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과세문안(過歲問安)
과세문안(過歲問安)
내 가슴속에는 소용돌이치는 바다가 살고 있었다
고향집 뒷동산에 올라 바다를 보면 누군가 장막을 열었다
감추는 것처럼 기묘한 풍경을 드러냈다.
먼 섬 모래톱에서부터 밀려오던 바닷물이 세상을 삼킬 듯이 차오르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앙상하고도 질펀한 갯벌의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충만하게 차오르는 절정이었다가 통곡처럼 빠져나 가버리는 그 허망한 무엇은
끝없이 윤회하는 생명의 시간표를 가르쳐 주는 듯했다.
한 줌도 움켜줄 수 없는 바닷물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도착하는 인생의 종착역, 그곳에는 절벽 같은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
1926년 병인생으로 아흔여섯에 이르신 장모님이
신축년 십이월 열이틀 새벽, 우리집에서 소천하셨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시고 만고풍상을 다 겪으셨으나
늘 봄바람같이 자애로우셨던 분이셨다.
온 집안이 반대하던 막내딸의 결혼을 허락했고
장인어른의 사업실패로 막내딸을 챙기지 못했다고
30여년을 한결같이 반찬 보따리를 챙겨오시더니
장롱이며 옷장 속에 당신의 용돈을 숨겨두고 가시더니
생애의 마지막은 당신 소원처럼 정든 딸내미집에서 가신 것이다.
임종 3개월 전에 발견한 췌장암 말기로 소진해 가시던 정신과 육체,
누구나 감당해야 할 생명의 실상을 지켜본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마약성 진통제에 의지하였으나
그 흔한 요양병원이나 중환자실에 의탁하지 않고
배냇저고리를 갈아 입히시던 어머니의 손길 그대로
자식들이 나서 정성껏 보살폈으니 복인 중에 복인이었고,
자식된 도리를 다한 훈훈한 모습이었다.
준비된 시간, 수없이 주고받은 이별의식 있었기에
장례식장에는 형제간들의 따뜻한 추억이 흘러넘쳤다.
그리고 봄날처럼 햇살이 따사로운 날에 황금빛 수의를 입고
그토록 당신이 그리워하신 이녁 곁에 몸을 누이셨다.
그 후 우리 집에는 선물 같은 일들이 찾아왔다.
진로를 고민하던 큰아들이 훌훌 털고
둘째 처남의 건축사무소에 출근하게 되었고
명함 갖기를 그리 소원하던 아내는
막내 처남이 운영하는 회사의 도움을 받아 쇼핑몰을 해보겠다고 하고
둘째 아들은 신라호텔에서 근무한 사촌형과 의기투합해
본격적으로 무심재클럽을 이어가겠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삼우제를 지낸 후 막내딸 꿈속에 찾아온 장모님이
이른 아침 문을 열고 현관에 선물 보따리를 가득 내려놓았다는
꿈 이야기처럼 화사한 일들이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밀린 숙제 같은 질문지를 받아들고
고향집으로 내려가 한동안 두문분출했다.
오래전에 간척지로 변한 바다는 텅빈 경작지로 누워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잿물처럼 일어나는 바닷물이 가득 차올랐다.
여름철이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동무들과 함께
그 바다에서 짱뚱어새끼들처럼 뛰어놀았다.
더러 어른들을 따라 목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밤을 새우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밤하늘은 두려울 정도로 깊고 넓은 세계였다.
그러나 이제는 실재하는 것들이 아닌 추억 속의 풍경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나도 갑년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작은 돛단배 하나가 거칠고 망망한 해협을 항해하다
지친 나그네가 되어 고향의 해안선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더없이 쓸쓸해지는 심정을 가눌 수 없었지만
이기 낀 돌비석 속의 옛 사람들의 이력을 헤아려보면
모두 자명해지는 자연의 섭리 속에 놓여져 있는 것이었다.
그 산천을 떠돌며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갈무리할 것인가 번민하다가
문득, 나는 내 인생의 실마리를 풀어낸듯 실소를 머금게 되었다.
선물 보따리를 안고 찾아온 장모님 덕분에
이제부터는 처자식 등쳐먹고 사는 게으른 시인이나 되어보면 좋겠다고
팔자에도 없는 꿀맛 같은 생각을 복에 겨운 듯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새김질해 보는 것이었다.
2022년 1월 13일 무심재 이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