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271CC33D53093C9421)
순국선열 추모비 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 모아 절하며 순국선열들의
명복을 기원했다.
운영자는,
일제하. 해방. 6.25. 4.19. 5.16. 10.26. 12.12. 광주시민항쟁. 민주화를 위한 시위 등
역사의 굴곡을 함께 하며
살아 왔기에 순국선열을 기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추모비 앞에 서 있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다.
순국선열들의 애국혼이 넘치는 피로 이룩한 우리 대한민국이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 봤다.
순국선열들이 측은한 눈초리로 우리를 보는 듯했다.
땅을 바라 봤다.
순국선열들의 한 맺힌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리당략에 눈이 뒤집혀 조국의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을 보라 !
핵 공격으로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북한을 보라 !
미국의 지원아래 제국주의 시절로 회귀하고 있는 일본을 보라 !
남북한 8천만 국민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간절히 기원했다.
순국선열들이시여 !
당리당략만 생각하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을 일깨워 주소서 !
아 ! 유관순 열사 !
![](https://t1.daumcdn.net/cfile/blog/1111D23A4D685A5814)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였다.(2.8독립선언)
3월 1일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되었다. 이날은 시위가 자제되었다.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부락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음력 3.1)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3.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형기가 절반인 1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09EC3C5129DB4113)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의 보통과 졸업 사진
1996년 이화여고에서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22B9E48530D7AF223)
![](https://t1.daumcdn.net/cfile/blog/21475448530D7B3318)
유관순 열사를 지하 감방에 특별 수감하고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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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 유관순열사 순국뒤 시신토막, 옥중 여성열사들 성고문도 자행
서울신문 | 입력 2006.11.02 09:00
[서울신문]일제가 강점기 당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토막내 훼손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옥에 갇힌 여성 열사들을 성고문한 것으로 확인됐다.이같은 사실은 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 8주년을 맞아 연 학술심포지엄 '3·1운동기 여성과 서대문형무소'에서 밝혀졌다.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여성 열사들의 옥중투쟁과 일제의 잔인한 고문상이 낱낱이 드러났다.'유관순 열사와 서대문형무소'를 발표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유관순 열사를 비롯, 여성들이 받은 고문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밝혔다.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20년 3월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기해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 일로 심한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고, 그해 10월 순국하게 된다.이틀 뒤에야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미스 프라이와 미스 월터가 형무소장에게 시신 인도를 요구하자, 일제는 시신 상태를 세상에 알리지 말 것 등의 조건을 붙여 마지못해 석유상자에 넣은 시신을 넘겨줬다. 김 관장은 발표문 중 '고문방에서 토막살해 설도'라는 소주제에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 머리와 몸통, 사지 등 여섯 토막으로 잘려 있었고, 코와 귀도 잘려 있었다는 기록을 소개했다.'간수들은 유관순이 고문에 못이겨, 아니 고문으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살해 가능성을 언급하는 문헌도 인용했다.일제의 만행은 단순히 물리적인 폭행에서 그치지 않았다.
<중략-기사 내용이 너무 참담하여 여성 인권 보호차원에서-운영자>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대동단 단원이었던 이신애 열사는 서간문과 구술자료에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악명높았던 종로경찰서 미와 경사가 면상을 세게 내리치자 아래턱이 퍽 소리와 함께 왼편으로 돌아가 붙어버렸다. 아이쿠 하려 애를 써도 그때부터 전혀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신애 열사는 옥중에서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전기고문을 받아 손목이 다 타버렸고, 끝내 임신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newsview?newsid=20061102090016778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여섯 토막내 보관한 석유상자
![](https://t1.daumcdn.net/cfile/blog/2155EB50530D80FE18)
-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 -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초혼묘
![](https://t1.daumcdn.net/cfile/blog/1632B4334F1184734D)
이곳이 유관순열사의 초혼묘이다,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열사가 순국하자,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오빠 유우석을 비롯해 스승과 동문들에 의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쓰이게 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가운데 열사의 주검은 흔적도 없이 망실되었다.
이에 그 영혼이라도 편히 잠드시도록 초혼묘를 매봉산 중턱에 마련하였다.
초혼묘는 6각의 뿔형태로 각 면에는 열사의 기도문을 비롯하여 비문이 적혀 있다
.
"地下고문실 본 日 관람객들… 죄인처럼 눈도 못 마주치죠"
남정미 기자
신혜정 인턴기자![](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chosun.com%2Fcs%2Farticle%2F2011%2Ftitle_author_arrow_up.gif)
[오늘 광복절… 서울과 도쿄의 너무 다른 모습 2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日語 해설사들이 본 일본인들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들어와 돌아갈땐 "정말 미안합니다" 매년 6만명 넘게 다녀가
유관순 열사의 감방에선 감정 잘 안 드러내는 그들도 끝내 눈물 흘리고 말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7년째 일본어 해설사로 일하는 구본식(63)씨는 늘 같은 질문으로 설명을 시작한다. "이곳을 누가 지었을까요?"일본인 관람객들은 열이면 열 "모르겠다"고 말한다. 구씨가 "일본 사람이 지었다"고 하면 다들 의아한 눈빛이 된다. "일본 사람이 왜 지었을까요… 조선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서입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극히 차분하고 조용한 일본인들이지만 구씨의 설명이 계속되면 숙연해진다. 동료 일본어 해설사 조성태(72), 이혜섭(60), 이희숙(54), 안경실(52)씨도 똑같이 경험하는 반응이다.
14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관람 온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사람을 좁은 공간에 세워놓는 일제강점기 고문 장비에 들어가 체험하고 있다. 관람객들에게 안내를 하고 있는 일본어 해설사 구본식씨에 따르면 이런 고문 장비들을 본 일본인 관광객들은 대부분 처음엔 믿지 못하다가 나중엔 “정말 미안하다”고 사죄한다고 한다. /윤동진 기자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세워져 일제강점기 '경성감옥'으로 불렸다. 문서로 확인된 것만으로 독립운동가 165명이 숨진 곳이다.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 흔적, 사형장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보기만 해도 몸서리 쳐지는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2010년 6만1244명, 2011년 6만2060명, 2012년 6만2315명, 2013년 6만3425명. 올해는 7월 말까지 벌써 3만1071명이 다녀갔다. 외국인 관람객 10명 중 7명이 일본인이다. 국내 일본 관광객들은 급감했지만 이곳만큼은 일본인들의 발길이 증가하고 있다.이곳에서 처음 조상의 만행을 접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우리 선조들이 정말 그랬어요?"라는 것이다. 안경실씨는 "일본인은 자신들이 꽃을 꺾을 때도 조심스러워하는 민족이라 자부한다"고 했다. 역사관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그들은 고개를 숙인다. "우리가 남의 꽃밭에서 꽃을 망쳤습니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대문 열고 들어와 남의 집 꽃밭을 망쳤습니다."이희숙씨는 "지하 고문실을 본 일본인들의 표정은 정말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일본인들도 지하 고문실을 보면 표정이 굳고 울지 않아도 아파하는 마음이 전달된다"고 했다.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 탄 물을 콧속으로 넣었던 물고문실, 손톱 밑을 날카로운 금속으로 찔렀던 손톱 밑 찌르기 고문 현장이 재현돼 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제자 5명과 함께 찾아온 다케오 후나비키(66) 전 도쿄대 교수도 손톱 고문 장면 앞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누가 일본인에게 이런 것을 가르쳤을까 자문했다"고 말했다. 안경실씨는 "지하 고문실을 보고 나면 대다수 일본인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해설사들과 눈도 못 마주친다"고 말했다. 최고령 조성태씨는 "설명을 듣다가 무릎을 꿇고 제 다리를 붙잡더니 '유루시테 구다사이(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한 일본인 중년남성도 있었다"고 말했다.구본식씨는 "일본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람이 안중근이라는 것에 놀라고, 일본인 교도관들이 안중근의 인품에 감화됐다는 얘기를 하면 일본 관람객들의 눈빛이 흔들린다"고 말했다.어지간해서는 혼네(本音·본심)를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고 마는 곳이 있다. 전시장 맨 마지막 유관순 열사의 8번 감방이다. 이혜섭씨는 "유 열사의 방은 특별히 잔인한 장면은 없다"고 했다. 해설사들은 담담하게 말한다. "지금의 고등학교 2학년인 열입곱 살 소녀였다. 이곳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일본인들은 그의 시신조차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모교 이화여고 교장이 겨우 시신을 수습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덤조차 남지 않았다." 그런 설명만으로도 일본인 관람객들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린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했다가 몇 달 뒤 고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온 일본인 엄마도 있었다.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도 관람 내내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들다가도 유관순 열사 방 앞에만 오면 숙연해진다고 한다. "너희 몇 살이니? 여기 갇혔던 유관순 열사도 너희 나이였어"라는 설명 때문이다.서대문형무소 일본어 해설사들에게 '광복절'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들은 "일본인들에게 고문 현장이나 감옥 등을 설명할 때 '일본인들이 참 독하지만 더 독한 것은 한국 사람들'이라 설명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그렇게 모진 고문을 했음에도 절대 꺾이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나간 선조를 생각하면 광복절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