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좌초 그리고 충돌
해경의 최초상황보고서에 명백히 나와 있었던 것처럼
9시 15분 최초의 좌초가 있었고 좌초사고를 수습하려고
몸부림치다가 9시 22분 후진 후 대청항 귀환도중 의문의 수중물체와 2차
돌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들과 벌이고 있는 논쟁은 [좌초설]과 [어뢰설]의 대결이 아닌, [최초 좌초, 2차 충돌설]과 [최초 좌초, 2차 어뢰설]의 대결로 먼저 수정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강연의 운을 떼셨습니다.
백령도의 모래톱(최초 사고지점)에 좌초한 천안함은 장교들과 장병들의 군생명이 걸린 군함이었으므로 좌초상황분석에 나섰던 응급병들의 보고 하에 군함을 살려보려고 긴급 수습, 모래톱(규조토) 속에서 스쿠류를 파 돌리면서 후진해서 모래톱을 빠져 나왔으나 미처 판단하지 못한 바닥의 수많은 파공이나 손실로 규조토의 물 막음이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급격한 침수가 이루어집니다.
팽팽하게 함미가 침수된 함체는 9시 22분 2차 충돌로 두 동강이 나 버렸습니다.
함미가 가라앉는데 3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나 함체가 충돌로 두 동강으로 갈라져 버린 것은 2차 충돌 시점에 침수가 이미 함체가 팽팽해질 정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2차 충돌을 증언한 한 해군장병은 쿵하는 충격음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군인인 그들이 쾅하는 어뢰 폭발음과 쿵하는 기계 충격음을 구별 못할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해군장병들이 갑판 하에 있던 전원 사망한 것은 함체가 두 동강 나고 함수 부분으로 폭발적으로 물이 쇄도해
들어왔음을 의미합니다.
전원이 이미 사망했음을 인지한 그들이 몇 시간이면 찾아내고 인양할 수 있는 함체를 무엇인가의(선거? 준비?) 일정에 맞추느라 딴 청을 피우고 못 찾은 척 안 찾은 천인공노할 사기극을 진행하는 동안에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3월 27일 오전 7시 30분에 백령도 면사무소에서 함수 부분을 발견, 촬영해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신 박사님은 그 원본 사진까지 확보해 두셨습니다.
아연할 일은 함수가 가라앉은 부분을 물위로 드러내고 있는 바로 옆에 해경인지 해군인지 군함이 맴돌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인양 수색한다고 엉뚱한 곳에서 난리를 치면서 사기극의 일정을 맞추느라
민간이 발견한 함체를 고의로 사라지게 까지 한 것입니다.
3월 28일 오전 10시경에는 어선이 함미도 발견하게 됩니다.
수색작업 도중 사망한 한준위는
27일, 28일, 29일, 30일 4일 동안 필사적인 잠수 수색작업 도중 사고가 났습니다.
함수와 함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그들이 엉뚱한 사람만 희생시킨 책임을 결코 피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10년 4월 25일 합조단의 중간발표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용은 어뢰 폭발이 아니라는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 놓고는 딱 2가지 거짓말을 추가합니다.
함체에 긁힌 흔적이 없고 소나돔 상태가 양호하므로 좌초가 아니라 비접촉 폭발이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우리 국민들을 통째로 완전히 바보 취급했습니다.
함체가 길게 죽 긁힌 자리는 함수 인양사진에 명백히 나와 있고 좌초하고 충돌하는 위치에 따라 소나돔은 얼마든지 상태 양호하고 무사할 수 있다는 설명을 증거 사진과 함께 자세한 그림을 그려 가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발표한 250kg 중어뢰가 폭발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하는지 설명하심으로써 결정타를 날리셨습니다.
250kg 중어뢰의 TNT 컴포지션 폭탄은 수류탄 4천개와 맞먹는 가공할 폭발력을 지닌 것으로 어마어마한 폭발음으로 당시 편안히 잠을 자고 있던 백령도 주민 전체가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와야 정상이고 화약 냄새가 주위에 진동해야 하며 엄청난 물고기 떼죽음이 바다를 덮어야 하고 함체가 갈라지는 모양이 지금 공개된 윗부분이 남아있는 삼각형 모양이 아니라
윗부분이 더 넓게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역삼각형 모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라진 면에 드러난 다심케이블도 지금처럼 그을음 하나 없이 그냥 끊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불타고 녹고 걸레 쪼가리가 되어 있어야 하며 곳곳에 폭발 파편과 부유물이 엉망진창으로 널려있어야 되고 인양된 시체도 파편이 박혀있거나 불에 타 있어야 하고 생존자들도 파편, 골절 등 중상자가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 인양함체의 사진에 갈라진 곳의 철판이 밀려있는 모습을 보면
폭탄의 폭발이 아니라 기계적 충격으로 구겨지고 밀려있는 모습이 분명하며, 담금질로 연마 강화된 스쿠류가 부러지지 않고 휘어져 있는 모습은 작년 2월 미군의 순양함 포트로얄호가 호눌룰루 앞바다에서 좌초 후 산호암초를
탈출하려고 스쿠류를 억지로 돌려서 휘어진 모습과 너무 똑 같아서
최초 좌초 후 모래톱을 탈출하던 상황을 증명합니다.
그 외에도 너무나 명명백백한 증거들을 많이 보여 주셨는데 기억력의 한계로 모두 기술하지 못함이 아쉽습니다.
신 박사님은 가공의 그 어뢰이름을 명명하시면서 좌중의 웃음으로 명쾌하게 강연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2. 미국 잠수함과 2차 충돌
뉴욕에서 한호석 소장님이 미국 쪽의 자료를 분석하시고 구체적 정황에 대한 추가 의문과 정보, 분석 등을 제공하셨습니다.
간단하게나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합동조사단이 결정적인 증거물이라고 하면서 꺼내놓은 어뢰추진기 잔해가 가짜임을 말해주는 반대 증거들이 속속 나오는 바람에, 지금 어뢰추진기 잔해 가짜설은 가설이 아니라 차츰 진실로 굳어지는 중이다.
천안함 함교 유리창이 깨지지 않고 멀쩡한 상태로 인양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2010년 6월 8일 국방부가 누리꾼 55명을 초청하여 천안함 함체를 보여준 현장에서 촬영한 절단면 사진에는 놀랍게도 기다란 전구가 두 개 달린 형광등이 깨지지 않고 절단면 윗부분에 걸려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1,200t급 함체를 두 동강 낼 정도로 엄청난 폭발 충격이 가해졌다면 당연히 깨졌어야 하는 유리창과 형광등이 원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천안함이 어뢰폭발 충격으로 절단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미국 잠수함 충돌사고는 드문 일이 아니다.
1,200t급 초계함을 들이받아 두 동강으로 절단시킬 큰 충격을 일으킨 잠수함이라면 천안함보다 함체가 몇 배나 더 큰 잠수함이었을 것이다.
원래 잠수함 함체는 엄청난 해저수압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제작되었기 때문에 수상함에 비해 훨씬 더 견고하고 강하다.
보도에 따르면, 2009년 7월 서해에 출동한 미국 잠수함이 서해위성발사기지가 있는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앞바다에서 북한의 턱밑까지 가까이 접근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수심이 약 50m가 되는 천안함 사고현장에서 로스앤젤레스급 잠수함이 잠항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2005년 1월 9일 괌 로스앤젤레스급 잠수함 샌프란시스코호 사고
2009년 3월 9일 호르무즈 해협 동급 잠수함 하트포드호 사고
1998년 2월 부산 영도 동급 잠수함
라홀라호 어선 영창호 충돌
2002년 10월 2일 동급 잠수함 헬레나호 어선 두 척과 충돌
2004년 10월 12일 미국군 주도로 동해에서 대잠훈련 실시 중에
한국 해군 특수선박이 잠수함과 충돌한 것으로 보이는 사고로 침몰하였으나, 군 당국은 진상을 밝히지 않고 묻어버렸다.
이런 과거경험을 살펴보면, 천안함이 미국 잠수함과 충돌하여 침몰되었다는 가설이 뜬소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미국 해군 보도국이 인터넷에 공개한 하와이호의 진주항에서의 커다란 흰 천으로 가린 건선거 수리 현장 사진은 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켰으나 구체적인 정황을 분석해 보면 하와이호가 천안함과 충돌하였을 가능성은 없다.
격렬비열도 부근 해상에 나타난 로스앤젤레스급 잠수함
사고 당시 미군 주도하의 독수리 훈련의 일환으로 대잠훈련이 벌어졌다고 하나 주한미군사령부 대변인은 미국 잠수함이 대잠훈련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단언하였다.
미군이 기획하고 주도하는 대잠훈련에서 미국군이 자국 잠수함을 한 척도 동원하지 않고 대잠수함 훈련을 실시하였다는 국방부 대변인의 발언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미국 해군 보도국이 2010년 3월 23일 경상남도 진해 발로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7함대 소속 로스앤젤레스급 잠수함 콜럼비아호
2010년 3월 18일부터 22일까지 진해에 머문 뒤에 1,285t급 디젤 잠수함 최무선함과 함께 서해에서 실시되는 한미합동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무선함을 추적하며 백령도로 북상한 콜럼비아호
2010년 3월 26일 밤 9시, 사고 발생 22분 전에 당일 대잠훈련을 마친 콜럼비아호와 천안함은 긴장을 풀고 휴식 중, 방심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돌사고의 개연성을 높여준다.
사고해역의 수심 50m는 콜럼비아호가 해수면 가까이로 올라와서 잠항하였을 것이므로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콜럼비아호가 천안함에 접근할 때 소나(음탐)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까닭은 진주항 해군조선소 공보실의 보도자료(2009.10.27.)에 따르면 콜럼비아호 함체가 스텔스 기능의 타일로 덮여있었기(보강공사) 때문이다.
9시 15분 사고를 'ㄴ‘자를 가필하여 9시 45분으로 늦춘 이유
사고발생 시각을 뒤로 늦춰야 해군과 해경이 사고현장으로 출동하는 시각을 뒤로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해군과 해경이 사고현장에 되도록 늦게 나타나야, 콜럼비아호가 상황을 서둘러 수습하고 사고현장을 빠져나갈 시간적 여유를 얻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콜럼비아호도 전망탑이나 상단부 등에 큰 손상을 입었을 것이고, 잠수함에 타고 있던 승조원이 부상당했거나 사망하였을 수도 있다.
미국은 사고현장 일대를 차단하여 비밀유지조치
급히 가라앉은 함미는 어쩔 수 없지만 함수는 7.35km나 떨어진 다른 곳에 끌어다 놓았을 가능성
언론의 취재 활동은 3월 27일부터 사흘 동안 함수가 침몰한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고, 그 사이에 미국은 함미가 침몰한 사고현장에서 콜럼비아호 파편을 수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7함대사령관 홍보실의 2010년 4월 19일 보도를 보면
주한미해군사령관이 있는데도 상륙군사령관을 사건수습 현장지휘관으로 임명한 특별대책을 이례적으로 취했다.
동 홍보실의 4월 14일 보도에는 1,600명이 넘는 방대한 병력과 각종 첨단 군사장비들을 사고현장에 집중 투입했다.
동 홍보실의 6월 7일 보도에 따르면
그 병력 중 제25해상전투헬기대대의 조종사들이 현장에서 25일 동안 머물면서 총350회 이상 출격하였다고 한다.
잠수사들이 속속 건져올린 콜럼비아호 잔해들을 오산기지로 계속 실어나르기 위해 씨호크라 부르는 다목적 군용헬기를 그처럼 집중 투입했을 것이다.
동 홍보실이 4월 6일 보도한 현장사진 중 군용헬가가 들것을 긴 줄에 매달아 해수면으로 내리는 장면이 있다.
동 홍보실의 4월 14일 보도사진 중에는 적십자 표식의 의료헬기[UH-60G MEDEVAC]가 하퍼스페리호 갑판에 착륙, 적십자 표식의 병사가 갑판에서 대기하는 장면이 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4월 26일부터 4월 29일까지 5일 동안이나 이례적으로 조기를 게양하였다.
충돌사고로 사망한 미국군인을 수송하고 애도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정황들이다.
미국 해군 보도국은 예정된 복귀날짜에 정확하게 귀항한 사고가 발생한
3월 26일부터 모항에 복귀한 5월 3일까지 37일 동안의 콜럼비아호의 행적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괌 조선소에서 수리한 뒤에 하와이로 복귀한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 소장님의 분석을 읽고 나면 그 간의 수수께끼 같았던 몇 군데 이가 빠진 퍼즐의 전체적인 그림이 완전히 완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 이적행위
정부의 북풍몰이와 사건조사에 계속적인 의문을 제기해온 사람들에게
정운찬 총리는 비국민 발언의 막말까지 하고 정부 당국자가 이적행위
운운 하는 것을 보면서 엄청난 비애와 절망이 몰려왔습니다.
생때같은 가난한 민중의 아들 46명이 비명에 죽었는데 앞뒤도 맞지 않는 엉성한 거짓말로 애꿎은 북한에 공격의 화살을 돌리면서 이상하다고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의 입에는 사정없이 재갈을 물리고....
진상은 철저하게 은폐하고 교묘하게 가공된 결론으로 뻔한 수법의 북풍몰이로 선거를 챙기고자 했던 저들이야 말로 진정 이적행위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해도 하늘도 알고 있고 땅도 알고 있고 서해바다도 알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상당수의 생존자가 있으므로 1987년의 칼기폭파사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의식이 그 당시와는 천지 차이로 다르다는 것을 저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4.나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평택에는 우리 해군 SSU 해난구조대 젊은 병사들이 500 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SSU 는 천안함을 찾기 위한 최적의 군대이다. 해군의 최정예 부대다.
그런데, 수중 탐사 수색부대가 아닌, 전투 부대인 UDT 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늙은 병사가 들어가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이것은 일부러 천안함을 늦게 인양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