓고 발길을 묶어놓고
진종일 진종일 비가 내린다.
2. 당신과 나는 남남으로 만났다가 마음만 주고 받고 남남으로 돌아섰다.
흐르는 구름처럼 내가 가는데 발길을 묶이고 사랑은 막혔어도
백조는 목이메어 울지 못한다.
그녀의 집은 기와공장과 닭을 수백마리나 키우는 부유한 집안의 둘째로, 아주 부잣집 딸이었다. 과수원도 갖고있는 근처에선 상당한 갑부였으며 교회서도 집사지만 상당한 끗발(?)이 있는 집안이었다. 근처에 "아시아공업사" 라는 농기구 만드는 공장이있고 내가 비오는 날이면 항상 그집 근처에서 "그 집앞" 노랠 부르며 한없이 배회를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의 추억이 어린
"칠성종합운동장" 과 "역후파출소" "동대구서" "칠성시장" 등 수많은 추억이 서린곳이다.
지금도 그 코스의 버스 노선(당시 11번)이 있는지 모르겠다. 학생회의 친목회는 거의 그녀댁에서 하곤했는데 그 이유는 안채와 떨어진 그녀 방에는 우리가 놀 수 있을만큼 방이 크고 넉넉했다. 당시 빵집(한개에 오백원짜리 단팥빵)을 대신동 어디가면 '삼송빵' 이 세개에 천원했다. 하루는 그녀집에서 역시 친목회를 하는데 시간없어 참석못한다는 나의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너무 실망하는듯해서 회사일을 대충끝내고 학교를 지각하는 한이있어도 참석한 바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당시 홍하사는 야간학교 다님으로 그들의 하교시간에 등교하는 시간이 되었다. 한번은 그녀의 방 피아노 뒷편 책꽂이에서
아무도 몰래 노트에서 필기한 한장을 뜯어 내주머니에 넣고 오래도록 책갈피에 두고 고이간직하였다. 그처럼 난 그녀와 가까이 하고싶은 10개월간의 시절이었다. 우린 친목회 모임에선 학생들이 부르는 명곡을 제치고 당시('66년 한창 유행하던 MBC 드라마 연속극) "타인들" 노랠 그녀가 불렀는데 왜 2절을 함께부를 용기가 없었는지 평생의 한이되었다.(난 '은방울 姉妹'의 "삼천포
아가씨" 를 불렀다)
홍하사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당시도 기도할적에는 서툴러서 종이에 적어 읽곤했다. 한번은 내가 한창 기도하는데 그녀가 눈을떠 나를 쳐다보고있었다. 당시 난 어린마음에서 그저 글속에서 "미사여구" 등을 많이 넣으면 훌륭한 기도가 되는줄알고 좋은 문구를 많이 활용하곤했다. 또한 대예배시엔 가끔 "학생회" 예배로 어른들과 함께 예배를 보는데 서기인 내가 이름을 한명한명 부르면 대답하면서 성경을 한구절을 의무적으로 암송하는데 난 그기회에 암기력을 자랑하고파 "고린도전서 13장"을 몽땅외워 어른들을 놀라게 한적이있었다. 당시엔 머리가 꽤 발달된 편으로 유행가 2,3절은 물론 찬송가도 4절(어떤 찬송은 8절)까지 거의 다 외웠다.
또한 그녀의 오빠가 나완 후일에 믿음을 가진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녀와 가까이 지내려 주위를 살펴보니 오빠가 있어 그걸 구실로 친하게 지낸것도 아니고 오빠를 먼저 알고 여동생이 있어 친해진것도 아닌 서로서로 따로 만나 알고 지내다 보니 그들은 바로 남매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물론 그녀의 외삼촌 이었던 하순직반사님도 마찬가지고 늘 함께 저녁예배 손잡고 나오던 엄마(하순주집사)랑 나온 그녀의 모습(교복입은 모습에서 샌달신은 화사란 사복의)은 너무나 청초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지금도 억울하고 원통한게 있다면 그녀와 한팀이 되어 무적을 자랑하던 학생회 탁구대회(물론 당시 친구 이재갑과 부회장이었던 장경자의 복식팀)의 '우승' 할때의 환희는 잊을수 없다. 거의 불가능을 우린 팀워크로 이겼으니까. 그레서 항시 손안에서 갖고
놀았던 귤(미깡 종류-당시엔 구경조차 힘들었던 그리고 양키시장 에서나 볼수 있었던)을 까서 내게 주었을시도 난 받질 않았다.
오로지 날 위해 깠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어렵게 자존심을 버리고 사랑을 고백(?)했는데도 일축하고 무시해 버렸으니 말이다.
실은 난 그보다 더 2년전 부터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일기장에 수없이 오르내리던 그녀 이름이 아니었는가? ---피엉신,
바아보--- (당시 서울올라와 서대문 전축공장에 취직되었으나 일주일만에 부도가 나 동소문동의 사촌누님댁서 조카들 공부가르칠 그 당시)였다. 당시 입대하루전 그렇게 신신 당부 하던 두 친구(윤형주,이성철)에게서 실망스런 편질받고선 영영 안 만나려고 맘 먹었다. 선물 교환비를 대신 내어 주겠다던 그 친구(윤형주)는 그도 그녀를 좋아했노라고 내게 고백을 함께 했다.다만 지금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66년 상경,돈암동(동소문동 - 전차가 다님)서 조카들 공부가르칠때)모표는 大邱聖光高, 뺏지는 大新中)
참으로 세상산 알다가도 모르겠다. 당시 대구칠성교회의 우리 권신찬목사님 이름이 훗날 "오대양집단자살사건"(1987년 8월 29일)과 연류되었다는 것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 "세모"라는 기업체, "구원파" 라는 이름, 미국으로 집단 이주 또한 저의 당시 친구 한두명이 그곳서 목회자를 한다는 것 등등---당시의 목사파들이 모두 나중에 그렇게 됐다는 말인가? 하여간 내가 떠나온지 오래여서 잘은 모르나 추측이 가능하다.
후일 그녀가 서울의 명문대(숙명여대 성악과)에 들어갔다는 소릴 풍문에 어렴풋이 듣고 홍하사는 월남을 지원했다. 지금은 그녀의 아들이 또 다른 편지를 전해주기로 나와 약속했던 친구(이성철)의 아들이 서울대엘 들어갔다고 바람결에 들었다. 꼭 40주년이 되는 어제(24일) 끝내려는 강박감에 글이 더 엉망이 되었는데도 편집을 잘해주신 진사님덕에 졸필이 칭찬을 받게되어 감사하다.
또한 권 태준님, 권 기주님 그리고 최 성영님의 걱정 하신 와이프의 문제는 염려 안 하셔도 된다. 꽤 오래전에 "첫 사랑" 얘길
해 주었기에 말이다. 그녀는 질투는 커녕 어쩜! 어쩜 하면서 세상엔 그런 사랑도 있을까? 하면서 너무나도 순수하고 긴 사연
(이야기하면서 내자신이 울어버렸는데)에 그녀도 함께 울어주었다. 그 후론 와이프의 깨끗한 마음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 https://play-tv.kakao.com/embed/player/cliplink/rvsh067q09glxvpds082bgqn6@my?service=player_share
첫댓글 "Bee Gee" 의 "Don't Forget to Remember" 은 1975년 발매된 앨범 "Main course" 의 세번째
싱글로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한 곡입니다. 이 곡은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발라드곡으로,떠난
연인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레서 홍하사는 더욱 이노래를 좋아하는~
당시의 "他人들" 이라는 이노래가 마치 우리들 관계를 가사내용 처럼 "남남으로 만났다고 상처만 남겨
놓고 남남으로 돌아섰다." 는 것으로 암시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또 Bee Gee의 "Don't For-
get to Remenber" 처럼 그녀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일생동안 잊혀지지않고 글로써 적절하게 표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