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 마을인 강원도 인제 용소마을에는 폭포가 있다. 이름은 용소폭포다. ‘하트’처럼 뚫린 암벽에 폭포수가 흐르고 봄꽃이 점점이 피었다. /박종인 기자
대한민국에는 역사책에 없는 마의태자 발자국이 곳곳에 찍혀 있다. 전설과 지명을 따라가면 사서에 없는 마의태자 북상 루트가 윤곽을 드러낸다. 그 지명과 전설은 이렇게 말한다. "태자는 눈물이나 흘리던 약한 사내가 아니라 신라 부흥을 꿈꾸던 군주였다"고.
마의태자는 안동 예천 하늘재를 거쳐
경기도 강원도에서 나라 부흥을 꿈꾼다
마의태자는 북쪽으로 가며 흔적을 남기었고
고려 공민왕의 반대로 경기도 문경 개그늘 벌천 월항 어류성 선비마을에 흔적을 남기고 아내 노국공주는 경송정 여우목 예천 용문 안동 으로 가며 놋다리 밟기 등의 흔적을 남긴다
경북 안동 용두산에는 국망봉이 있다.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가 경주를 돌아봤다는 봉우리다. 이 봉우리에서 3㎞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 이름은 태자리(太子里)다. 산 정상 바윗돌 이름은 마의대다.
충북 충주 월악산에는 미륵대원사지가 있다.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을 꿈꾸며 세웠다는 절터다. 미륵 석불입상이 고고하게 서 있다. 절터 위치는 계립령이다. 계립령은 중원성을 거쳐 경주에서 북쪽으로 가는 대로였다. 전설은 계립령을 넘고 남한강을 건너 이어진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 용문사에는 1000살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마의태자가 지나가면서 꽂은 지팡이가 자라난 나무"라고 믿고 있다. 공작산과 수타사가 있는 홍천 노천리에는 지왕동(至王洞)이 있다. 왕이 당도했다는 뜻이다. 지왕동에서 고개를 넘으면 왕터가 나온다. 왕터를 건너면 바로 인제 땅이다. 지명과 전설을 따라가면 마의태자는 험준한 산과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서진(西進), 북진(北進), 동진(東進)을 했다. 금강산으로 도망가려 했다면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면 그만인데, 패망한 나라 태자가 이 루트를 택한 이유가 수수께끼다.
군사요충지와 마의태자 루트
맑은 자연이 있는 곳은 군부대거나 아니면 관광지다. 역사 속 군사요충지는 모두 관광지로 변했다. 몰려드는 여행자들에게 맞서서 군부대들이 그 지역을 선점해버리면 여전히 군부대다.
마의태자 발자국이 있는 곳들은 100% 유명 관광지다. 100% 과거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계립령은 신라와 북쪽을 잇는 대표적인 교통로였다. 계립령 너머 중원성은 신라 제2 수도로 불렸다. 미륵대원사는 외부와 지리적으로 차단된 공간이었다. 태자는 군사 중심지와 요새(要塞)들만 골라 행군을 해갔다. 양평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수운 중심지였다. 인제는 고구려와 신라가 격전을 벌인 곳이다. 지금도 인제 땅 많은 부분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군사지역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자연이 많기에 관광객이 몰리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인제, 기록되지 않은 역사
인제에 남은 마의태자 흔적은 이렇다. '김부대왕로'라 개칭된 446번 도로를 따라 서쪽에서부터 중간다무리와 웃다무리 마을이 나온다. 김부대왕은 경순왕을 지칭하기도 하고 경순왕 아들 마의태자를 지칭하기도 한다. 현대에 세운 다리 이름은 다물교(多勿橋)다. 삼거리 이름은 다물삼거리다. 다물은 고구려말로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대규모 군사 훈련장이 있는 지역 이름은 김부리(金富里)다. 김부리 훈련장 속에는 김부대왕각이 있다. 마의태자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고 적혀 있다. 조금 더 동진하면 갑둔리(甲屯里)가 나온다. 군사가 주둔했다는 뜻이다. 갑둔리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알 수 없는 어느 때에 파괴돼 묻혀 있다가 발굴된 탑이다. 석탑에는 '김부 가족의 영원을 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김부리에 있는 골짜기 이름은 맹개골이다. 마의태자를 따르던 맹장군 이름을 딴 지명이다. 맹장군은 양구에서 신라 부흥군을 훈련시키다 죽었다. 훈련 장소 이름은 군량리(軍糧里)다. 태자가 옥새를 숨긴 옥새바위도 있고 태자가 탄 수레가 넘어간 고개 수거네미도 있다. 사람들은 인제 김부리 일대가 신라 부흥을 꿈꾸며 태자가 세운 신라소국이었다고 믿는다. 아쉽게도 이 지명들이 있는 곳은
군부대가 관광객들과 경쟁에서 승리해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인제 갑둔리에 있는 오층석탑.
신라 부흥을 꿈꾸던 마의태자와 관련된 탑이다. 갑둔리 너머 용소마을에는 마의태자 전설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마의태자권역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마의태자 루트 안내소와 숙박과 식당이 여행자들을 맞는다. 마을 옆에는 희한하게 생긴 폭포가 있다. 이름은 용소폭포다. 하이힐 신고도 걸을 수 있는 나무데크 끝에 있다. 끝물을 맞은 봄꽃들이 암벽에 달라붙어 있고 하트 모양으로 뚫린 구멍에서 폭포수가 떨어진다.
한계산성, 그리고 장수대
신라 부흥을 꿈꾼 마의태자 무리가 정착한 곳이 한계산성이다. 한계령 서쪽, 설악산 국립공원 장수대 입구에 있다. 마의태자는 이곳 산성에서 부흥군을 이끌고 항려(抗麗) 투쟁을 벌였다. 산성은 험준하기 짝이 없다. 등산로도 통제돼 있다. '군사지역=관광지'라는 법칙은 여기서도 통한다. 장수대 입구에서 사방을 돌아보면 첩첩산중 암봉 무리가 좁은 44번 국도를 내려다본다. 고려군에 대한 방어도 공격도 쉬운 길목이다.
이 암봉 너머에 마의태자가 웅거했던 한계산성이 있다. 44번국도 건너편에는 20세기 6·25 전쟁 전사자를 기리는 산장 장수대가 있다.
1000년 뒤인 20세기에도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인민군이 장악한 설악산을 수복하려는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이 승리해 설악산 지역은 대한민국 땅이 되었다. 도로 건너편에 낡은 한옥이 한 채 있다. 이 집 이름이 바로 '장수대(將帥臺)'다. 1959년 국군 3군단장 오덕준이 설악산 전투 전사자들을 추모하며 세운 산장이다. 홍수에도 무사했던 장수대는 지금 폐가로 변했다. 대청마루에는 쓰레기가 뒹굴고 방마다 자물쇠가 잠겨 있다.
1 역사의 패자 견원의 유적지는 왕건에 비해 초라하다
2 역사의 승자 이순신이 보성등 전남일대를 돌며 군사를 모았다
3역사의 패자 마의태자는 이순신의 5 배 정도의 동진 서진 북진을 통해 신라 부흥을 꿈 꾸었으나
불교를 통한 민심얻기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첫댓글 고려에 나라를 기부한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기부한지 43년 후인 978년 고려 경종 3년에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접한 신라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경주에 장례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조정에서 왕의 구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여 이 곳 장단부 고랑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로 장례를 모셨다고 한다. 신라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는 왕릉이다.
여기서 얻을 것이 있다. 백성들이 많은 시달림을 받지 않게 하였다는 점과 왕가끼리 혼인으로 닻줄을 매어 놓아 이탈 못하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왕의 능은 삼팔선 남방한계선 부근에 있으며, 사적 제244호로 1975. 6. 25에 지정 되었다고 한다.
마의태자에게 참모 총장은 맹장군
1김흠돌의 난 (신문왕 개빡쳐서 진골조짐)
2. 김헌창의 난 (왕권 다시 병신됨)
3. 장보고의 난
4. 원종 애노의 난 (나라 개씹창 후삼국 스타트)
고려
1. 왕규의 난 (왕건 죽고 나도 왕해보고싶다)
2. 이자겸의 난 (이후 묘청이 평양가자 우리)
3. 망이 망소이의 난 (향 부곡 소민들도 같이 살자좀)
4. 김사미 효심의 난
5. 만적의 난 (노비출신 무신 말기)
장보고 는 반란 했으나 후세에 추앙받고
정몽주는 태종에게 죽었으나 충의 표상 그럼 마의태자는ㆍㆍ
마의태자 여동생도 불심으로 힘이되어 주었건만
김세영 문경YMCA 사무총장 안내 아래, 이만유 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6일 산양면 행정복지센터를 출발해 고려 공민왕 몽진길인 하늘재, 마전령, 거무재, 미면사지, 헛고개, 노루목, 삽재, 문고개 등 일곱 고개를 지나, 8일 금천교를 거쳐 산양면 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