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突厥), 이민족(異民族:色目人)이자, 서방(西方) 종족(種族)
2022년 10월 17일
○ ‘돌궐(突厥)’은 ‘투르크(Turk)’다. 이들은 우리 황인종(黃人種)과는 그 형상(形狀=形相)이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이다. 더불어 아세아(亞細亞)의 『최 서단(西端)의 투르크(Turk)와 최 동단(東端), 직선거리(直線距離)로 2만 리(萬里)나 떨어져 있는 한국(韓國)과 뭔 상관(上官)이 있다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민족(異民族)인 그들은 우리나라 ‘한국(韓國)’을 ‘형제의 나라(兄弟之國)’라고 칭(稱)하고 있는 것일까? 진짜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1) 현대사(現代史) 보면 : 투르크[Turk] 종족(種族)을 말하는 것이고, “터키【Turkey : 토이기(土耳其), 토이고(土耳古)】 즉(卽) 오늘날의 튀르키예(Türkiye)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튀르크(Türk)인의 땅'을 말한다.
“서아세아(亞細亞)와 남구라파(南歐羅巴)” 즉(卽) “지중해(地中海) 연안(沿岸)과 흑해(黑海)”【북사(北史) 曰 : 발해(渤海)다.】 사이에 걸쳐 있는 나라로 옛 돌궐(突厥)의 후예(後裔)들인 이들은 크게 보면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발칸반도(Balkan, 半島)에 걸쳐 분포(分布)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代表的)인 국가(國家)로 “터키[Turkey]”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어디에서 시원(始源)하며, 이들 종족(種族)들은 서방(西方)족인가? 동방(東方)족인가? 또 색목인(色目人)계인가 황인종(黃人種)계인가?
이들은 자칭(自稱)하기를 한국(韓國)과는 『형제(兄弟)의 나라[兄弟之國)』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일까?
(2) 조선사(朝鮮史)를 보면 : “돌궐(突厥 : Turk)과 고구려(高駒驪)”와의 관계(關係)는, 침략(侵略)과 인접(隣接) 국가(國家)로써의 상호(相互) 왕래(往來), 투항(投降), 협력(協力) 관계(關係)의 기록(記錄)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高駒驪)와 발해(渤海)’ 초(初), 이들과의 관계(關係)가 긴밀(緊密)했다고 보아진다.
➊ 東史綱目 / 高句麗 陽原王 7년(551) : 《가을 9월, 돌궐(突厥)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 돌궐(突厥)은 흉노(凶奴)의 별종(別種)이다. 연연(蠕蠕)이 쇠약하여지매 돌궐이 다시 북막(北漠)에서 일어나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를 공격하여 왔다.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매, 옮기어 백암성(白岩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장군 고흘(高訖)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항전케 하여 이를 이기고 4천여 급(級)을 사로잡았다. 8년[AD 552],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고 하였으며,
➋ 三國史記 陽原王 7년(551) : 《七年,秋九月,突厥來圍新城,不克,移攻白巖城.王遣將軍高紇,領兵一萬,拒克之,殺獲一千餘級. : 가을 9월, 돌궐(突厥)이 신성(新城)을 포위(包圍)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이동하여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왕(王)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新羅來攻,取十城(郡)신라(新羅)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城)【郡】을 빼앗았다. 八年,築長安城. : 8년[AD 552],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위의 “➊+➋”의 기록(記錄)을 보면 : 『돌궐(突厥)이 고구려(高駒驪)를 침공(侵攻)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돌궐(突厥)이 어디에 있었기에 “고구려(高駒驪)”를 침공(侵攻)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터키[Türkiye]가 투르크민족(Turk, 民族)이라고 한 것을 보면 : 이들은 본래(本來)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시베리아(Siberia)·발칸반도(Balkan, 半島)에 이르는 지역(地域)에 퍼져 사는 튀르크(Turk)어족을 모어(母語)로 하는 민족(民族)을 말한다.”는 것은 상식(常識)에 속한다.
이러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시베리아(Siberia)·발칸반도(Balkan, 半島)에 이르는 지역(地域)에 퍼져 사는 튀르크(Turk)”족들이 2만 리(萬里) 시공간(視空間)과 거리(距離)를 뛰어넘어 반도(半島) 땅의 고구려(高駒驪)를 침공(侵攻)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뭐냐? 하는 것이다.
이란 ‘역사(歷史) 기록(記錄)’은 : 〈“반도(半島) 고구려(高駒驪)”라는 말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빙자(憑藉)한 제국주의(帝國主義) 및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일 뿐이다.”〉라는 것을 확인(確認)시켜 주는 것이다.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빙자(憑藉)한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 『그들은 2만 리(萬里) 시공간(視空間)과 거리(距離)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 그대들이 귀신(鬼神)이 되어 그 혼백(魂魄)일지라도 가능(可能)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의 혼백(魂魄)은, 선인(先人)들에 의해 파괴(破壞)되어 혼백(魂魄)조차 거둘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관참시(剖棺斬屍)도 모자랄 “부역(附逆)매국노(附逆賣國奴) 놈”들이다.
결과적(結果的)인 해설(解說)이지만 :『돌궐(突厥)이란 종족(種族)은 이민족(異民族)으로 코카소이드[Caucasoid]계 인종(人種)으로, 황인종(黃人種)과는 전혀 다른 말 그대로 이민족(異民族)이다.』 이들은 〈본시(本是) 서방(西方)의 소국(小國)이었다.〉 는 것, 이게 핵심(核心) 포인트[Point]다.
➤ 『고구려(高駒驪)가 돌궐(突厥)의 침공(侵攻)을 당하여, 서(西)쪽 변방(邊方)에 온 힘이 쏠려있을 때, 신라(新羅)는 이때를 이용(利用), 고구려(高駒驪)를 쳐, “열 개의 성(城) 또는 열 개의 군(郡)”을 빼앗았다고 하였는데, 이런 시국(時局)에도 고구려(高駒驪) 양원왕(陽原王)은, 장안성(長安城) 쌓았다.』는 것이다. 역사서(歷史書)에서 이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등장(登場)하는 “열 개의 군(郡)이나 열 개의 성(城)을, 당시의 군국제(郡國制)을 감안(勘案)해 보면 : 오늘날의 경상도(慶尙道) 땅부터 휠 씬 큰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 된다. 과연(果然)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가능(可能)한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당시(當時)에 돌궐(突厥)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 및 인종(人種)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一 / 建國 始封 : 《初藏之俘也.其酋長有劍牟岑者.立藏外孫舜爲王.又命高偘討平之.都護府旣屢遷.舊城頗入新羅.遺民散奔突厥,靺鞨.高氏旣絶. : 처음에 고장(高藏)이 사로잡혔을 적에, 그 추장(酋長)에 검모잠(劍牟岑)이라는 자가 있어 고장의 외손자 순(舜)을 왕으로 세우니, 또 고간(高侃)을 시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도호부(都護府)가 이미 누차 옮겨져 옛 성이 신라(新羅)로 들어간 것이 많게 되매, 유민(遺民)들이 돌궐(突厥)ㆍ말갈(靺鞨)에 분산되었다. 이로써 고씨(高氏)는 끊어졌다.》고 하였다.
➤ 〈고구려(高駒驪)가 당(唐)에 의해 무너졌을 때, 고구려(高駒驪) 유민(遺民)들이 “돌궐(突厥)과 말갈(靺鞨)”로 분산(分散)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당시(當時) 고구려(高駒驪)는 ‘돌궐(突厥)·말갈(靺鞨)’과 인접(隣接)하며, 접경(接境)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야 만 ‘유민(遺民)들이 돌궐(突厥)·말갈(靺鞨)’로 흩어져 투항(投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중(空中) 투항(投降)’은, 인간(人間)으로써 불가능(不可能)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 중 (5) 李衛公問對直解(이위공문대직해) / 李靖本傳 李靖의 傳記』에서 설명(說明)한 바와 같이 “돌궐(突厥)”은 서방(西方)의 작은 나라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반도(半島) 고구려(高駒驪) 유민(遺民)들이 “2만 리길을 달려가 투항(投降)했다”는 건가?
➤ 당시(當時)에 『서방(西方) 땅의 돌궐(突厥)과 고구려(高駒驪) 서(西)쪽 땅이 서로 붙어있어(相接), 고구려(高駒驪) 유민(遺民)들이 돌궐(突厥)에 투항(投降)하였다.』는 설명(說明)이 가장 설득력(說得力)이 있다. “1만 5천리, 2 만리”라는 거리(距離)는, 당시의 사정(事情)을 감안(勘案)하면 평생(平生)을 가도 갈 수 없는 먼 거리(距離)란 것을 고려(考慮)해야 한다.
(2) 記言 34권 외편 / 東事 3 : 《靺鞨.本粟末靺鞨.高句麗別種.有野勃.三世孫乞乞仲象.與其徒渡遼河.保太白山東.仲象死.子祚榮嗣.驍勇善騎射.聚句麗亡衆建國.號曰震.遣使交突厥.地方五千里.戶十餘萬.勝兵數萬.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之地. : 말갈은 본래 속말 말갈(粟末靺鞨)로 고구려의 별종이다. 야발(野勃)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의 3세손(世孫)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자기 무리와 함께 요하(遼河)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쪽을 보존하였다. 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祚榮)이 뒤를 이었다. 조영은 날래고 용감하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고구려에서 도망한 무리를 모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고 하였다. 사신을 보내 돌궐(突厥)과 통교하였다. 국토는 사방 5000리이고, 가호는 10여 만이었으며, 잘 훈련된 군사가 수만 명이었다.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하였으니,
➤ ‘발해(渤海)는 곧 진(震)’이니, ‘동국(東國)’이란 뜻이며, 서방(西方)의 돌궐(突厥)과 통교(通交)하였다는 말은, 『발해(渤海)의 서(西)쪽이 돌궐(突厥)과 서로 접하고 있었다(相接)』는 말과 같다.
(3) 東史綱目 3 上 辛未年 高句麗 陽原王 7년(551) : 《추9월 돌궐(突厥)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 돌궐(突厥)은 흉노(凶奴)의 별종(別種)이다. 연연(蠕蠕)이 쇠약하여지매 돌궐이 다시 북막(北漠)에서 일어나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를 공격하여 왔다.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매, 옮기어 백암성(白岩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장군 고흘(高訖)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항전케 하여 이를 이기고 4천여 급(級)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는데,
➊ 『돌궐(突厥)의 동변(東邊)과 고구려(高駒驪)의 서변(西邊)이 서로 맞닿아있었다.』는 증거(證據)다. “이때의 돌궐(突厥)은 서방(西方)에 있었다.” 고 하였다. 특히 연연(蠕蠕)은, 고구려(高駒驪) 황실(皇室)과 혼인(婚姻)으로 결속(結束)되어 있었고, 이를 빌미로 연연(蠕蠕)과 은밀(隱密)하게 모의(謀議)하여 지두간(地豆干)을 빼앗아 그 땅을 나누자고 하였다는 역사서(歷史書)의 설명(說明)을 상기(想起)해보아야 한다.
‘연연(蠕蠕 : 柔然)’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동구라파(東歐羅巴) 땅”에서, 한 때 강력(强力)한 나라로 주변(周邊)의 수십(數十)개 부족(部族)과 나라들을 속국(屬國)으로 만들었던 종족(種族)이었다.
이후(以後), 돌궐(突厥)이 연연(蠕蠕)을 물리치고 그 땅을 빼앗았으니, 당시(當時)의 돌궐(突厥) 땅은, 동(東)쪽으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곳에서 고구려(高駒驪)와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➋ 이러한 “돌궐(突厥)”이 “고구려(高駒驪)”의 신성(新城)을 쳐들어왔다. “신성(新城)”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성(新疆省)의 접경지대(接境地帶)에 있다”고 하였다. 【당(唐)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 전회(前回)에 설명(說明)】이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3) -1) 東史綱目 3 上 高句麗 陽原王 9년 553) 동10월 : 이해에 거란(契丹)에서 1만여 세대가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이때에 제왕(齊王)이 거란을 쳐서 크게 깨뜨렸는데, 그 뒤에 다시 돌궐(突厥)에게 핍박당하여 부락 1만여 세대가 고구려에 의탁하여 왔다.《통고》에서 보충
(3) -2) 해동역사(海東繹史) / 4년 양원왕(陽原王) 9년 문선제가 북쪽으로 거란(契丹)을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에 다시 돌궐(突厥)에게 핍박당하자, 거란은 1만여 가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부쳐 살았다.《文獻通考》
➤ 〈돌궐(突厥)과 고구려(高駒驪) 사이에 글란(契丹)이 있었으나, 돌궐(突厥)의 핍박(逼迫)으로 글란(契丹)은 북(北)쪽으로 도주(逃走)하고, 나머지 무리들 1만여(萬餘) 가(家) 고구려(高駒驪)에 투항(投降)하여 의지하였다.〉는 것인데,
글란(契丹) 역시(亦是) ‘동방(東方) 종족(種族)’이 아닌 ‘서방(西方) 종족(種族)’으로, 고구려(高駒驪)와 돌궐(突厥)사이에 끼어 있어 많은 핍박(逼迫)과 압박(壓迫)을 받았다고 하였다.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으로 ‘1만여(萬餘) 가(家)’란 엄청난 무리(衆)이다. 쉽게 말해 “노예(奴隷) 1만여 가(家)”란 말과 같기 때문이다.
(4) 주석(注釋) / 기래청(其來請) : 《이때 설연타(薛延陁)의 진주가한(眞珠可汗) 이남(夷南)이 唐(당)나라에 와서 청혼(請婚)을 했다. 설연타(薛延陀)는 투르크(Turk)계 유목민족(遊牧民族)의 하나이다. 설연타(薛延陀)는 鐵勒(철륵)의 한 씨족(氏族)인데, 鐵勒(철륵)이 바로 투르크(Turk)의 음사이다. 突厥(돌궐) 역시 투르크(Turk)의 음사이다. 투르크(Turk)는 지금의 터키(Turkey) 민족(民族)이다.》하였는데,
전성(全盛) 때의 당(唐) 통전(通典)에 의하면 : 〈설연타(薛延陀)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4,000 여리(餘里)” 떨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특히 설연타(薛延陀)의 북(北)쪽에 있었던 ‘동라(同羅)와 복골(僕骨)’이 합쳐 설연타(薛延陀)를 공격하였다고 하였는데, 〈동라(同羅)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7,5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니,
➤ 당시(當時)의 “철륵(鐵勒)이니 돌궐(突厥)”이니 하는 종족(種族)들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서(西)쪽, 발칸(Balkan) 반도(半島)와 흑해(黑海),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던 자(者)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뒤엎을 수 없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서(西)쪽, 발칸(Balkan) 반도(半島)와 흑해(黑海),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던 돌궐(突厥)과 고구려(高駒驪)가 서로 맞붙어 있었다면, 고구려(高駒驪)의 서변(西邊)은 총령(葱嶺)을 넘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동구라파(東歐羅巴)에 까지 이르렀다』고 해야 한다. 이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을 부인(否認)할 수 없다.
(5) 李衛公問對直解(이위공문대직해) / 李靖本傳 李靖의 傳記
原注 : 《太宗言, 卿平突厥時 用奇兵勝之 今征高麗 却言用正兵 何也. 突厥 本西方小國 姓阿史那氏 世居金山之陽.夏曰獯鬻.殷曰鬼方 周曰玁狁.漢曰匈奴 魏曰突厥.工於鐵作. 金山狀如兜鍪 其俗呼兜鍪爲突厥 因爲國號. : 太宗言 “卿이 突厥을 평정할 때에는 奇兵을 사용하여 승리하였는데, 지금 高麗를 정벌함에는 도리어 正兵을 쓰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突厥은 本西方小國으로 姓阿史那氏니 世居金山之陽이라. 이요 殷曰鬼方이요 周曰玁狁(注11)이요 漢曰匈奴요 魏曰突厥이니 夏나라에서는 獯鬻이라 하였고, 殷나라에서는 鬼方이라 하였고, 周나라에서는 玁狁이라 하였고, 漢나라에서는 匈奴라 하였고, 魏나라에서는 突厥이라 하였다. 工於鐵作하여 金山狀如兜鍪하니 其俗呼兜鍪爲突厥하여 因爲國號라쇠를 잘 다뤘는데 金山의 형상이 투구 모양처럼 생겼는바, 민간에서 ‘투구[兜䥐]’를 ‘突厥’이라고 불렀으므로, 이를 국호로 삼은 것이다. 貞觀三年에 以李靖爲定襄道總管하여 統諸軍討突厥이러니 四年春二月에 襲破突厥於陰山하니 頡利可(注12) 汗이 遁走하니라 貞觀 3년(629)에 太宗은 李靖을 定襄道總管으로 삼아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突厥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4년 봄 2월에 突厥을 陰山에서 습격하여 격파하니, 頡利可汗이 도망하였다.》
➤ 위의 “이위공문대직해(李衛公問對直解) 李靖本傳 李靖의 傳記” 기록(記錄)에서 가장 중요(重要)한 포인트[Point]는, 〈돌궐(突厥)은 본래(本來) 서방(西方)의 작은 나라였다【本 西 方 小 國】〉는 것이다.
이걸 자꾸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나 산서성(山西省) 북방(北方)쯤에 놓고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하다 보니,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조차 구분(區分)하지 못하는 ‘개돼지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방(西方)이 어딘가?『서방(西方)이란 동방(東方)과 대칭(對稱)되는 말로, 선인(先人)들은 총령【葱嶺 : 崑崙山: 不周山】의 서(西)쪽 땅, 또는 우랄산맥【Ural, 山脈 : 烏拉山脈 : 亞洲和歐洲的分界線 : 納羅達峰, 1894m】의 서(西)쪽 땅이다.』라고 하였다.
즉(卽)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일부(一部)와 동구라파(東歐羅巴) 및 구라파(歐羅巴) 땅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따르면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죽으나 사나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방(西方)의 나라’였다던 돌궐(突厥)이 고구려(高駒驪)를 침략(侵略)하고, 고구려(高駒驪)는 장수(將帥)를 보내어 이들을 격파(擊破)했고, 고구려(高駒驪) 유민(遺民)들이 흩어져 돌궐(突厥)로 투항(投降)했다는 역사서(歷史書) 기록을 생각한다면,
➤ “서방(西方) 땅의 돌궐(突厥)과 고구려(高駒驪)는,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었던 이웃 나라”였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사실(史實)인 것이다.
오늘날의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바로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백성(百姓)들을 “개돼지”로 취급(取扱)하는 것이다.
(6) 資治通鑑 211 唐紀27 / 玄宗 開元三年 :《突厥十姓降者前後萬餘帳.高麗莫離支文簡,十姓之婿也. : 돌궐(突厥)의 십성(十姓) 부락(部落)에서 항복(降伏)한 자(者)가 전후(前後) 만여(萬餘) 장(帳)이었는데, 고려【高麗 : 고구려(高駒驪)】막리지(莫離支) 고문간(高文簡)은 십성(十姓)의 사위(婿)였다.》
주석(註釋) : ‘고이(考異)’에서 이르기를 : 〈西突厥十姓故來降,而高文簡則默啜之子婿也. : 서돌궐(西突闕) 십성(十姓)이 와 항복하였는데, 고문간(高文簡)은 묵철(默啜)의 사위였다.〉
고구려(高駒驪)의 황실(皇室)도 유민(遺民)들과 더불어 “돌궐(突厥)”에게 투항(投降)하여 “돌궐(突厥) 가한(可汗)의 사위(婿)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서 ‘서돌궐(西突闕)이니 동돌궐(東突厥)’이니 하는 말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 사가(史家)들의 말장난이다. ‘돌궐(突厥)’이면 ‘돌궐(突厥)’이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서돌궐(西突闕), 동돌궐(東突厥)이란 말인가?
『돌궐(突厥)은 서방(西方) 인종(人種)으로 조그만 나라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7) 北史 99 列傳第87 突厥 : 《突厥者,其先居西海之右,獨為部落,蓋匈奴之別種也。: 돌궐(突厥)은, 그들의 선대(先代)가 서해(西海) 【지중해(地中海)】 서(西)쪽에서 살던 자들로,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여, 돌궐(突厥)은, 본래(本來) 서방(西方) 종족(種族)이었음을 후세(後世)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8) 周書 50 列傳 第 42 / 異域 下 / ‘突厥’ 편을 보면 : 《突厥者,蓋匈奴之別種,姓阿史那氏.別為部落.後為鄰國所破,盡滅其族. : 俟斤一名燕都,狀貌多奇異,面廣尺餘,其色甚赤,眼若琉璃.性剛暴,務於征伐. : 돌궐(突厥)은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으로, 성(姓) 아사나(阿史那) 씨(氏)로, 별도의 부락이다. 뒤에 가까이에 있던 나라가 그곳을 깨뜨리니, 그 종족(種族)은 소멸(消滅)되었다. : 사근(俟斤)은 일명 연도(燕都)인데, 얼굴의 생김새(狀貌=相貌)가 기이한 면이 많은데, 얼굴이 1척보다 더 넓고, 그 색깔은 심히 붉고, 눈알은 유리(琉璃)와 같은데, 성격은 강폭(强暴)하고, 정벌(征伐)하는데 힘을 썼다.》라고 한 것을 보면,
➤『돌궐(突厥)이란 종족(種族)은 이민족(異民族)으로 코카소이드[Caucasoid]계 인종(人種)으로, 황인종(黃人種)과는 전혀 다른 말 그대로 이민족(異民族)이다.』 이들은 〈본시(本是) 서방(西方)의 소국(小國)이었다.〉는 것, 이게 핵심(核心) 포인트[Point]다.
“눈동자(눈알)가 유리(琉璃)와 같다”고 하였는데, 눈동자가 유리(琉璃)같다는 것은, “튜니티는 아직도 내 이름”[형보다 나은 아우] 편의 ‘아우’ 주인공(主人公) 역으로 나오는 영화배우(映畵排優)의 ‘눈동자’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즉(卽) 색목인(色目人) 종류(種類)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9) 돌궐(突厥)은, 투르크(Turk)다. 오늘날의 터키(Turkey) 종족(種族)이다. 이러한 이들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나 산서(山西)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고 해설(解說)하는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자(者)들이다.
“중국어판 위키백과”를 보면 : 『돌궐(突厥)의 유인(遺人)들은 오늘날의 총령(葱嶺)의 서남(西南)과 서(西)쪽에 있었던 몽고족(蒙古族)으로 색목인(色目人) 부족(部族)이었던 「왕고(汪古), 내만(乃蠻), 극열(克烈)」등이었으며, 이들은 “경교도(景敎徒)였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卽),〈“내안(乃顔)=내만(乃蠻)”과 그 무리들은 경교도(景敎徒)였으며, 그들 부대(部隊)는, 기의 표지(旗幟)로 십자가(十字架)를 부호(符號)로 하였다.[乃顏是景教徒,其軍以十字架為旗幟符號.乃顏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는 사실(事實)이다.
그렇다면 「내안(乃顔)의 잔당(殘黨)이었던 ‘합단(哈丹)=합단(合丹)’무리들 역시(亦是) 잔당(殘黨)이라고 하였으니, 경교도(景敎徒)였음을 틀림없는 사실(史實)일 것이다.」
► “중국어판 위키백과”에서 「경교(景敎)」를 찾아보면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景教 : 基督教. 東方基督教 / 大秦景教流行中國碑 : 碑額上的十字架.中略. : 몽고(蒙古)의 극열(克烈), 왕고(汪古), 내만(乃蠻)의 세 부족(部族)은, 모두 경교(景敎)를 신봉(信奉)한 부족(部族)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경교도(景敎徒)들은, 많은 돌궐(突厥) 유민(遺民)들이었다. [特別是蒙古克烈,汪古,乃蠻三部族皆信奉景教,其實景教信徒,多是突厥遺民.]》고 사족(蛇足)을 달아 놓았다.
➊ ‘극열(克烈)’ : 몽고족(蒙古族)이자 돌궐(突厥)의 유민(遺民)들이다. 달단(達旦)이라고도 한다. 1,100년대에서는 내만(乃蠻)의 도움으로 다시 나라를 일으켰고, 1,190년대에는 극열(克烈)에서 내란(內亂)이 일어나 왕(王)이 서요(西遼)로 도주했다고 하였다[1,190年代,克烈內亂,王汗逃亡西遼] 하였으니, 내만(乃蠻)과 인접(隣接)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➋ ‘왕고(汪古)’ : 돌궐(突厥) 몽고족(蒙古族)으로, 「백달단(白韃靼) 혹은 숙달단(熟韃靼)」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으니, 즉(卽) 색목인(色目人)의 백인(白人)무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내만(乃蠻)과도 특수적(特殊的) 관계(關係)에 있었으며, 대대로 철목진(鐵木眞) 가계(家系)와 통혼(通婚)하며, 특별히 총애를 받았다고 하였다. [又稱白韃靼或熟韃靼,與漠北的黑韃靼或生韃靼相對,回紇人稱其祖先為卜古可汗.乃蠻有特殊的關係.蒙古西侵併戰勝乃蠻是成吉思汗實現蒙古統一的最後一次決戰,而汪古部又在其中起了重要作用.汪古部貴族在元朝不僅是世襲封王,在元代社會中非常受到重視,而且還享有同成吉思汗家族世代通婚的寵遇.]
➌ ‘내만(乃蠻)’ : 본시(本是) 색목인(色目人) 부족(部族)이며,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의하면 “내만국(乃蠻國)”은 총령(葱嶺)의 서남(西南)에 있다.[讀史方輿紀要 / 乃蠻國 : 乃蠻國亦在蔥嶺西南.宋嘉定中.蒙古鐵木真擊滅乃蠻諸部.是也.其後復立其種類為乃蠻王.]」고 하였으니,
위에서 보는 것처럼 : “극열(克烈), 왕고(汪古), 내만(乃蠻)”등의 세 부족(三 部族)이 있었던 곳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이며, 이들은 “백인계(白人系) 색목인(色目人)” 부족(部族)이었으며, 돌궐(突厥)의 유민(遺民)들로, 몽고족(蒙古族)에 속해 있었다고 하였다.
【예락하(曳落河) : 돌궐(突厥)의 언어인 “elaha”의 음역(音譯)으로 ‘건장한 사나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曳落河,一般指開元,天寶年間安祿山麾下約八千人的精銳輕騎兵,由奚,契丹,同羅等少數民族為主組成.本意為突厥語壯士,由於在安史之亂中發揮了重要作用,史稱八千曳落河. 《일반적(一般的)으로 예락하(曳落河)는, 당(唐)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年間)의 안록산(安祿山) 휘하(麾下)의 8,000여 정예(精銳) 경기병(輕騎兵)을 말하는 것으로, ‘해(奚)+글란(契丹)+동라(同羅)’등의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구성되었었는데, 그 뜻은 돌궐어(突厥語)의 “장사(壯士)”를 뜻하는 말이다. 역사(歷史)에서는 “8천 예락하(曳落河)”라고 한다. ➤ 通鑑二百一十八〈凡五條〉 / 同羅曳落河居五分之一 : 史炤釋文曰安祿山所刼同羅兵號曳落河余按祿山養同羅奚契丹降者八千餘人號曳落河曳落河者胡言壯士也是時史思明等合兵五萬餘人而同羅曳落河居五分之一是同羅曳落河不下萬人矣祿山在洛方圗關輔所養曳落河八千餘人若以萬人付思明反浮於所養之數不應如此盖同羅者阿布思之部落也阿布思敗死其部落歸祿山祿山簡同羅之壯者與奚契丹之壯者養之通謂之曳落河其不預曳落河之養者尚多今遣助思明者同羅之兵及曳落河通有萬許人耳.】고 하였다.
즉(卽), 위의 예(例)에 따르더라도 당(唐) 시대의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역시(亦是) 재해설(再解說)이 필(必)히 요구(要求)된다. 더불어
‘철륵(鐵勒)=돌궐(突厥)은, 서방(西方) 땅에 있었다.’는 것이고, 특히 ‘동라(同羅)’같은 경우(境遇)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7,500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여, 오늘날의 러시아(Russia) 모스크바(Москва) 서(西)쪽 땅이다.
즉(卽),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서변(西邊)…발칸(Balkan) 반도(半島)…구라파(歐羅巴)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들을 오늘날의 동북지방(東北地方)으로 몰아넣고,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한다는 것은,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하기 위한 것이다.』
○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조선인(朝鮮人)의 후예(後裔)들이 ‘국사(國史)’로 채택(採擇)하여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는 사실(事實)은, 부역(附逆)매국노(賣國奴) 놈들과 무엇이 다를까?
참 이해불가(理解不可)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이야기지만, 남한(南韓) 즉(卽) 대한민국(大韓民國) 땅에서는 너무 자연(自然)스럽게 의무교육(義務敎育)으로 강제(强制) 주입(注入)을 시키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누굴 탓할까? 더불어,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일제(日帝)에 부역(附逆)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賣國奴)’들이 득실거리며, 이들이 권력(權力)을 잡고, 명예(名譽)를 얻으며, 부(富)를 쌓아 놓고 떵떵거리고 살고 있고,
지방(地方)에서도 부역자(附逆者)들이 부역(附逆) 대가(代價)로 쌓아올린 부(富)와 권력(權力)과 명예(名譽)를 쥐고 앉아 지방(地方)의 호족(豪族)이 되어 대대(代代)로 세습(世襲)해 가며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아가고 있다.
➤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對照的)으로, 젊음과 정열(情熱)을 바쳐 피를 흘리며 독립(獨立)을 쟁취(爭取)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많은 독립투사(獨立鬪士)들과 그 가족(家族)들은 하루를 살기 위해 온 몸을 바쳐야 하는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 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미친 상황(狀況)’이 정상적(正常的)인 일처럼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건 누가 봐도 정상적(正常的)인 나라가 아니다. 지금의 경제발전(經濟發展)이야 너무나 굶주렸던 과거(過去) 때문일 뿐이다. 친일청산(親日淸算)과 같은 정신적(精神的) 혁명(革命)이 없다면, “더 이상(以上)의 발전(發展)은 담보(擔保)될 수 없다”
장담(壯談)하건대 “윤석열 정권”의 남은 임기(任期) 내내, 사회혼란(社會混亂)과 발전(發展)없는 경제(經濟) 정체(停滯)속에 시달리며 뭐 하나 제대로 만들어 놓지 못하는 최악(最惡)의 “정권(政權)”으로 기록(記錄)될 것이다.
대내외적(對內外的)인 불확실성(不確實性)을 해결(解決)할 수 있는 능력(能力)이 없기 때문이다. “무능력(無能力)과 무식(無識)”은 결국(結局) 국민(國民)들의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선택(選擇)한 국민(國民)들이 져야 할 몫이다.
“한미동맹(韓美同盟)”이 아닌 ‘한미일(韓美日) 동맹(同盟)’을 맺어 무엇을 쓰려함인가? 일본(日本) 본토(本土)를 방위하기 위해서? “한미일(韓美日) 동맹(同盟)”은 열도(列島)를 위한 것일 뿐,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위해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거꾸로 냉전체제(冷戰體制)로의 회귀(回歸)를 재촉하는 잘못된 외교정책(外交政策)으로, 전쟁(戰爭)을 스스로 불러올 수 있는, ‘볼로디미르 올렉산드로비치 젤렌스키’보다도 한 수 높은 무능력(無能力)한 일이다.
『‘러시아(Russia)·중국(中國)·북한(北韓)’이 박수(拍手)치며 우릴 지지(支持)할까?』 보수우익(保守右翼)층들이 이렇게 생각이 없는 무뇌(無腦)층인가? ‘한미일(韓美日) 동맹(同盟)’을 맺어 무엇을 쓰려함인가? 아니면 이 나라가 전쟁(戰爭)의 포화(砲火)속에 휩쓸리는 것을 즐기려 함인가?
전쟁(戰爭)은, 인간집단(人間集團)의 가장 잔인(殘忍)하고, 참혹(慘酷)한 비극(悲劇)으로, 전쟁(戰爭)은 최후(最後)의 수단(手段)일 뿐이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悲劇)을 보면서 ‘희열(喜悅)=희락(喜樂)’을 느끼려 하는가? “왜 우리가 일본(日本) 방위(防衛)의 최전선(最前線)이 되어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는가?”
미국(美國)이란 나라는, 『한반도(韓半島)는 포기(抛棄)하더라도, 열도(列島)는 결코 포기(抛棄)할 수 없는 지리적(地理的) 요건(要件)속에 있다』는 것쯤은 상식(常識)에 속하는 문제(問題)다. 『이걸 모른다면 지도자(指導者)가 될 수 없는 무능력(無能力)한, 자격미달 자(資格未達 者)다. 국민(國民)들이 분노(憤怒)하면 행동(行動)한다는 것도 알자.』
2022년 10월 17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집단이나 무리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의 적"이다. 특히 내부의 '무능력한 지도자는 국가와 민족을 파멸로 이끈다.'
가장 무서운 적이 바로 "무능력"이다.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 또한 바로 '내부의 적'이다. 국민들속에 숨어들어 국민들을 이긴질시키고, 분열시키며, 혼란을 부추긴다.
특히 '보수우익층'에 이러한 '내부의 적'이 숨어들어 있는데, 바로 토착 왜구들로 "친일분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