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9장 미끼는 던져졌다
어쨋든 이 순간 여문량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천표리 유비의 아래 위를 쳐어보았
다.
그의 입술이 기묘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입술사이에서 기묘한 웃음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카카카카...."
찰나, 주위의 인물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단지 웃음 소리 뿐이거늘 기혈이 역탕하고 귓구멍을 송곳으로 파내는 듯한 극통이 전율처럼
일어나는 게 아닌가!
'으....웃음 소리 하나로 기혈을 끓게 하다니 정말 반노환동을 이룬 고수란 말인가!'
점차 중인들의 안색이 밀납처럼 굳어져갔다.
그 순간, 비천표리 옆에 있던 두 명의 혈삼노인 중 체격이 장대한 노인이 오만상을 찡그리
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음을 멈추어라! 놈, 네놈은 대체 누구냐? 열하 땅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
다."
여문량은 웃음을 거두며 그를 응시했다.
"넌 누구냐?"
"이놈! 술수 따위로 우릴 현혹시키지 마라! 감히 노선배인 양 사술을 쓰지만 노부 혈도부(血
屠斧) 곽운(郭熉)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혈도부(血屠斧) 곽운(郭熉)? 이 땅에 노부보고 이놈 저놈할 늙은이가 있나?"
"노부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귓구멍 잘 씻고 들어라! 노부가 바로 염유방(閻幽幇)의 이대호
법 중 일인이신 혈도부 어르신이다. 네놈 이름으 밝혀라! 노부는 무명소졸과 겨루고 싶지
않다!"
여문량은 싸늘한 표정으로 혈도부를 노려보았다.
"후후후.... 혈도부, 정 알고 싶으면 염라대왕 앞에 가서나 수소문 해봐라."
말이 끝나자마자 여문량은 몸을 빙그르르 회전시키며 어느새 뽑아든 대천묵검으로 참룡마인
(慘龍魔刃)을 펼쳤다.
슈슈슈슈....
귀신이 통곡하는 듯한 무서운 소리와 함께 싸늘한 묵광이 혈도부의 허리를 향해 뻗어 나갔
다. 그 묵광은 천지를 칙칙한 어둠으로 몰고가기 충분했다.
"헉!"
너무나도 쾌속한 그의 검법에 혈도부는 다급한 신음을 내뱉으며 도끼를 뽑아들어 허공에 난
무시켰다.
휘이잉--!
검과 도끼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무수한 불꽃이 허공에 튀며 두 사람은 서
있던 자리에서 반대편으로 바꾸어 섰다.
"하하.... 혈도부, 제법이구나, 그러나 요행은 두 번 있지 않는다."
잔혹한 미소를 입가에 담은 여문량은 혈도부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으으으!"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혈도부는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너무나도 무서운 여문량의 안광에 혈도부의 안색은 완전히 사색(死色)이 되어버렸다.
"한번 더 받아 보아라!"
여문량의 입에서 기합소리가 터지며 그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순간, 상상도 못할 만큼 무서운 검광이 혈도부의 정수리를 쪼갤 듯이 내리쳐 왔다.
사색이 된 혈도부는 급히 신형을 좌로 움직여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몸이 피하기도 전에 대천묵검의 무서운 묵광이 그의 가슴을 가르고 지나간 것이다.
"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을 남기고 혈도부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복부를 움켜잡은 채 비틀거
리며 일어나고 있는 혈도부의 안색은 엄청난 고통으로 처절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는 뜨거운 선혈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혈도부는 촛점없는 눈으로 자신의 발 아래 떨어져있는 도끼를 주시했다. 그의 도끼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져 있었다.
혈도부는 처절한 안색으로 여문량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나는 분명히 검을 막았는데..."
여문량은 대천묵검의 끝에서 떨어지고 있는 선혈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며 냉혹하게 중얼
거렸다.
"막으면 무얼 하겠느냐? 막는다고 해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안타가운 일이다. 노부
는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 노부의 신조를 깰 생각이 없다."
"신조(信條)...?"
"후후후....막지 말라! 막는 자 죽음 뿐이다!"
"크흐흑! 개같은 신조군..."
그것이 혈두부 곽운이 마지막으로 흘린 말이었다. 이어 그의 몸은 썩은 고목나무 쓰러지듯
땅으로 꼬꾸라졌다.
바로 그 순간 혈도부 곽운과 함께 있었던 깡마른 체격의 혈삼노인의 얼굴에 아연함이 스쳤
다. 그는 도저히 믿기가 힘들다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이때 여문량은 그를 바라보았다.
"네놈은 또 누구냐?"
그의 버릇없고 안하무인격인 말투에 혈삼노인의 안색이 똥색으로 변했다. 그는 도저히 노화
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씩씩거렸다.
"이놈, 죽거든 염라대왕에게 가서 말해라! 응조왕(鷹爪王)이 보냈다고...!"
응조왕(鷹爪王) 누남진(累南辰)은 조금 전 죽은 혈도부 곽운과 함께 염유방(閻幽幇)의 이대
호법 자리에 있는 자다.
그의 손바닥이 뒤집어지며 팔소매 속에서 튀어나온 갈고기 같은 무기가 손에 착용되었다.
차착-!
그 모습은 마치 새의 발톱과 같았고 검은 빛을 발하는 세 갈래 갈고리에서는 죽음의 기운이
사악하게 흘러나왔다.
응조왕은 양손에 갈고리를 착용하자마자 몸을 날려 여문량의 가슴을 쪼개어왔다.
"혈룡탐조(血龍探爪)!
쐐애애액--
응조왕 누남진이 쏘아낸 예기가 여문량의 가슴을 격중하려는 찰나 여문량은 코웃음을 흘리
며 슬쩍 소매를 휘둘렀다. 순간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응조왕 누남진의 막강한 예기는 물에 빠진 돌처럼 순식간에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응조왕
누남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안면의 근육을 부르르 떨며 여문량를 응시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분명 사술(邪術)이다!"
여문량은 싸늘하게 웃으며 응조왕 누남진의 눈을 쳐다보았다.
"누남진! 새 새끼마냥 짹짹거리지 말고 노부의 검을 받아 보아라!"
여문량의 오른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대천묵검에서 쏟아져 나오는 싸늘한 검기(劍氣)가 무지개같은 현란한 빛을 뿌리며 응조왕
누남진의 몸을 덮쳤다.
이 가공스러운 검기에 응조왕 누남진의 얼굴이 대변했다.
그는 번개같이 양손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하하하.... 발톱만 세울 줄 알았지 이제보니 날지도 못하고 도망만 다니는 닭새끼였구나!"
여문량은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더니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응조왕 누남진에게 무서운 속
도로 접근했다.
그는 달려가던 그 기세에서 그대로 몸을 핑그르르 회전시키며 신랄한 검강을 뽑아냈다.
쩌렁--!
"헉!"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응조왕 누남진은 전력을 다해서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하하... 날 줄도 알았군, 이제 나냐? 그러나 늦었다!"
기이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여문량의 몸도 응조왕 누남진을 따라 번개같이 허공으로 비
상했다.
"광풍단심(狂風丹心)!"
간신히 검강을 피하고 땅에 내려선 응조왕 누남진은 하늘에서 무서운 기세로 내려꽂히는 여
문량의 검날을 보자 혼비백산(魂飛魄散)하고 말았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지만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파팍!
무서운 음향과 함께 대천묵검이 응조왕 누남진의 몸을 내려치는 순간 누남진의 동공이 순간
적으로 크게 벌어졌다.
"크악!"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응조왕 누남진은 무거운 신음을
뱉아내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한줄기 붉은 선(線)!
붉은 선은 사타구니까지 주르륵 타고 내려가고 있었고 이 순간 응조왕 누남진은 정수리에서
부터 턱 끝까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으으....내가 쪼개지는 건가?"
그 순간 정말 그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다.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수박마냥 붉은 오장육부
를 드러내며 갈라지는 몸뚱아리는 이내 좌우로 나누어져 쓰러졌다.
촤아앗-!
피가 튄다. 일순 장내에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여문량이 비천표리 유비를 예리하게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죽은 놈들의 두목이냐?"
"으...."
비천표리는 공포어린 시선으로 여문량을 응시했다.
여문량은 다시 냉혹히 물었다.
"조금 전 죽은 놈들이 염유방(閻幽幇) 사람이라고 헛지랄들 하던데 네놈은 귀경염왕(鬼磬閻
王) 유음하(柳陰河)와 어찌 되느냐? 그놈은 아직 살아 있느냐?"
"귀경염왕 유음하 어르신은 소생의 할아버지십니다. 아직 건재해 계십니다."
"그으래, 크크크! 다행이군, 왕년에 그 놈에게 빚진 것이 있어 혹시 죽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용케도 살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군. 가서 전해라! 초중산(楚重山)의 빚은 받으러 죽음의 사
신이 왔다고..."
"알...알겠습니다. 헌데 누구시라고...?"
"나? 크크크....노부는 마뢰진천(魔雷震天)이다. 알겠느냐, 꼬마야!"
순간,
"마뢰진천!"
"허억! 설마 백년 전 죽었다던 몽고(蒙古)의 벼락신(雷神)?"
중인들은 순간적으로 공포를 절실히 느끼며 부들부들 떨며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얼굴은 삽시간에 죽음의 공포가 덮여 버렸다.
-마뢰진천(魔雷震天) 오고타(烏高打)!
그는 백 년 전 흥안령 산맥 건너 몽고 일대를 주름잡던 일대혈마(一代血魔)였다.
흔히 벼락신(雷神)이라 불리울 정도로 성질이 불같고 흉폭했으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닥치
는대로 박살을 내는 흉마(凶魔)였다.
마뢰진천 오고타에겐 몽고 땅이 비좁았다.
그는 자신의 무위를 과시하고자 흥안령을 따라 동쪽으로 전진하며 곳곳에 혈풍을 일으켰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혈풍은 끝내 열하 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나 열하 땅에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귀경염왕(鬼磬閻王) 유음하(柳陰河)!
당시 약관 이십 세의 혈기왕성한 청년고수였던 그는 염유방(閻幽幇)이란 신흥방파를 열하
땅 북방에 세웠다.
그 무렵 열하 땅엔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방파가 세워지고 있었다.
백마혈교의 칠대마왕과의 싸움으로 난다긴다 하는 고수들이 죄다 죽음을 당해 무인지경(無
人之境)과 진배없는 열하 땅에 먼저 자리를 잡은 자가 그 지방의 패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채 세력을 갖추기도 전에 흥안령(興安嶺)을 넘어 몽고의 벼락신이 열하 땅으로 진입
한다는 소식을 듣자 유음하는 전전긍긍(戰戰兢兢)했다.
지리적으로 그가 세운 염유방은 흔안령 산맥 자락 끝에 위치해 있어 마뢰진천이 열하 땅으
로 들어서는 길목인 것이다.
유음하는 이대로 주저않을 수 없다 생각했고 그는 의형제를 맺은 여섯 형제들을 불러모아
흥안령 산맥에 위치한 초중산(楚重山)에 겹겹이 함정(陷穽)을 만들었다.
불같은 성격만 앞세울 뿐 미련하기 짝이 없는 마뢰진천은 그들이 친 함정과 천라지망에 갇
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천장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염유방의 기세는 욱일승천(旭日昇天)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백년 만에 돌연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반노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고수로 변해 나타났으니 어찌 오금이 졸여지지 않으랴?
그러나 중인들은 설마 눈 앞에 인물이 여문량이 변신한 모습이라고는 추호도 의심치 못했
다.
기실 여문량이 마뢰진천 오고타로 변장하고서도 이처럼 여유를 부리는 것은 그의 사체(死
體)를 용황성에서 거두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마뢰진천이 떨어진 절벽 아래 천중(天中)
신비(神秘)인 용황성에서 만들어 놓은 별원(別院)이 자리해 있었다.
그곳 별원은 여문량이 기거하는 무창 거용장과 같이 대륙 곳곳에 세워둔 용황성의 분타(分
陀) 중 하나로 대륙 동북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는 역활을 했다.
그런 경로로 마뢰진천의 사체는 용황성에 의해 치워졌으니 여문량이 마뢰진천으로 변장하고
도 여유를 부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순간 비천표리 유비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자르르 흐르
는 것을 느꼈다. 다행한 것은 눈 앞에 마뢰진천이 자신을 살려 주었다는 것이다.
'으.... 어쩐지 어마어마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했더니 사신을 건드렸구나.'
비천표리는 백지장같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해동막벌 수하
들을 향해 외쳤다.
"철수한다!"
"가....가자!"
그러자 해동막벌의 수하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을 토해내며 뒤질세라 전력으로 신형을 날렸
다.
이윽고 그들의 신형이 순식간에 화해금궁에서 사라져버렸다.
여문량은 묵묵히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는 그의 입술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열화천신, 내 손을 빌려 비천표리를 죽이고 염유방의 기세를 꺽어놓을 생각이었지만 미안
하오. 비사각도 필요악이지만 해동막벌이 너무 커지는 것 또한 난 볼 수 없소.'
분명 그는 해동막벌 안에 흐르는 기이한 암류(暗流)를 아는 듯 싶었다.
이때 채운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노선배님! 위기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문량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로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노부는 단지 왕년에 빚이 있어 그 빚은 받으러 열하에 들어서던 중 싸우
는 소리가 들려서 왔을 뿐이다. 네 덕분에 간악한 유음하(柳陰河) 소식을 들었으니 서로 좋
았지 않느냐?"
"그럼 노선배님께서는 지금 원한을 갚기 위해 유음하를 찾아가시는 길이십니까?"
순간,
싸아앗-!
여문량의 전신으로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앗!"
일순 채운지는 그 살기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비명을 토하며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태어나 이처럼 지독하고 무서운 살기는 처음이었다.
살갗이 마구 터지고 온몸이 난자 당하는 듯한 전율에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흐흐흐....원한...깊지...무려 백년 동안 곱씹고 씹어온 원한인데 어찌 깊지 않겠느냐, 크흐흐
흐흐..."
꾸울꺽!
마른 침 넘어가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채운지는 침을 삼키며 떨린 가슴
을 안은 채 조심스러럽게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하지만 조심하셔야 해요."
"조심? 크핫핫핫! 염유방 같은 떨거지를 조심하라고! 크핫핫핫핫!"
"노선배님, 염유방 때문이 아니에요. 해동막벌 때문이에요."
"해동막벌? 그 되먹지도 않은 발해 족속들 말이냐?"
"예, 염유방이 해동막벌의 휘하에 들어간 지 벌써 십 년이 넘었어요."
"크크크, 계집, 가랑이 사이로 냄새나는 네년들을 구해 주었다고 노부를 위해 한 말로 알아
듣겠다. 노부는 감히 노부 앞에서 노부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를 여태껏 살려 두지 않았다.
알겠느냐?"
"허억! 조, 조심하겠습니다. 저어... 노선배님을 안으로 모시고 싶은데..."
"크크크... 됐다! 노부는 한가하게 계집 시중을 받을 시간이 없다. 유음하, 그 놈과 결탁해 노
부를 시해하려 했던 자들! 그들의 피를 마시기도 바쁘다. 크핫핫핫!"
돌연, 여문량은 살기 충만한 웃음을 토하며 신형을 날렸다.
"잠깐...."
채운지는 황급히 외쳤다. 그러나 이미 여문량은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채운지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사라져가는 여문량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풍비행술(無風非行術).... 정말 저 인간은 반노환동을 이룬 절대고수란 말인가? 그게 사실
이면 정말 엄청난 무공을 지닌 자가 이 땅에 나타난 것이다."
이때, 채운지 옆으로 유화선녀 선우설이 다가섰다.
"진정 믿기 힘들어요. 그가 몽고의 벼락신이라면 어림 잡아도 백 오십여 세가 넘은 사람인
데 아직까지 저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니...."
이미 여문량의 모습은 그들의 시야에서 아득히 사라지고 없었다.
* * *
해가 거의 질 무렵 여문량은 안사산을 넘어 요녕(遼寧) 땅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몽고의 벼락신이었던 마뢰진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석양을 등진 채 동쪽으로 계속 신형을 날려갔다.
이윽고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요녕 땅에서 가장 험하다는 적산(赤山) 앞이었다.
땅은 물론 바위까지 붉은 빛을 띠고 있는 이곳 적산은 오랜 옛날부터 마적(馬賊)무리들의
산채가 있어온 곳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적산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그의 눈에 거대한 장원(莊院)이 하나 나
타났다.
'음, 저곳이 바로 염유방주 유음하와 의형제를 맺은 냉혼도(冷魂刀) 곡가홍(谷家汞)의 산채
렸다... 미안한 일이지만 냉혼도 곡가홍, 그대는 날 위해 희생이 되어야겠다.'
웅장한 장원의 입구를 응시하는 여문량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감돌다 사라졌다.
-비도신영(飛刀神營)!
이곳 비도신영은 요녕 땅에서는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는 마적 무리들이다. 해동막벌과는
상당한 친분을 지닌 요녕의 세력으로 적산 일대를 휘어잡고 있다.
비도신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철문(鐵門)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여문량은 주위를 쭉 훑어본 다음 대뜸 철문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꽈앙-!
철문이 아작이 나며 유리병처럼 깨진 철문 조각들이 비산했다. 실로 끔찍스러울 정도로 무
서운 위력이었다.
여문량은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을 담은 채 서서히 문안으로 들어갔다. 문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눈에 몇 구의 시체가 보였다. 대문 뒤에 서 있다가 졸지에 변을 당한 놈들이었다.
그때 안에서 오십 정도의 홍의노인이 문 박살나는 소리를 듣고 나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안색이 대변했다.
'이럴 수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문량에게 물었다.
"귀하는 누구길래 우리 비도신영에 와서 이런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홍의노인은 상대의 무공이 뛰어남에 놀라 감히 경거히 행동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
었다.
여문량은 홍의노인의 말에 나직한 코웃음을 터뜨리더니 곧 살기에 찬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
다.
스팟-!
홍의노인은 여문량의 칼날같은 눈초리에 움찔하더니 결국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
다.
이 순간 여문량이 냉기가 풀풀 날리는 살음을 발했다.
"이곳이 분명 비도신영이렸다."
"그렇소이다만..."
"곡가 놈은 어디 처박혀 있느냐!"
"곡가라면....영주님을 말하시는 거요?"
"그 놈 말고 또 곡가가 이곳에 있느냐?"
"영주님은 지금 안계시니 물러갔다가 나중에 다시 아오시오."
"크크크...벌써 냄새를 맡고 도망을 쳤군, 곡가 놈이 없어도 상관없지,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
들어야겠다."
이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병기를 든 채 여문량를 에워싸고 있었다. 여문량은 이들을 벌
써 발견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이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장한들이 옆으로 쭉 비켜섰다.
"비켜라!"
그리고 그 사이로 다섯 명의 노인들이 걸어나왔다.
대개 오십 대에서 육십 대 정도의 노인들로서 신광이 번뜩이고 태양혈이 불쑥 튀어나온 것
으로 보아 일류고수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 중 제일 가운데에 있는 약 육십 세 가량의 청의노인이 서서히 걸어나오며 짤막하게 말
을 뱉아냈다.
"강당주(羌堂主)는 물러나라. 내가 저 자와 얘기해 보겠다."
말을 한 노인의 눈에 부숴진 대문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 그는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쳐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저 거대한 철문이 유리인양 산산조각이 나다니 도대체 저 놈은 누구일까?'
이때 청의노인 옆으로 다가간 홍의노인이 그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청의노인의
안색이 홱 변했다.
곧 안색을 가다듬은 청의노인은 차가운 눈으로 여문량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네놈이 영주님을 찾아왔다고? 그리고 본 비도신영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발광을 했느
냐?"
여문량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크크! 웃기는 족속들이군, 밤이 온다. 빨리 끝내고 쉬고 싶다. 모조리 덤벼라!"
이 엄청난 광언(狂言)에 청의노인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곧 그는 음침한 괴소를 터뜨리며
으시시하게 부르짖었다.
"흐흐흐.... 완전 미친 놈이군, 대체 네놈은 누구냐?"
여문량은 그의 말에 별 흥미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짤막하게 대꾸했다.
"마뢰진천!"
순간 청의노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주위에 있던 장한들도 안색이 공포로 질린 채 주
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벌써 이곳까지 마뢰진천의 등장이 알려져 있었고 그 일 때문에 냉혼도 곡가홍이 장원을 떠
났다.
그러니 이들이 어찌 공포를 느끼지 않을소냐?
"정녕 마뢰진천이냐?"
청의노인의 말에 여문량은 공포로 질린 그들의 모습을 훑어보며 음침하게 대꾸했다.
"크크크, 잔말들이 많구나! 오늘이 바로 비도신영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날이다."
여문량은 서서히 대천묵검을 뽑아들었다.
벌써 주위에는 수십 개의 횃불이 준비되어 있었다. 불빛에 비친 여문량의 냉혹한 모습은 마
치 죽음의 사신(死神)같았다.
"음...."
나직이 신음을 흘리는 청의노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순간 청의노인의
입에서 고함이 떨어졌다.
"쳐랏!"
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수십 줄기의 무서운 장풍이 여문량의 몸을 향해 폭풍같이 쓸어왔
다.
꽈아아아....꽈아앙...
슈슈슈슉! 추아아앙---!
"크크크!"
여문량은 음침하게 웃으며 대천묵검을 든 채 무서운 속도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기 시작
했다.
순간 그의 회전하는 몸에서 수십 줄기의 검강이 작열하듯이 연속으로 터져나왔다.
파파파팍!
"아아악!"
"으악!"
무서운 파공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동시에 십여 명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것을 바라보던 청의노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 여문량은 피맛을 본 흡혈귀마냥 득달같이 다섯 명의 노인에게로 덮쳐들었다.
"후후후.... 죽어랏!"
여문량의 손이 한 번 번뜩이자 청의노인 옆에 있던 노인 하나가 줄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붕 뜨더니 옆에 있는 벽에 정통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퍽!
머리 깨지는 끔찍스러운 소리와 함께 처참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이것을 본 청의노인의 얼
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곧 무서운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러왔다.
"이놈, 죽어랏!"
동시에 나머지 세 노인도 합공을 시작했다.
그들의 합공을 담담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여문량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순간, 그의 몸이 번개같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광풍단심(狂風丹心)!"
파파팍!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한 노인의 몸이 자신의 무기와 함께 그대로 양단되고 말았다.
"으, 잔인한 놈!"
남은 세 노인의 얼굴에는 처절한 분노의 빛이 가득했다. 한 조각 남아있던 두려움마저도 완
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으아아아!"
"함께 죽자!"
그들 세 노인은 완전히 육탄으로 여문량을 향해 덮쳐왔다. 여문량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
이 돌았다.
"마지막이다."
나직한 음성과 함께 그의 대천묵검이 미친 듯이 광란하기 시작했다.
"참룡마인(慘龍魔刃)!"
츠츠츠....
상상도 불허할 만큼 끔찍스러운 파공음과 함께 대첨묵검에서 뻗치는 무서운 묵광이 허공을
완전히 뒤덮었다.
"악!"
"으...너무 강...커억!"
순간, 세 마디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무수한 핏줄기가 허공을 수 놓았다.
투투툭!
땅에 떨어진 세 구의 시신은 갈갈이 찢겨져 있었다.
그들의 처참한 시신을 응시하던 여문량은 대천묵검의 검신에 묻은 피를 옆에 있는 시신 옷
자락에 쓱 닦았다.
이어 검집에 꽂은 다음 그는 주위를 쭉 훑어보았다.
이미 아무도 없었다. 모두 도망을 친 것이다.
'그래, 그렇게들 도망을 쳐서 곳곳에 소문을 내는거다. 몽고의 벼락신 마뢰진천이 백 년 전
원한을 갚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그는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그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미끼는 던져졌다."
▣ 제30장 신비의 절대고수(絶代高手)
팔면성(八面城)-
요녕 땅에 위치한 이곳 팔면성은 다른 요녕 땅의 도성(都城)들과는 그 규모나 성곽이 크게
다르다.
돌과 나무를 흙을 이용해 엉기성기 세워 올린 성곽이 아닌 중원 대륙에서 볼 수 있는 잘 다
듬어진 돌과 회백분을 이용해 만든 견고하기 짝이 없는 성곡이 다른 곳과 다른 첫 번째요,
팔각(八角)을 두고 그곳에 팔문(八門)을 둔 것이 두 번째 다른 특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다른 곳과 비교되는 점은 이곳 팔면성 성안이 무척 번화하고 도로나 고
루거각들이 잘 정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곳 팔면성에 들어서면 중원의 성에 온 듯한 느낌
을 준다.
-대륙객잔(大陸客棧)!
중원식 객잔으로 주루(酒樓)와 기루(妓樓)까지 겸하고 있다.
막 석양이 지는 시간인지라 대륙객잔의 주청(酒廳)은 빈틈없이 주객들로 메워져 있었다.
이층의 한 구석에 천하절륜의 백의청년 한 명이 좌중의 시선을 받으며 자리하고 있었다. 그
는 역용을 풀은 여문량이었다.
이때 여문량의 안색은 다소 초조(焦燥)와 긴장(緊張)이 어려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설마 해월쌍화가 혈관음에게 당했단 말인가?'
여문량은 지금 이곳 대륙객잔에서 해월쌍화를 만나기로 했다. 해월쌍화는 자신의 출현을 혈
관음에게 전하고 그녀와 만날 장소를 정한 후 이곳으로 연락을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날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절로 긴장된 것이다.
'내겐 시간이 없다. 내일 중으로 비사각 총단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관동무림과 그들의
동맹을 깰 수 없다.'
시간이 촉박했다.
이틀 후 비사각으로 관동무림의 고수들이 대거 들어오게 된다. 그들의 동맹(同盟)을 깨기 위
해선 여문량 역시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그들과 어울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몽
고의 마라진천 오고타로 변장을 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고수라도 더 초빙(招聘)하기 위해 그들이 분명 자신에게 모종의 추파를 던져올
것을 기대하면서...
'늦어도 오늘 밤 안으로 신정단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혈혈단신으로 비사각을 상대한다는
것은 기름을 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진배가 없다.'
그는 주위를 살펴 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해월쌍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명의 인물이 대륙객잔의 이층에 모습을 나타냈다.
일신에 흑의(黑衣)를 걸치고 등 뒤로 검은 색의 검을 멘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흑의 중년인은 여문량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웬지 친근한 분위기의 미소였다.
"...."
여문량 역시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일순 흑의중년인은 여문량 앞에 이르러 말문을 열었
다.
"젊은이, 같이 합석을 해도 좋겠소?"
공교롭게도 빈 좌석이라고는 여문량의 탁자 밖에 없었다.
아니 다른 빈 좌석이 있다 해도 아마 흑의 중년인은 여문량의 자리에 와 합석을 청할 정도
로 그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여문량은 고개를 끄덕여 합석할 의사를 밝혔다. 이윽고 그들은 나란히 자리를 했다.
문득 흑의중년인은 여문량을 향해 나직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사실은 젊은이의 기품이 너무도 훌륭하여 나도 모르게 끌려온 것이외다."
솔직담백했다. 여문량은 담담한 미소로 답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흑의 중년인은 정색을 하며 가볍게 포권을 했다.
"본인은 이단황(里段皇)이라 하오. 젊은이의 대명은 어찌 되는가?"
"여랑(呂郞)입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대인, 조심하십시오, 그 이단황이라는 인물은 무서운 고수입니다."
여문량의 귓전으로 다급한 해월 양옥의 전음이 파고 들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열흘 전 열하 땅에 나타나자마자 비사각
열하지부인 십절문(十絶門)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십절문을 초토화시켰다고...그것도 단신으로...!'
여문량은 내심 흠칫하고 말았다.
-십절문(十絶門)!
비사각이 중원 진출의 교두보(橋頭堡)로 만든 지부(支部)로 그곳에는 비사각 내의 정예 고
수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그런 그곳을 단신으로 초토화시켰다는 것은 눈 앞의 흑의 중년인의 무위를 상상케 하는 것
이었다.
'비사각과 적대 관계를 지닌 절정고수의 등장은 오히려 내겐 호재(好材)로 작용된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의 등장으로 가장 골아플 곳은 비사각! 누굴까?'
그러자 그는 겉으론 조금의 별다른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 무렵 해월 양옥의 전음이 계속 되었다.
"대인, 그가 무슨 의도로 대인께 접근하는지 그 속을 모르니 각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
"소녀는 대인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소녀들을 찾지 마십시오, 괜히 그가 눈치를 챈다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혈관음을 만났습니다. 적당한 기회를 보아 혈관음에게 모시고 가겠습니
다."
'다행이군, 행여 혈관음을 못만나고 떠날까 우려했었는데 하늘이 돕는군.'
이 순간 여문량 뇌리로 해월쌍화가 말해준 현 신정단(神精團)의 정황이 스치고 있었다.
-혈관음(血觀音) 선유경(善柔瓊)!
그녀는 신정구기 가운데 토목기관학(土木機關學)과 암기(暗器)의 달인인 묘수천작(妙手天爵)
의 후예다.
이십 년 전 열일곱 나이로 열하와 요녕, 만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신정단의 후예들
을 찾아 나선 그녀는 요북(遼北) 땅에서 천불파황검의 후예인 고국창(高國昌)을 만났다.
혈기 왕성한 약관 나이의 고국창은 그녀의 뜻에 동참해 두 사람은 또 다른 신정단의 후예들
을 아 다니는 동시 신정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신정구기 가운데 세 사람의 후예가 뭉쳐 삼백여 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이끄는 새로운 신정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혈관음 선유경은 재색(才色)을 겸비한 기녀(奇女)다. 그녀는 열강(列强)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들이 살아남으려면 좀 더 막강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
었다. 해서 정식으로 개파선언(開派宣言)을 하지 않고 세력 확장과 옛 신정단의 후예들을 찾
는 데에 주력했다.
그 덕에 면산 선학봉에서 만음소파의 진전을 잇고 있는 해월쌍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유경과는 달리 해월쌍화는 변질된 신정단을 탐탁치 않게 보는지라 선뜻 새 신정단에 가입
하지 않았고 선유경은 시간을 두고 그녀들을 회유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문량은 해봉 양옥의 전음을 듣고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보니 그녀들이었구나.'
주청(酒廳) 구석진 자리에 부녀(父女)로 보이는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과 십여 세의 소녀가
자리한 탁자가 언뜻 뇌리를 스친 것이다. 그때 이단황이 여문량의 안색을 살피며 말문을 열
었다.
"젊은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오?"
여문량은 급히 신색을 바꾸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선배님의 모습을 대하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일순 이단황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무엇이 이상하오?"
여문량은 그저 떠오르는 대로 적당히 대꾸했다.
"웬지 낯설지가 않고 흡사 혈육같은...."
이단황은 찰나지간 수중의 술잔을 꽉 움켜쥐며 부르르 충격의 경련을 일으켰다.
"...."
격동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차갑기만 하던 두 눈에 뽀얀 안개같은 것이 서렸다. 그러자 그는 응犬밗그 격동을 추스렸다.
이 무렵 냉막하던 그의 안색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젊은이, 나 역시 젊은이에게 끌리는 점이 많네, 젊은이의 의향만 괜찮다면 소형제라 부르고
싶은데..."
그의 음성 밑바닥엔 따스한 정해(情海)가 흐르고 있었다.
또한 여문량 역시 왠지 그에게서 기이하게 받아들여지는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본지 일각도 안 되거늘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친근감이 느껴지다니.....기이한 일이군, 이런
일이 없었는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첫인상이 과히 좋은 이단황은 아니다. 오히려 가까이 하기 꺼려지
는 차가운 인상의 그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 혈육인 양 아무런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문량은 그것이면 족했다.
"물론입니다. 형님!"
"고맙네...."
이단황은 부지중 여문량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대체 이단황은 무슨일로 여문량에게 접근했으며 이토록 격동에 겨워하는 것일까?
아무튼 호형호제(呼兄呼弟)하게 된 두 사람은 술병을 거듭 비워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헌데 이상한 점은 서로 의(義)를 통하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신분이나 과거에 대해 일언반구도 나누지 않았다.
여문량은 여문량 나름대로 그의 정체가 미심쩍어 말을 삼가했지만 이단황 역시 자신의 내력
에 대해선 꺼내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자연 그들의 대화는 현 강호 무림과 중원 대륙, 새외 변방에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상황에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와 이야기를 거듭하면서 여문량은 이단황이 뜻밖으로 진정한 대륙인(大陸人)의 기질(氣
質)을 지녔음을 알았다.
그는 백도인물은 아니다. 하나 중원 대륙에 일어나는 혈풍과 새외의 긴장에는 상당히 민감
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문득 여문량은 현 중원 무림의 흐름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 입을 열었다.
"형님, 소제는 중원을 오랫동안 떠나 있어 근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형
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벌써 중원 무림을 떠나온 지 백여 일에 달한다.
뇌탑(雷塔)의 붕괴 이후 그는 우연치 않은 기회에 황궁의 천명어사대인이 되어 이곳까지 오
게 되었으니 중원 무림의 변화를 알리 만무하다.
그러자 갑자기 이단황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단황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아 침잠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우, 지금의 중원 무림은 차라리 아수라장이라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심각할 정도가 아니네. 팔황천세의 주도가 깨진 중원은 세 개의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모했
네."
"....!"
"강호인들은 그들 세 세력을 혈세삼앙(血洗三殃)이라 부르네. 대륙을 피로 씻어내는 세 개의
재앙이란 뜻이지..."
"혈세삼앙..."
"우선 일월문과 염사각이 동맹을 맺었네. 일월염사맹(日月閻死盟)이 바로 그 중 하나네."
"헉!"
여문량은 크게 놀랐다.
-몽환검마(夢幻劍魔) 설강(薛姜)!
-승천마도(昇天魔刀) 정송화(鄭松和)!
각기 일월문과 염사각을 이끌어오던 절대마종(絶對魔宗)들인 그들이 동맹을 맺었다.
문득 여문량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매선(白梅船)에서 여문량에게 죽음을 당한 일월문 식시귀마단주 오행천마들
의 말이었다.
당시 그들 병기엔 염사각의 살수들만이 사용하는 칠엽살독(七葉殺督)이 발라져 있었고, 오행
천마 중 천리독행(千里獨行)이 직접 일월문과 염사각이 연합을 이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자 여문량은 해연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물
었다.
"그럼 나머지 두 세력 가운데 하나는 새외삼패천이겠군요?"
"아우 말대로 비사각(毘死閣), 광사풍(狂沙風), 무영살막(無影殺幕)의 새외삼패천이 또 하나
이며 마지막 하나는..."
이 순간,
스팟-!
말을 끊는 이단황 눈에서 실로 오금을 졸이게 하는 무시무시한 살광이 뻗어나왔다.
그는 살기를 질겅질겅 씹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봉래도와 백마혈교네."
"으음....!"
여문량은 신음했다.
'묘음희, 용문산 지하에서 백마혈교의 유혼환사가 무공을 익히는 것을 보고 대강 짐작을 하
고 있었지만 결국 그녀가 유혼환사를 앞세워 피바람을 일으켰군.'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직접 유혼환사와 겨뤄 보기도 했던 그가 아니던가?
그러는 순간 그의 시선은 아직도 살기를 머금고 있는 이단황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대체 왜 이토록 격동하는 것일까? 묘음희와 철천지 원한을 가진 것인가? 아니면 백마혈교
쪽인가?'
하나 선뜻 물어볼 수 없었다. 여문량은 그 스스로 말을 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흘러 살기를 누그러뜨린 이단황은 더 이상 봉래도와 백마혈교에 대한 말을 하지 않
고 말을 방향을 교묘하게 돌리고 있었다.
"그 외 소수 정예고수로 구성된 십방천영철형대, 미약하지만 마도무림천하에 유일한 백도세
력인 호정천위(護正天衛)가 있네."
"호정천위? 형님, 그럼 구대문파와 사대세가가 강호에 나섰습니까?"
"그들이 아니네. 호정천위는 구대문파와 사대세가가 아닌 약소 백도인들의 조직이네. 흔히
백의천맹이라 불리웠던 그들이 뇌탑과의 결전 이후 홀연히 강호에서 사라지거나 봉문하자
많은 백도의 문파들이 일월염사맹과 봉래도, 백마혈교, 새외삼패천의 표적이 되어 멸문되거
나 병탄되었네. 어떤 문파는 문파의 명맥을 잇기 위해 스스로 한 곳을 택해 투항을 할 지경
에 이르렀네. 그러자 남은 세력들 가운데 몇몇이 결사항쟁(決死抗爭)의 뜻을 지닌 채 호정천
위대를 구성한 것이지만... 너무 미약하지... 혈세삼앙은 아예 그들을 거들더 보지도 않네."
"음....안타까운 일이군요."
나직이 신음을 하는 여문량의 내심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대체 백의무성과 목훈왕자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어부지리를 얻기 위해 그들 마세들
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여문량은 목훈왕자의 속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마냥 기다리기엔 새외 변방의 움직임이 너무 민감하지 않은가?
중원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이곳 열하 땅에 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데 언제까지
기다릴 것인지 사뭇 궁금해졌다.
'시간이 없는데... 중원 무림이 안정을 되찾아야 대명 역시 안정되거늘... 목훈왕자,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 것이오?'
-목훈왕자(穆焄王子)!
그를 중심으로 한 백의천맹의 생존자들은 과연 무엇을 꾀하고 있을까? 그들에 대한 의혹과
걱정을 하던 여문량은 일순 떠오르는 것이 있어 급히 이단황에게 물었다.
"참! 형님, 신녀궁(神女宮) 소식은 없읍니까?"
"산화신녀가 이끄는 신녀궁 말인가?"
"예, 산화신녀는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그런 그녀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
니다."
"그 점에 대해선 많은 억측이 나돌지만 정확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네 그저 그녀들은 중립(中立)을 지키고 있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네."
"중립... 상태를 좀 더 지켜보다가 유리한 쪽에 손을 들어 줘 이득을 보겠단 얄팍한 수군요."
그렇게 말하는 한편 그의 뇌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녀궁은 북혈성과 결탁했다. 결국 북혈성의 무황은 아직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기 때문
에 조용히 침묵하고 있단 말인데...'
그는 아직도 북혈성 성주가 무황이라 믿고 있었다.
'하루 빨리 이곳 일을 마무리 짓고 중원으로 들어가야겠다.'
이윽고 그들 두 사람은 중원 무림 정세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그들 탁자에는 빈 술병만 쌓여갔다.
여문량은 이단황과 어울려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유쾌한 술좌석을 가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밤은 어느덧 자정에 까지 이르러 있었다. 순간 이단황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아우, 이 우형은 일이 있어 그만 일어나야겠네.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세."
"형님, 다시 만날 때까지 몸 보중하십시오."
"하하하. 아우도 건강하시게."
이윽고 이단황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떠나갔고 여문량도 서서히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
했다.
그는 힐끔 주청 구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여전히 중년인과 그 딸로 변장해 있는
해월쌍화가 자리해 있었다.
여문량은 그녀들에게 가볍게 미소를 보내고는 걸음을 옮겨 회계대로 걸어갔다.
'형님 때문에 시간을 빼앗겼지만 강호에 나온 이래 이처럼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한 적이 없
을 정도로 유쾌한 시간이었다. 비사각과 깊은 원한이 있는 듯 싶은데... 걱정이 되긴 하지만
형님은 강하시다. 자, 이젠 혈관음을 잡으러 갈까?'
▣ 제31장 신정단(神精團)을 거두다
혈관음(血觀音) 선유경(善柔瓊)-
한떨기 빨간 장미(薔薇)를 연상케 하는 그녀에게선 절염(絶艶)하고 농농(濃濃)한 염기(艶氣)
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것도 만개한 장미처럼 극치의 완숙미(完熟美)를 보여주고 있는 그녀는 삼십 칠팔 세로 여
겨지는 나이에 비해 놀랍도록 싱싱하고 탄력있는 몸매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놀람의 빛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그녀의 내실에 예상치도 못한 한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그 사람을 발견하고 잠시 놀람의 감정을 드러낸 그녀는 곧 입가에 조소(嘲笑)와도 같은 가
는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녀는 농요한 교구를 옮겨 창가에 서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매우 태연한 신색으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돌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그 미소를 본 순간 혈관음 선유경은 아찔함을 느꼈다.
'사내의 웃음이 얼굴이 어찌 저리도 아름답고 수려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미소는 여인에게 있어 불가항력적인 유혹(誘惑)이었다. 그러나 혈관음 선유경은 순간적인
미혹(迷惑)을 극복하고 사내를 똑바로 직시하자 비로소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신정단의 혈관음 선유경인가?"
혈관음 선유경은 부드럽고 태연한 신색을 회복하며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그러는 귀공께서는 천명어사대인이십니까?"
"후후후.... 서로 맞다면 긴 얘기가 필요치 않겠군."
여문량은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신비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혈관음 선유경은 또 한차례 가슴이 진탕하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왜 오셨나요?"
"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글쎄요. 제 몸이 탐나서 오셨나요?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으신가요?"
여문량은 피식 웃었다.
"탐이 나냐고? 탐이 나지, 난 신정단을 접수하러 왔다."
"가능하다고 보세요?"
"불가능할 것도 없지.... 좀 더 솔직히 말해 본좌가 이곳에 왔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신정
단은 그 웅지를 펴보기도 전에 열강의 틈바구니에 껴 소리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말하겠다. 신정단의 모든 지휘권을 내게 넘겨라!"
"호호호....! 손하나 안 대고 코를 풀 생각이시군요. 본 신정단은 예전의 신정단이 아니에요.
이미 대명과의 관계도 백년 전 끝난 마당에 이제와서 지휘권을 넘기라니요, 그럴 자격이 있
나요?"
"하하, 대명의 명을 따르지 않는 신정단이란 존재할 수 없다."
"흥! 마치 내 상전인 양 거드름을 피우시지만 대우(待遇)는 오늘로 끝이에요. 제 방에 무단
침입한 죄를 묻지 않겠어요. 가세요. 하나 분명히 알아두셔야 해요. 이후 우린 적이 될 수도
있어요."
"좋군, 아주 좋은 말만 골라 하는군. 한가지 묻겠는데 정녕 대명의 지원없이 신정단을 일으
킬 자신이 있나?"
"있어요. 그럼 됐나요?"
"후후후....만약...만약에 열하 땅이 아닌 중원 대륙 안에다가 신정단을 세울 수 있다면...."
여문량은 말꼬리를 흘리며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이 순간 혈관음 선유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우리들을 중원으로 불러 갈 계획이란 말인가!'
그녀는 내심으로는 가슴이 뛰었으나 겉으로는 냉염하게 웃었다.
"사탕발림으로 나를 현혹시킬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아요.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신정단의 형제들은 대명을 믿지 않아요."
"그럼 이 사람은 어떤가? 그가 신정단을 갖고 싶다 하는데 그라면 생각해 보겠나?"
"누구? 대인! 한번 더 장난을 칠 때에는 그냥 두지 않겠어요!"
일순 의혹에 찬 얼굴을 하며 반문하려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하게 변하며 독오른 고
양이처럼 독기를 뿜어냈다.
혈관음 선유경은 단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자신이 그의 말에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흠칫
해 살벌한 살기를 드러낸 것이다.
여문량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장난이 아니다. 만약 내가 대명의 천명어사대인이 아닌 다른 신분으로 신정단을
접수하겠다면 그대는 어찌할 생각인가? 끝내 신정단 형제들을 데리고 무모하게 일을 강행하
다가 모조리 옥쇄할 것인가?"
"무슨 소리를....!"
"똑똑한 여자니까 내 말뜻을 금방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한심하군. 솔직히 말해
비사각과 해동막벌 틈바구니 속에서 신정단을 일으킬 자신이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난 물
러날 수 있다. 하지만.... 쯧쯧쯧, 힘들어... 그래서 내가 온 것이다."
"흥! 상당히 자부심이 강하군요. 대인 자신에 대해..."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제것 스스로의 능력을 전부 발휘해 보지도 못했고 그럴 기회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다들 날 두려워하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는지 시험해 보지 않을 수 없군요."
순간 혈관음 선유경의 교구가 날렵하기 짝이없게 여문량에게 달려들더니 이내 그녀의 옥수
(玉手)가 춤을 추었다.
쩌정! 꽈르르릉....
그녀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뇌성(雷聲)이 울렸다.
"풍뢰부영수(風雷斧影手)! 왜 그토록 도도하고 자신만만한지 이제야 알겠군. 삼백 년 전 절
대무적자인 혈서시(血西施)의 진전을 잇고 있었다니... 이거 놀라운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으로 여문량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혈서시(血西施) 화월교(華月嬌)!
무림 이천년사를 통털어 가장 강했다는 천추팔황(千秋八皇)! 그 중 삼백년 전 중원과 새외
까지 그 이름을 떨쳤던 여고수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혈서시 화월교다.
하나 그녀 역시 다른 절대무적자들과 마찬가지로 용황성에 도전했다가 패한 후 홀연 종적을
감추었었다. 헌데 혈관음 선유경 손에서 그녀의 절기가 쏟아질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여문량은 경각심을 가지며 즉시 응수했다.
휴류류륭....
파팟--! 츠파팡!
지금 그들은 생사가 일순간에 결정지어지는 극히 위태로운 근접(近接)의 박투(撲鬪)를 벌이
고 있는 것이다.
손속마다 살기가 가득하건만 아직 여유가 있는 듯 혈관음 선유경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용케도 내 무공을 알아보는군요. 무서움을 알았다면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떨가요. 대
인?"
말은 그렇게 하였어도 그녀는 심중으로 대단한 놀람을 느끼고 있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언제 이런 고수가 황궁에서 배출되었단 말인가?'
혈관음 선유경은 혈서시의 무공으로 충분히 여문량을 물리칠 수 있다 생각했다.
그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주어 더 이상 대명이 신정단을 찝쩍거리지 못하게 일침을 가할 생
각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강했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강해 평범한 절기로는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것
을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불현듯 혈서시의 최극절예인 혈수겁(血手劫)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혈서시의 혈수겁은 극히 음사한 내가기공(內家奇功)이었다.
츄아앗-!
허공에 겹겹이 수 놓아지는 피빛 손그림자, 그러나 전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돌연 그녀의 공세가 거칠어지자 여문량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가람대비수(伽藍大悲手)를
운용하여 침착히 맞서 나갔다.
파파팟!
허공 중에서 불꽃이 피어나고 두 사람의 손속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나
누어졌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애석한 일이군. 혈서시의 무공이 사라지지 않고 다시 나타난 것은 좋은 일인데 주인을 잘
못 만나 채 그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사장되겠구나!"
"흥! 대명이 우릴 그냥 둔다면 우린 신정의 이름을 떨칠 수 있어요. 또한 나 혈관음의 이름
이 산해관 너머를 가득 메울 테니 걱정해 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애석하도다. 죽은 혈서시가 자신의 무공을 익힌 제자가 고작 산해관 너머 작은 땅만 노리
고 있음을 알면 아마 죽어서도 마음이 편치 못할 텐데..."
"천만에 말! 모르셨나요? 혈서시 화월교는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다는 것을...."
"아..그랬소? 허긴 그러니까 그녀의 기연을 그대가 얻을 수있었겠지... 그나저나 정말 그대는
신정구기 중 한 사람인 묘수천작의 후예가 맞소?"
이 순간 여문량은 가람대비수에서 초식을 혼원마라장(混元魔羅掌)으로 바꾸고 있었다.
화르르륵...
꽝! 퍼퍼펑--!
혼원마라장은 극양의 기운을 지닌 무공인지라 극음의 성질을 지닌 혈서시의 혈수겁과 부딪
치자 허공에 무시무시한 불꽃과 굉음을 만들어냈다.
"맞아요. 그렇기 때문에 대명의 간섭을 받지 않는 우리들만의 신정단을 세우고자 우리가 뭉
친 거예요."
"그러니가 더 나랑 같이 중원으로 가야 한다니까..."
"대체 아까부터 자구 중원으로 가자 하는데 무슨 뜻인가요?"
이 순간 혈관음은 재빨리 수라쾌참수(修羅快慘手)로 바꾸었다. 수라쾌참수는 혈수겁 가운데
가장 무서운 무공이다.
순간 여문량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핫핫핫! 왜냐고? 난 천명어사대인이기 이전에 강호 무림인이기 때문이다."
"대강 짐작은 했어요. 대인 정도의 실력이면 황궁제일의 고수인데 아직 대인같은 분이 있다
는 말을 듣지 못했거든요. 그럼 누구죠? 강호인이 왜 황궁의 일을 돕죠?"
휘리릭...
직후 여문량이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서며 싸움을 중지시켰다.
그는 입가에 기이한 웃음을 실으며 말없이 허리춤에서 부채를 꺼내 펼쳐 들었다.
촤라락...
활짝 펼쳐진 백우나녀선을 보는 순간 혈관음 선유경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설마...호화대협 여문량!"
그녀도 중원 무림을 위진시키는 여문량의 말을 귀가 따갑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의 신물인
백우나녀선과 함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경이의 빛을 여문량은 놓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하여 신정단을 접수했군!'
여문량은 가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일찍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는 웬지 혈관음 선유경의 본 실력을
가늠해보고 싶었다.
그 덕분에 그녀가 혈서시의 진전을 이은 여자임을 알았고, 의외로 그녀의 꿈이 단순히 신정
단을 부활시키려는 것 뿐임을 알게 되었다.
만약 그보다 더 큰 야망을 지니고 있어 신정단의 후예들을 이용하려 했다는 낌새를 그가 받
았다면 아마 그녀는 염라대왕 앞으로 가야만 했을 것이다.
아무튼 여문량은 그녀의 아연해 하는 눈 속에서 승복의 빛을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후....그랬군요, 대명 황실에서 당신을 보낸 것은 신정단 문제 때문이 아니라 누루하치와 열
강들 때문이었군요."
혈관음 선유경은 머리가 비상한 여자다.
그녀는 처음 해월쌍화가 천명어사대인의 수족이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대명 황실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자신들을 접수하여 예전처럼 이용하려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나 상대는 황궁의 인물이 아닌 중원 무림인이 아닌가! 이것은 결국 모종의 임무를 띠고
그가 산해관을 너머 이곳까지 왔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정보망이 뛰어난 후금국이나 여러 새외 무림의 무벌들이라 해도 설마하니 황궁 사람
이 아닌 강호인이 들어오리라 상상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재수없다고 봐야 하나요?"
다른 임무를 띠고 왔다가 우연히 신정단을 발견해 그것을 접수하러온 여문량으로 생각한 나
머지 나온 어이없는 말이었다.
여문량은 덩달아 피식 웃었다.
"아니오. 재수가 억수로 좋았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오."
어느새 그의 말투는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조금 전 위엄 넘치고 수하 다루듯 권위적인 하대
와는 많이 달랐다.
혈관음 선유경은 그런 여문량을 응시했다.
"헷갈리는군요. 지금은 그럼 호화대협의 신분으로 말하는 건가요?"
"그렇소, 아까도 말했듯이 난 그대들을 중원 대륙으로 데려갈 생각이오."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한 사람과 약속을 했소."
"누군가요?"
"대천성의 금종규! 그와 중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소. 물론 그대들과 함께...."
"설마...설마 그분이 아직 살아 계시단 말이에요?"
"못 믿겠소. 그럼 이 말을 하면 믿겠소, 듣기론 묘수천작과 대천성의 사이엔 둘만의 비밀표
기가 있다고 했소."
"예, 비밀표기가 있어요."
"그 표기를 아시오?"
"알아요...그럼 당신도..."
"대천성의에게 들었소. 붉은 색으로 손가락 여섯개의 장인(掌印)을 찍으면 되지 않소?"
"왜 여섯 개인지 아세요?"
"후후후, 그 얘기도 들었소. 재미있더군, 그대들 묘수천작의 후예들은 대대로 기관토목과 암
기술에 능통해 있어 그 신기를 준 손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뜻으로 상징적으로 육손이라
칭한다고 들었소. 맞소?"
"호호호... 맞아요. 우린 우리에게 신기를 준 하늘을 상징하는 여섯 번째 손가락을 가지고 있
어요. 물론 진짜 육손은 아니지요."
"하하하, 이제 조금 얘기가 되겠군, 아까는 어찌나 살벌했던지 정말이지 혼났소이다."
여문량은 혈관음 선유경에게서 일말의 적의를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한 식구를 만났
다는 반가움을 그는 보았다.
그런데 돌연 혈관음 선유경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다소 무거운 어조로 물어오는 게 아닌가?
"한 가지 묻겠어요?"
"뭐요?"
"그분이 중원에 계시다는 것은 결국 중원이 신정의 뿌리를 내리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어차피 대명에서는 신정단이 백 년 전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고 오늘 당신
과 내가 만나는 사실 또한 알지 못하오. 이런 기회에 아예 중원에 진출하고자 대천성의는
나더러 신정단을 접수하라 한 거요."
"그럼 그분과 당신의 관계는 어찌되지요?"
"글쎄...확실히 서로 이렇다할 선을 긋지 않았고...지금 그 선이 그리도 중요하오?"
"당신한테는 몰라도 우린 무척 중요해요."
"대체 알 수 없군..."
"이해를 바라고 싶지는 않지만 신정단은 대명과 어떤 끈도 연결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리고
대천성의 어르신이 살아 계심을 형제들이 안다면 일시 혼란이 올 것이 뻔해요. 그런 여러가
지 일들을 일축시키고 우리가 가진 힘을 한 곳으로 집약시키기 위해서는 필히 당신과 그분
의 관계를 알아야 해요. 그 분은 당신이 호화대협이란 것도 아시나요?"
"알고 있소."
"그럼 한가지 명백하게 해주신다면 이 자리에서 신정단의 미래를 걸 수 있어요."
"그게 무엇이오."
"바로 이거예요!"
순간 혈관음 선유경은 걸친 분홍빛 겉옷을 맨 체대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채대가 풀어져지
며 옷자락이 옆으로 벌어졌다. 그 사이로 속옷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다소 배타적인 성격을 지닌 형제들을 설득하
기 위해선 대천성의 어르신과의 관계가 아닌 저와의 관계로 당신을 두고 싶어요."
"그게 무슨....설마...!"
"그래요, 당신을 제 지아비로 형제들에게 알릴 계획이에요. 그럼 형제들도 당신을 인정할 것
이고 동시 형제들 마음 속에 중원 제일인과 한 식구가 되었다는 일종의 자부심이 생겨나게
될 거예요."
"당신...무서운 여자군."
"승낙하시나요?"
"음...."
여문량은 나직이 신음했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다. 그러나 이 순간 혈관음 선
유경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르르...
궁의가 밑으로 흘러내렸다. 속옷 속으로 은은히 비치는 그녀의 현란한 육체를 여문량은 외
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한떨기 장미꽃을 보듯 유현한 시선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일순 여문량은 순간
적으로 본능(本能) 저 깊은 곳에서 불길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때 거의 나신에 가까운 몸이 된 혈관음 선유경이 입을 열었다.
"장부의 야망은 천하를 지배하는 것이요. 여인의 소망이란 그 장부를 섬기는 것. 이거면 충
분해요."
그녀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은은히 배어 나왔다. 혈관음 선유경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
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유혹을 연출해 낼 수 있을까? 인어처럼 매끄러운 그
녀의 몸은 허공이란 공간속에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꽃잎일까, 바람에 흐느끼는 갈대일까?
아니면 농밀한 안개. 그도 아니면 머나먼 그리움의 밤하늘에 몸을 실은 한 마리 철새의 몸
짓일까?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의 몸은 공간에 무수한 잔영을 남기었다.
"으음!"
여문량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혈관음 선유경은 화려하면서도 정결해 보이는 침상위에 가볍게 몸을 던졌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던진다.
"제 몸을 정복하는 순간 당신은 저를 포함한 삼백여 신정단 형제들을 돌봐야할 책임을 지니
게 되요. 난 당신을 알아요. 절대 무리를 이루지 않는 호랑이라는 것을 알아요. 당신은 우릴
대천성의 어르신께 떠맡길 생각이지만 난... 당신을 가질 생각이에요."
무서운 여자, 혈관음 선유경은 반짝 빛나는 눈으로 여문량을 응시했다.
여문량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날 가질 자신이 있다면 가져도 좋소. 하나, 날 지아비로 모시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먼저 복
종이란 것을 배워야 할 것이오. 복종은 강요가 아니오. 진정한 사랑과 아낌이 있어야 절로
상대를 이해하고 그 이해 속에서 자연적으로 유발되는 양보, 그것이 부부간의 복종이오."
"배우라면 배우겠어요."
"그럼...당신과 신정단을 이 순간 접수하겠소."
"기대하겠어요."
이런 말도 침상 위에서 환희의 순간을 기다리는 두 남녀가 나누는 말인가? 그저 침상위에서
나누는 남녀간의 말은 사랑과 환희여야 하는데 이들 두 사람은 웬지 그런 느낌이 아닌 서로
의 이득을 위해 맺어지는 듯했다.
어쨋든 서로의 이해가 통한 것일까?
돌연 두 사람 얼굴에 피어나는 것은 냉정한 이해타산이 아닌 뜨거운 열정...
여문량은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기되어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를 주시하며 혈관음 선유경은 속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뱀이 허물을 벗듯 매끄러운 살결을 타고 젖가슴을 가린 붉은 빛 젖가리개가 옆으로 흘러내
렸다. 연보라빛 유실이 새초름이 드러났다. 아직 그녀의 은밀한 곳은 속곳으로 가려있었다.
혈관음 선유경은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똑바로 몸을 뉘였다.
여문량은 그녀의 앞에 똑바로 서서 예술품을 감정하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매는 완벽하였다.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었다. 명장이 빚은 걸작도 이에 미치지는
못하리라.
여문량은 마른 침을 삼켰다.
"우물이로군 당신!"
여문량은 자신의 요대를 풀렀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백삼도 벗었다.
혈관음 선유경은 그의 육체를 주시하며 무릎을 세웠다.
여전히 그녀의 신비지대는 속곳에 가려 있었다.
그러나, 얇고 투명한 속곳은 음영(陰影)과 계곡의 굴곡(屈曲)에 그대로 투영하였다.
신비의 계곡에서는 마악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문량은 침상위에 걸터 앉으며 그녀의 무릎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요염한 나신에
경련이 일었다.
"으...음."
혈관음 선유경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녀는 어느 사이엔가 속곳을 떨구고 있었
다.
여문량은 팔을 돌려 그녀의 교구를 감싸안았다. 그러자 향그러운 그녀의 체향이 풍겨왔다.
혈관음 선유경은 그의 몸을 섬섬옥수로 감은 채 기이한 자세를 취하였다.
여문량의 시선이 그녀의 하체로 향했다.
그곳에 폭발적인 관능이 숨쉬고 있었다.
도저히 끝간 데를 모르는 끝없는 유혹의 비동(秘洞)과 태고의 밀림속에 요화(妖花)가 피어
있었다.
여문량은 꽃잎으로 손을 가져갔다.
혈관음 선유경은 전율에 떨며 뜨거운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나비와도 같이 스쳐갔을 따름이었다.
우유빛 가슴, 그 정상에 그의 손은 다시 내려앉았다.
혈관음 선유경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입술이 스쳤다. 여문량은 기대오는 그녀의 몸을 받아
안았다. 그리고 그는 서두리지 않고 여유있는 손길로 그녀의 가슴을 보드랍게 감쌌다.
그의 다른 한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으...으음."
혈관음 선유경은 감미로운 비음을 흘리며 다리를 비스듬히 들었다. 서로 마주보고 앉은 자
세였다. 그녀의 가슴속에 손을 떼지 않으며 여문량은 혈관음 선유경의 보드랍고 풍만한 젖
가슴을 소중히 받쳐들었다.
"아아....!"
그의 손길이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잡았다가 놓자 혈관음 선유경의 허리가 활처럼 굽었다.
이어, 잘룩한 허리에서 머물던 여문량의 손은 크게 동산을 이룬 둔부를 쓸어내려갔다.
혈관음 선유경의 익어 터질 듯한 육체가 감전된 듯 경련하고 마침내 여문량은 얼굴을 혈관
음 선유경의 풍만하고 뭉클한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한 입 가득 부드러운 육질을 베어물었
다.
달디단 천도복숭아 같은 젖가슴, 꿀물 같은 감로수가 입안 가득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아학!"
혈관음 선유경은 두 팔로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여문량은 자신의 하체 일부가 급격히 팽창됨을 느꼈다.
"으음..."
그는 혈관음 선유경의 다리를 벌렸다. 백옥같이 희디흰 허벅지 사이의 깅고 원색적인 계곡
은 이미 뜨겁고 질펀하게 젖어있었다.
여문량은 그녀의 벌려진 다리 사이로 무릎을 꿇고 들어가 앉았다. 불끈 기세좋게 솟은 거대
한 활화산은 벌써부터 꿈틀꿈틀 맥동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여문량은 한손을 혈관음 선유경의 사타구니로 밀어넣어 흥건히 젖은 밀역(密域)을 쓰다듬었
다.
부르르...
"....!"
혈관음 선유경은 몸을 떨며 두 눈을 감았다. 더없이 예민하고 보드라운 살점이 사내의 손길
에 의해 제멋대로 벌어지고 어루만지키는 것이다.
형관음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여문량의 손을 다리 사이에서 떼내려 하는 순간,
스윽!
굴강하게 곧추 선 여문량의 일물이 한껏 벌려진 그녀의 밀궁 입구에 잇닿았다.
"허억...!"
혈관음 선유경은 흥건한 자신의 중심부로 무언가 뜨겁고 미끈덩한 물체가 밀려듦을 느끼고
숨막히는 듯한 신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뻑뻑하게 채우며 밀려들어오는 여문량의 맥동(脈動)하는 해면
체!
지금까지 늘 허전하던 빈 공간에 너무도 틈실한 이물질이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여문량 역시 따뜻하고 부드럽게 휘감는 혈관음의 그 부분에서 느껴지는 긴축감을 욕망의 살
덩이 전체로 느끼며 몸을 경직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그 전율적인 쾌감을 음미하며 서서히 하체를 밀어붙였다.
"아흐흑---!"
혈관음 선유경의 교구가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거대한 사내의 실체가 관통하는 순간 그녀는 강렬한 충격에 몸을 떤 것이다.
"음..."
여문량은 혈관음 선유경의 몸안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저항을 무너뜨리며 자신을 더욱 깊숙
이 밀어넣었다.
혈관음 선유경의 입에서 연신 뜨거운 비음이 흘러나왔다.
여문량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힘차게 하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갈증에 지쳐있다
비로서 물을 만난 사람처럼 그는 굳강한 힘으로 여체를 학대했다.
"하악-! 아아...!"
혈관음 선유경은 그 아픔에 눈을 한껏 부릅떴다.
그리고 허리를 활처럼 튕겨내며 두 팔로 여문량의 머리를 끌어 안으며 그 희열을 만끽하였
다.
여문량의 몸이 파도를 탄다. 살과 살이 타는 소리는 뜨겁게 방안을 불태웠다.
"아아....아흐윽..."
혈관음 선유경은 벅찬 흥분에 몸을 떨었다.
"아아...."
그녀의 입에서 향긋한 내음이 흐리기 시작하였다. 감미로운 꿈에 젖은 듯한 눈으로 혈관음
선유경은 여문량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나신을 그에게로 밀착시켰다.
살과 살이 마찰을 일으켰다. 순간, 그녀의 눈은 짐승의 그것처럼 기이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
다.
"으으음-"
혈관음 선유경은 제어할 수 없는 뜨거운 기쁨이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온몸의 신경을 자극하
는 것을 느꼈다.
여문량은 그녀의 눈을 직시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그녀 역시 황홀한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불길처럼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혈관음 선유
경은 연신 비음을 토해 내었다.
백옥같은 피부에 땀이 배었다.
무수히 끓어오르는 절묘한 희열과 쾌감앞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잊었다.
드디어 어느 한순간 거대한 절정의 해일이 그들을 덮쳐갔다.
"아아...."
"....!"
너무도 크나큰 기쁨앞에 그들은 일순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져감을 느꼈다.
파랑처럼 번져가는 아스라한 극치의 불꽃들, 혈관음 선유경은 연이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흐흑!"
수정처럼 맑은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맺혔다.
창밖으로 날이 새어오고 있었다.
혈관음 선유경은 여문량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노곤한 미소를 지었다.
간밤의 운우가 지독했음을 말해주는 듯 불과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모습은 다소 여위어 있
었다.
그녀는 곱고 보드라운 손가락으로 그의 까칠한 턱을 어루만졌다.
"쉽지 않은 일이에요. 비사각(毘沙閣)은 공룡(恐龍)이 아니에요. 머리는 작고 몸집만 커 끝내
먹을 것이 먹어지자 죽어버린 그런 공룡이 아닌 진짜 무서운 자들이에요. 그런 그들을 홀로
상대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에요."
"알고 있소, 하나 해야 하오."
"신첩이 도울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게요."
"...."
여문량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자 혈관음 선유경은 몸을 불현듯이 일으켰다. 그녀는 탄력있는 나신을 그의 몸에 밀착
했다.
"천첩은 장담할 수 있어요. 천하에 비사각을 무너뜨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오직 당
신 뿐이라고요."
"유경, 아직도 부족하오?"
"그게 무슨 말이죠?"
"아직도 당신의 몸은 뜨겁소."
"어마..!"
"후후후... 비사각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는 법, 떠나기 전에 당신을
한 번 더 확인해 두고 싶소."
"어머머! 이이가...!"
그말을 듣자 혈관음 선유경은 몸을 움츠리며 어머머 소리만 연발했다.
"당신 정말 소문대로 색마(色魔)군요, 알아요? 저는 어젯밤이 처음이었고 당신은 어젯밤 저
를 무려 여덟 번이나 죽였어요. 그런데도 부족하단 말이에요?"
"후후후.... 운우를 즐기면서 그 횟수를 세었다는 것은 내가 완전히 당신을 죽이지 못했다는
말이군, 완전히 죽여버리면 숫자 따위가 머리에 들어올 리 없지."
"당신...못하는 말이 없군요."
"어떤가? 두 번을 마저 해서 열 번을 아예 채워버릴까?"
"색마! 싫어요, 그랬다가는 정말 죽어....읍!"
그녀는 더 말을 잊지 못했다. 여문량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흘러내린 금침을 끌어올려 그녀와 자신의 몸을 덮었다.
"으....응!"
혈관음 선유경은 도리질을 하며 그의 가슴에서 벗어나 옆에 누웠다.
"그만.... 제발 부탁이에요."
목소리부터 이미 그녀는 지쳐 있었다.
"진심이에요. 하라는 일은 무엇이드지 다하겠어요. 그러나 제발 더 이상은 무리예요. 걷지도
못한단 말이에요."
투정과 거부의 음성이나 애교가 철철 넘쳤다.
그녀는 몸을 구부려 침상의 저편으로 도망쳤다.
여문량은 몸을 굼벵이처럼 꾸물거리며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혈관음 선유경은
손을 내밀어 그를 침상 밖으로 밀치려 했다.
"정말이에요. 이젠 너무 지쳤어요."
그러나 여문량은 집요하게 접근을 시도했다.
"제발! 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
"두 번만 더 하자. 으응..."
"싫어... 어머! 어딜 만져요... 아흥응... 거긴 안 돼... 아흐흥... 돼는데...."
"암, 되고 말고..."
잠시 뒤치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아악-!"
이 소리는 혈관음 선유경이 내지른 환희의 소리였다.
▣ 제32장 호구(虎口)로 들어가다
요녕(遼寧) 건평성(建平城)-!
건주(建州)라 불리우는 후금국(後金國)의 요지(要地)다.
서요하(西遼河)의 거대한 물결이 넘실거려 흘러드는 곳, 그 물보라가 흐트러지는 물결을 따
라 줄줄이 늘어선 주루들이 과연 몇이던가? 그 중 낙낙주루(樂樂酒樓) 안에 삼십대의 냉막
한 인상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몽고인(蒙古人) 한 명이 홀로 앉아 술을 들이키고 있었
다.
가죽옷에 가죽모자를 쓴 전형적인 몽고인인 그 장한의 얼굴은 아주 냉막했다.
게다가 미간으로는 싸늘하고 오만한 기운이 뻗쳐있어 그다지 좋은 인상이라고 할 수는 없었
다.
그는 술잔도 없이 어리아이 머리통만한 술독을 통재로 탁자에 올려놓은 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안주는 몽고인들이 즐겨먹는 양(羊)고기였다.
참으로 간 큰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누루하치가 이끄는 후금국의 군세는 흥안령(興安嶺) 너머에서 몽고의 주력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여진족의 보복을 두려워한 요녕땅의 몽고인들은 모두 피난을 갔거나 오금을 졸인
채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일견해 보아도 힘꽤나 쓸 듯한 몽고
인이 버젖이 후금국 중심에 들어와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만일 후금국의 군사들이 보기
라도 했다면 당장 뭇매를 안길 것이다. 하지만 이 몽고인이 풍기는 분위기가 워낙 흉흉한지
라 아무도 그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이때 등 뒤에 대감도(大甘刀)를 맨 한 명의 우람한 대한이 주루 안으로 들어셨다.
한쪽 자리에 앉으려던 그 대한은 무심코 술을 마시고 있는 몽고장한에게 시선을 던졌다.
대한은 너무도 태연히 술을 마시고 있는 몽고인을 보자 대뜸 살기가 솟구쳤다. 그는 며칠
전 전장(戰場)에 함께 나갔던 동생이 몽고인의 칼에 죽음을 당한데다가 오늘이 바로 그 죽
은 동생의 생일이라 무덤을 다녀온 길이었다. 그러다가 적적하고 쓸쓸해 술 한 잔 마시러
주루에 들어오던 길이었다.
그러던 차에 동생을 죽인 몽고인을 봤으니 어찌 살기가 치솟지 않으랴?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군, 감히 주루까지 나와서 술을 쳐마시다니...!"
대한은 성큼 몽고인 앞으로 다가서며 이를 갈았다.
"오늘이 죽은 동생 생일만 아니었다면 네놈은 벌써 피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
순간 몽고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나도 오늘만큼은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썩 꺼져라."
몽고인의 말에 대한은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이 늑대를 애비로 모시는 잡종새끼가 감히...!"
다음 순간 대한은 버럭 외치며 등에 맨 대감도를 잡아뽑으려 했다.
그러자 몽고인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크크크, 뽑으면 죽어!"
"....!"
싸늘히 퍼져나가는 살기에 일순 대한은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단지 말 한 마디 한 것 뿐인데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렇게 서 있는 대한을 보며 몽고인이 비아냥거렸다.
"일초(一招) 꺼리도 되지 않는 놈이 까불고있어...."
"일초?"
대한은 그 말에 공포도잊은 채 발끈했다.
"이놈, 그 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보아 한가닥 하는 모양인데 내가 칼을 뽑으면 넌 반식
안에 목이 달아난다."
"반식(半式)?"
몽고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노부가 백수십 년을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광망스러운 놈은 처음이다."
이어 몽고인은 냉혹한 안색으로 버럭 소리쳤다.
"좋다. 어디 칼을 뽑아 보아라, 반식 안에 노부 목을 못 딸 때는 네놈 목이 달아난다."
"미친놈!"
스르릉!
대한은 등 뒤에서 대감도를 뽑아들었다. 순간 사방으로 시뻘건 도광이 현란하게 내뻗쳤다.
"간닷!"
대한은 수중의 칼을 무시무시하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방원 십장이 온통 도광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수천의 도기가 몽고인의 전신으로 떨어져 갔다.
헌데 이때 돌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차착-!
몽고인이 그 엄청난 기세로 덮쳐오는 칼날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버린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경악할 일이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훅!"
대한은 급급히 한 모금의 찬 공기를 들이켰다. 자신의 칼이 몽고인의 손가락 끝에 잡혔다는
것을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대한은 칼을 힘껏 잡아당겼다. 헌데, 칼은 무엇에 단단히 걸린 듯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대한은 당황하여 급급히 전 내공을 일으켜 칼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여전히 칼은 요동도 하
지 않는 것이었다. 칼은 흡사 쇠가 자석에 달바붙은 듯, 손가락과 칼 사이에 아교가 발라진
듯 요지부동이었다.
'무....무서운 놈이었다. 잘못 건드렸다.'
대한은 경악에 두 눈을 화등잔처럼 부릅떴다.
이때 몽고인의 실소가 들렸다.
"허어! 예상보다 형편없는 자로군, 그깟 솜씨로는 파리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하겠다."
이어 그는 칼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밀었다.
"으윽-!"
대한은 엄청난 진력에 의해 무려 일곱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천하에 이렇게 무공이 강한 자가 있었다니....'
대한은 아예 넋을 잃어버렸다.
바로 그때,
"떼놈! 너무 기고만장하구나! 이곳 요녕 땅이 네놈 안방인 줄 아느냐?"
주루 안에 있던 다른 요녕인들 가운데 깡마른 노인과 험상궂은 인상의 중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노부 철장신군(鐵掌神君)은 필요없는 싸움을 하기 싫어 그냥 두었지만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 네놈의 목을 베어 성루에 효수하여 몽고인들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겠다."
"사부님, 저런 놈은 제자가 처리해도 됩니다."
철장신군이란 깡마른 노인의 말에 함께 일어선 험상궂은 중년인이 대꾸했다.
그러자 일순 주루 안에 경악과 공포가 감돌기 시작했다.
"앗! 철장마군이다!"
"으....철장마군과 그 제자 지옥수라다."
갑자기 주루 안이 술렁이더니 눈치 빠른 주객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철장마군(鐵掌魔君)!
그는 요녕 땅 북방에 자리한 막북(幕北) 일대의 흉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중년인은 그 제자인 지옥수라(地獄修羅)였다. 그는 몽고인이 같은 요
녕 사람을 격퇴시키고 기고만장히 떠들자 열불이 터져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몽고인은 픽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조무래기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느니 차라리 떼거지로 묶어서 싸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그러자 철장마군이 분기에 찬 목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애송이 놈, 일장에 네놈을 없애주마."
꽈르릉!
동시에 철장마군은 벼락같이 몽고인을 덮쳐들며 일장을 날렸다.
철장마군이란 별호답게 그자의 장력은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흡사 태풍이 몰아치듯 무시
무시한 암경이 벼락치듯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몽고인은 원래 그 자세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의 전신으로 태산을
무너뜨릴 듯한 장력이 짓쳐들었다.
몽고인의 몸이 장력에 아작이 난다 느끼는 순간,
쩌어엉!
돌연 그의 몸에서 엄청난 암경이 터져나왔다.
퍼퍼펑!
다음순간 기묘한 폭발음이 울렸다.
"크아악-"
철장마군은 신음성을 내지르며 뒤로 튕겨나갔다.
가까스로 치밀어 오르는 기혈을 억누른 그의 얼굴은 온통 경악으로 일그러져 버렸다.
'으, 이놈은 인간이 아니다. 어찌 인간이 이토록 강한 무공을 익힐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철장마군 선배! 잠깐만 물러나시오."
다급한 소리와 함께 청년 한 명이 몽고인 앞으로 다가섰다. 제법 준수하게 생겼으나 눈가에
푸른 기가 돌아 어딘지 음산한 인상을 주는 자였다.
그 청년은 급히 몽고인에게 정중히 포권지례를 갖추었다.
"소생은 비사각(毘沙閣)의 을지한(乙支韓)이라 합니다."
"흥!"
그러나 몽고인은 여전히 냉막한 안색이었다.
음산한 청년, 즉, 을지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소생을 보고 참아주십시오.소생이 형장을 위해 술 한잔 대접
하겠습니다."
그 말에 몽고인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스쳐갔다.
"그래도 사람다운 놈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군."
몽고인의 그 말에 철장마군은 순간 노기충천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렸다. 그러나 상대
의 엄청난 무공 때문에 차마 발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 끼어든 을지한이란 청
년 때문에 나서지도 못했다.
을지한은 몽고인을 향해 굽신거렸다.
"형장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형장?"
몽고인의 송충이같은 눈썹이 꿈틀했다.
"크흐흐흐!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이 노부를 감히 형장이라 부르다니....! 생각같아서는 당장
머리통을 박살내주고 싶다만... 제법 가정교육이 된 것같아 살려둔다!"
'아니 뭐 이런 작자가 있어? 멀쩡하게 생겨서 노부가 어째?'
잘되어 봤자 삼십대인 몽고인이 자칭 노부라고 하자 을지한의 얼굴은 울도 웃도 못하게 이
지러졌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몽고인의 말이 을지한의 심짱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흐흐흐! 귀를 후비고 잘들어둬라! 노부의 고명은 바로 마뢰진천(魔雷震天)이라 한다."
몽고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가슴을 활짝 폈다.
순간,
"마...마뢰진천!"
"대몽고의 벼락신!"
을지한을 비롯한 중인들 얼굴에 엄청난 경악과 공포가 스쳐 지났다.
-마뢰진천(魔雷震天) 오고타(烏高打)!
오래 전에 죽었다고 알려졌던 몽고의 벼락신!
그는 백 년 만에 다시 출도해 근자에 들어 곳곳에서 혈풍을 일으키고 있는 일대흉마(一代凶
魔)가 아닌가? 역시 무림인인 을지한 등이 어찌 그 이름을 모르랴!
물론 스스로를 마뢰진천이라 밝힌 이 삼십대의 몽고인은 호화대협 여문량의 화신(化身)이었
다.
그는 비사각에 접근하기 위해서 몽고족의 전형적인 복장을 하고 주루에 나타났던 것이다.
물론 오늘 이곳 주루에 비사각 을지당의 요인인 을지한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같은 내막을 알 리 없는 을지한은 순간 비굴할 정도로 반색을 지었다.
"아, 위대하신 마뢰진천 노선배님이셨군요. 반노환동하셨다는 말을 듣긴 들었습니다만 과연
소문대로 위대하십니다."
몽고인, 즉 여문량은 냉랭히 코웃음쳤다.
'흥, 형장에서 위대하신으로 바꾸다니... 소문대로 약삭빠른 놈이군. 그러나 네놈 그 성격 덕
분에 난 편하게 비사각으로 들어갈 수 있어 좋다.'
을지한은 계속 수작을 걸었다.
"노선배님! 소생이 오늘 노선배님을 만난 것은 정말 소생에게는 크나큰 복연인 것 같습니
다."
을지한은 입가에 침을 발랐다.
"하여 노선배님을 본각으로 모셔 술 한상을 봐 드리고 싶은데 사양하지 마십시오."
여문량은 입술을 야릇하게 뒤틀었다.
"음, 자네는 갈수록 마음에 드는 소리만 하는군."
이어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술 한잔 사겠다면 못마실 것도 없지."
여문량은 가볍게 대답하였다.
을지한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여문량을 무슨 제황처럼 떠받들었다. 그의 굽신굽
신하는 태도는 정말 옆에서 혼자 보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그러나 당장 일어날 기세던 여문량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깊게 주저앉으며 을지한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이보게, 보다시피 아직 술이 남아 있으니 지금 당장은 곤란하겠네. 좀 기다려 주겠나?"
"아이구, 노선배님도... 이깟 술이 뭐 아깝다고 마저 드실려고 하십니까? 저 좋은 미주가효를
마련해 올리겠습니다."
"일 없네. 자네들 요녕 놈들은 옛부터 기름진 땅 덕분에 잘먹고 잘 살았지만 우리 몽고는
다르네.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던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음식을 남기면 벌을
받는다네. 허니 기다리게."
"아... 그러십니까요, 헤헤헤... 그럼요, 음식을 버리면 안 돼죠. 그럼... 쯧쯧, 위대하신 노선배
님이 안주가 이게 뭡니까? 노선배님, 본각에 모시기 전에 일단 이곳에서 간단히 대접할 테
니 그것까지 말리지는 마십시오."
을지한은 빠르게 말하고는 여문량이 대답하기도 전에 주인을 불렀다.
이윽고, 주인이 나와 허리를 숙였다.
을지한은 황금 덩어리를 꺼내들며 거드름을 피웠다.
"가장 좋은 안주와 술을 한 상 차려 오너라."
주인의 두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는 얼른 허리를 굽히며 굽신거렸다.
"예예, 최고급으로 모시겠읍니다."
을지한은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이곳에서 제일 가는 음식과 술을 내놓도록 해라."
주인은 허리를 땅에 닿도록 굽혔다.
"네네, 알았습니다."
이윽고, 산해진미가 다시 차려지고 어느 새 을지한은 여문량과 함께 앉아 그의 술시중을 들
고 있었다.
술자리는 완연히 무르익어 있었다.
을지한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헌데 노선배님께서는 염유방주 유음하와 그의 의형제들과 원한이 있다 하시던데... 유음하
그 놈이 죽을려고 환장했지 감히 위대하신 노선배님 비위를 건드리다니... 노선배님, 그놈은
참 나쁜 놈이니 목아지를 비틀어야 합니다."
"흐흐흐.... 목아지를 비틀어 죽여서는 안 되지..."
"아니 왜요? 그놈을 살려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놈 때문에 노선배님은 백 년 동안...."
"흐흐흐. 목을 비틀기 전에 먼저 뼈마디 마디를 몽땅 짤라 버리고 살가죽을 발라낸 다음 소
금을 치고 아가리를 벌리게 해 고춧가루를 뱃속에 뭉개 넣어야 한다. 그래도 그 놈은 모자
른다. 사지를 짤라내고 오장육부를 하나하나 꺼내 씹어 죽여야 한다. 목만 비트는 것은 그놈
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알겠느냐? 꼬마야?"
'으...잔인한 놈!'
을지한은 치를 떨었지만 비굴할 정도로 헤헤거렸다.
"그럼요, 거기에다가 눈알을 빼고 귓구멍을 파내고 손톱 발톱 밑에 쇠고챙이를 꽂아야 됩니
다요..."
"옳지! 그 방법도 좋구나, 하하하! 넌 참으로 머리가 좋은 놈이다. 자, 한 잔 따라라..."
"예예..."
을지한은 잔이 철철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여문량은 술을 마시며 나직이 비웃었다.
'간사한 놈.'
이윽고 또 다시 커다란 술독이 비워지고 여문량은 짐짓 취한 듯 눈을 게름하게 반 쯤 감았
다. 그 광경을 보며 을지한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맛이 갔군, 이 노마만 잘 구스르면 비사각에서 우리 을지당(乙支堂)의 위치가 확고해 진다.
기필코 바사각으로 데려가야 한다.'
이어 그는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염유방주 유음하는 해동막벌의 열화천신 휘하에 있는데 유음하를 건드리면 열화
천신이 가만 있을까요?"
"천신은 무슨 얼어죽을 천신이냐? 어느 누가 감히 노부 벼락신 앞에서 깝쭉거린단 말이냐?
나오라고 해! 아작을 내놓을 테니까.."
"하지만 열화천신의 무공은 엄청나 천하에 그를 당할 자가 없습니다."
여문량은 싸늘히 냉소를 날렸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내 손에 걸리면 백초도 넘기지 못해."
그는 곧바로 눈에 조소의 빛을 가득히 떠올렸다.
"노부가 지난 백 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아느냐? 흐흐흐... 사실 유음하, 그놈에게 감사도 해
야 하지..."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흐흐흐.... 놈들이 노부를 함정으로 몰아 떨어뜨린 초중산(楚重山) 절벽 아래에서 노부가 무
엇을 보았는지 아느냐?"
"....?"
"흐흐흐, 군악마황(群惡魔皇)! 중원 무림의 절대무적자라는 천추팔황 중 한 사람인 군악마황
의 백골을 보았느니라... 흐흐흐. 그곳에서 노부는 놈들에게 당한 내상을 치료하고 군악마황
의 무공을 익혀 출도한 것이다."
"아....그래서 이렇게 반노환동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을지한은 만면에 경악의 빛을 떠올렸다.
여문량의 말은 계속되었다.
"군악마황의 무공은 과연 쎄다. 자존심 상한 일이지만 중원 놈들은 과연 쎄더구나. 노부의
본신절학에다가 군악마황의 초마공까지 익혔는데 무엇이 두렵단 말이냐? 크크크, 올 테면
오라 그래. 다 박살을 낼 테니까..."
그의 얼굴이 다시 냉막하게 변했다.
이어 여문량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을 슬쩍 치켜들었다. 순간 목전에서 엄청난 광경이 일어
나고 말았다.
번쩍-!
돌연 그의 손바닥이 완전히 투명하게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찰나 그는 슬쩍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으로부터 수천 수만의 지극히 예리한 경기가
광풍노도의 기세로 뻗어나갔다.
츠츠츠....
퍼펑! 콰콰쾅!
무형경력에 강타당한 주루의 벽 한 쪽이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박살나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그 엄청난 경기는 폭풍같이 밖으로 내뻗혀 수십 장 밖에 서 있는 수백 년 묵은 고목
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순간,
콰르릉-
엄청난 폭음이 일었다. 몇아름의 거목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허공으로 난자히 흩뿌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천 조각의 고목조각들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한줌 재로 변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을지한은 입을 딱 벌린 채 대경하고 말았다.
'저게 진정 인간의 무공인가?'
그러자 여문량은 음침한 미소를 날렸다.
"흐흐흐.... 전 내공을 다 사용하면 이 주루가 통채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단 일성(一成)의
내공만 사용했네."
"일성?"
을지한은 까무러치듯 부르짖었다.
'맙소사, 일성이라니.... 저 정도만 해도 천하에서 받아낼 자가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정신이 없었다. 그는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다.
사실 여문량은 이번의 시위에 오성(五成)의 내공을 사용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무공은 실로 경천동지할 만한 것임에 분명했다.
이윽고 여문량은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것 말고도 더욱 더 무서운 수많은 절학들이 있지만 네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 생략
하겠도다."
지극히 거만한 말투였다. 그러나 이미 을지한은 여문량에게 휘말려 들어가 정신이 없었다.
'이 사람만 우리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무서울 것이 없다.'
을지한의 얼굴에 결연한 안색이 떠올랐다.
'좋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람을 총단으로 데려가자.'
이어 을지한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소생이 감히 노선배님께 한 말슴 올리겠습니다."
"뭐냐?"
"유음하와 그 의형제 놈들을 아 다니시기 위해 손수 움직이신다는것은 한 마디로 말해 시간
낭비고, 모기를 베기 위해 칼을 뽑는 것과 같이 우둔한 일입니다."
"하긴 노부가 직접 발에 땀을 내며 조무라기들을 쫓아다닌다는 것도 좀 남사스럽지?"
을지한의 말에 여문량은 짐짓 고개를 주억거리며 거드름을 떨었다.
"헤헤! 물론입죠! 하지만 만일 소생에게 맡겨주신다면 즉각 놈들의 소재를 파악해 노선배님
에게 알려드림과 동시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소생이 놈들 주변에 그물을 처놓겠습니다.
노선배님은 그저 오도가도 못하는 그놈들을 쳐죽이시면 그만입니다."
"음...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로다!"
여문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을지한은 교활스럽게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럼 소생이 놈들을 찾을 동안 우리 을지당(乙支堂)에 머무르시면 저희들이 모든 사람을
동원시켜 놈들을 찾아내겠습니다."
을지한의 제안에 여문량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옳거니, 요놈이 드디어 나의 덫에 걸렸구나.'
그러나 겉으로는 오히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험험! 명색이 선배가 되어서 까마득한 후배인 자네에게 그런 수고를 끼치면 너무 신세를
지는 게 아니냐?"
을지한은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선배님같은 일대종사를 도와드리는 것이야 오히려 소생의
영광이지요."
"음..."
이에 여문량은 짐짓 생각하는 척하더니 혼쾌히 입을 열었다.
"좋아! 어린 놈 성의도 가상하니 노부가 잠시 그곳에 머물겠다."
순간 을지한은 하늘을 나아갈 듯 쾌재를 불렀다. 그는 술병을 집어들었다.
"노선배님! 잔을 받으십시오."
그러자 여문량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오랜 만에 마음 드는 놈을 만났군, 노부에게 잘만 보이면 내 네놈에게 몇가지 쓸
만한 무공을 가르쳐 주마."
"아이구! 황송합니다."
을지한은 완전히 맛이 갔다. 마뢰진천을 비사각 을지당으로 데려가는 것만도 하늘을 날을
정도인데 무공까지 전수해 준다 하니 어찌 황홀하지 않으랴?
그는 이마가 깨지도록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감사합니다!"
이 순간 여문량은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야릇한 미소를 날렸다.
'이젠 비사각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되는 건가?'
* * *
요녕(遼寧) 심양성(瀋陽城)-
건주여진족(建州女眞族)의 족장 누루하치는 중원 대륙을 넘보며 여진족과 주위 소수 부족들
을 병탄(倂呑)하여 후금국(後金國)을 세운 후 심양성에 수도(首都)를 정했다.
이곳 심양성은 훗날 누루하치의 손자 순치제(順治帝)가 대명 제국을 무너뜨리고 북경(北京)
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후금국 도읍이었다.
봉천(奉天)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는 이곳 심양성 동북방 오산(烏山)에 거대한 성채가
하나 있다.
이곳이 바로 비사각(毘沙閣)의 총본단이었다.
-비사각(毘沙閣)!
무극세천(武極勢天) 야율산(野律山)이 세운 거대무벌(巨大武閥)이다! 누루하치의 지원을 받
은 무극세천 야율산은 흑룡강(黑龍江)과 만주(滿洲) 일대의 무벌들을 굴복시켜 거대한 신흥
세력으로 급부상하였고, 그 힘으로 누루하치를 도와 후금국을 세우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해왔다.
비사각은 누루하치의 후광(後光)이 두터운 덕분에 후금국이 수도를 심양(瀋陽)으로 옮길 때
함께 남하(南下)하여 오산에 거대한 성을 세우니 바로 이곳이 비사각이다.
* * *
두두두두...
한 대의 호화스런 마차(馬車)가 어둠을 가르며 오산대로(烏山大路)를 질주하더니 이내 비사
각 전문(前門)을 통과했다.
전문을 통과한 마차는 성(城)의 중앙을 가르는 청석대로를 따라 내원(內院)으로 달려갔다.
마차 안에는 단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호화대협(好花大俠) 여문량(呂文凉)!
백년 전의 흉마인 몽고의 벼락신 마뢰진천(魔雷震天) 오고타(烏高打)로 변장한 그는 창문
밖으로 스쳐가는 전경을 바라보다 침중한 신음을 토하였다.
"음... 실로 가공할 기세군."
청석대로의 양옆에는 흑의검사들이 장검을 높이 쳐든 채 줄지어 도열하고 있었다. 일견키에
도 극도의 수련을 쌓은 상승검수(上昇劍修)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 울창한 수림에는 나뭇가지마다 영롱한 오색궁등이 화려한 빛을 발했다.
곳곳에 높이 솟은 거각들이 눈에 들어와 그 규모가 방대함을 알 수 있게 했다.
'이들은 대륙 정벌을 위해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왔다. 이렇게 정선된 강병(强兵)과 체
제(體制)를 갖추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비사각 안으로 들어선 후부터 그는 줄곧 심적인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서 풍기는 치밀하고도 어긋남이 없는 인상(印象) 때문이었다. 전문에서부터 지금에 이
르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完璧)했다. 심지어 풀 한포기까지 손길이 미쳐 있었다.
여문량은 수림 넘어 어렵풋이 보이는 전각(殿閣)들을 주시하였다.
'성 내의 모든 건물은 일정한 진형(陣形)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어떠한 목적이 있어 지어졌
음을 의미한다. 거주(居住)만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다.'
비사각의 총단은 엄청난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전문을 지난지 반식경이 지났는데로 마차가 계속 달리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갈수록 그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비사각....'
여문량은 온몸 신경조직(神經組織)을 경직시켜 가는 긴장감을 의식하였다.
그 때였다.
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드디어 마차가 멈추어 섰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여문량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마차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자 그의 전면에 서있는 거대한 전각이 시야에 들어왔다.
<을지당(乙支堂)>
추녀밑 현판엔 용비봉무(龍飛鳳舞)하는 듯한 필체로 을지당이라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
래 을지당의 입구엔 무수한 봉등(鳳燈)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여문량은 을지당으로 향하는 돌계단 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돌계단
위에서도 누군가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중년의 흑의인이었다.
이윽고 그들 두 사람은 돌계단 가운데에서 마주쳤다.
흑의중년인이 먼저 정중히 포권지례를 표하였다.
"대동영검(大東靈劍) 을지정덕(乙支政德)이라 합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문량은 을지정덕을 바라보았다. 을지정덕은 만인(萬人)을 누르는 듯한 위엄을 지닌 자였
다.
'비범한 위인이다!'
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대동영검(大東靈劍) 을지정덕(乙支政德)!
비사각은 모두 여덟 개의 무벌(武閥)이 각 당(堂)을 이룬다.
그 가운데 말갈족(靺鞨族)들이 모여 만든 무벌이 있으니 바로 을지당의 전신(前身)이었던
천강문(天剛門)이다.
흑룡강 상류에 그 세력을 두고 있던 천강문은 비사각을 세운 무극세천 야율산에게 패해 그
의 휘하에 들어왔고 천강문이 아닌 을지당으로 변신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을지당은
비사각 서열 사위(四位)에 달하는 막강 세력을 지닌 곳이다.
여문량은 거드름을 피며 오만하게 말했다.
"핫핫핫! 노부를 일컫어 다들 몽고의 벼락신이라 부르네. 흠, 노부를 초대해 주어 고맙네. 당
주."
실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어투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인상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거만을 당연하다는 듯 바라보는 눈치들이었다. 그러자 을지정덕은 손을 들어 위쪽을 가리켰
다.
"올라 가시지요. 노선배님."
"흠흠!"
여문량은 뒷짐을 진 채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을지정덕이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을지당의 소당주인 을지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보란듯이 그의 뒤를 따랐다. 누군가에게 보이
기 위한 위시나 과시 같은 그런 큰 몸짓이었다.
* * *
차가운 동토(凍土) 요녕에 뜨는 보름달은 그래서 그런지 더 커보이고 밝았다.
겨울의 마지막 자락인 이월(二月) 하순(下旬)이라 하지만 동토의 겨울은 대륙보다 더 길고
추웠다.
휘이잉...
차가워 맵게만 느껴지는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원(庭園) 매화나무의 꽃들이 부시시 몸을 떨다 눈꽃처럼 떨어진다. 그 꽃들은 그 고독한
꿈 가운데 이루지 못한 그 고고함들을 한껏 누리지도 못하고 스러져간다.
아담한 매화원(梅花園) 주위에 한 명의 청의서생(靑衣書生)이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빼어난
미장부는 아니었지만 단아한 이목구비를 지닌 이십오륙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가끔 무엇을 생각하는 듯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채 거닐었다. 때때로 높다란 밤하
늘에 홀로 뜬 보름달에 시선을 그득히 던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꿈일진데...인간은 그저 영욕(永慾)의 늪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그
무리들이 싫어 홀로 이곳에 왔건만 이곳 역시 다른 곳과 다를 바가 없으니...."
처연하게 들리는 탄식성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때 매화원 속에서 돌연 하나의 꽃이 피어
났다. 아니 그것은 꽃이 아니라 한 명의 소녀(少女)였다. 나이는 대략 십육칠 세 가량이나
되었을까? 스스로 내부의 아름다움을 못이겨 피어오르는 꽃처럼 그녀의 모습은 매화숲과 하
나가 되어 있었다. 실로 그 소녀의 모습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백옥빛으로 흘러내
린 선명한 이목구비, 특히 두 눈은 보석같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순 소녀는 청의서생을 발견하자 발그스레하게 두 뺨을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옷자
락을 매만졌다.
청의서생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을지낭자! 웬일로 이 홍매원(紅梅園)까지 오시었소?"
지극히 부드러운 말씨였다. 소녀는 약간 당황한 듯 더욱 얼굴을 붉혔다.
"아니에요. 단지 산책을 하다 저도 모르게 그만 이곳까지 오고 말았어요...."
청의서생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그에게서 호방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하.... 을지낭자의 취흥도 대단하군요. 불초 정말 감탄했소이다."
"어머!"
소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을지방방(乙支芳芳)!
그녀는 을지당주인 대동영검 을지정덕의 딸이며 을지한의 유일한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어
려서부터 조부와 부모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라왔다.
하여, 그녀는 비사각 밖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소녀였다.
그녀 말마따나 을지방방은 보름달의 달빛을 아 거닐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곳 홍매원에 들어
오고 만 것이다.
홍매원(紅梅園)!
비사팔당(毘沙八堂) 가운데 한 곳인 흑룡당(黑龍堂)세력권인 성 서쪽에 위치한 정원이다. 그
리고 눈 앞의 청의서생은 보름여 전 흑룡당이 중원에서 초빙(招聘)해온 중원 고수라는 것만
을지방방이 알 뿐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는 모른다. 사실 같은 비사각의 당(堂)을 맡고
있지만 각 당들은 서로 왕래가 없다. 중론(衆論)을 모아야 하는 대사(大事)가 아닌 이상 각
자 자신들의 당만 관리할 뿐이다.
문득 청의서생은 부드러운 눈길로 물었다.
"영친께서는 을지당에 계시요?"
을지방방은 옥구슬이 은쟁반 위를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오늘 저녁 오라버니가 한 분 노선배님을 모시고 와서 그 분과 대화를 하고 계세요."
"노선배?"
청의서생은 가볍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을지방방은 생긋 매혹적인 웃음을 날렸다.
"모르셨어요? 몽고의 벼락신인 마뢰진천 노선배님이 저희 당에 와 계셔요."
일순 청의서생은 놀란 눈을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을지당에서 이번 회동(會同)에 수위를 차지할 계획을 오랫 동안 짜고 있었다더니 대어
(大魚)를 물어왔군.'
청의서생의 단아한 얼굴에 한 겹 차가운 기운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 이 즈음이었다. 그런데
이때 하나의 그림자가 매화원 안으로 들어왔다. 달빛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이십이삼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흑의청년으로 그의 눈매는 가늘게 찢어져 있어 음사한 성격을 나타냈다.
흑의청년은 청의서생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형님! 여기 계셨군요. 정말 한참 찾았습니다."
청의서생과 을지방방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려졌다.
"가(賈)아우 아닌가? 어서 오시게."
"가대가(賈大哥)를 방방이 뵈어요."
청의서생과 을지방방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떨어졌다.
-비진산(匕塵傘) 가철린(賈鐵隣)!
흑룡당주(黑龍堂主) 팔황표(八荒剽) 가요풍(賈搖風)의 아들이자 흑룡당 부당주 직에 올라 있
는 야심만만한 젊은 룡.
가철린은 을지방방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끈끈한 욕정(欲情)이 담겨져
있었다.
'을지방방, 내가 중원을 다녀오느라고 몇 달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구나, 저 가슴탱이하며
어동통한 엉덩이... 언젠가는 저 계집을 꺽어 넘어뜨리고 말겠다.'
그의 눈빛 탓일까?
을지방방의 갸녀린 교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 나이 열일곱, 사내의 눈빛을 보고 그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능히 알고도 남을 나이다. 뿐만 아니라 가철린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만날
때마다 끈쩍한 눈빛을 보내오곤 했다. 그 눈빛이 몸에 닿을 때마다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한
전율을 받아온 그녀다. 하여 의식적으로 그를 피해왔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되자 괜히 소름
이 돋았다. 한편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청의서생이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가철린에게 시
선을 주었다.
"아우, 날 찾아다녔다니? 무슨 일인가?"
가철린은 빙글빙글 웃으며 유쾌하게 입을 열었다.
"하하하.... 아버님께서 빨리 형님을 모셔오라고 야단입니다."
"가당주께서 어쩐 일로 나를...?"
청의서생은 의아한 빛을 띄웠다. 가철린은 생긋 웃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우선 저를 따라와 보십시오."
청의서생은 천천히 가철린을 따라가며 을지방방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중에 또 만나길 바라겠소이다. 을지낭자."
"예..."
모기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를 흘린 을지방방은 어느덧 멀어져 가는 청의서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잰 걸음으로 을지당사로 달려갔다.
행여 가철린이 다시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그녀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다.
호화대협 여문량.
몽고의 벼락신 마뢰진천 오고타로 변장한 채 그는 영접을 받으며 비사각 안으로 들어오고
그의 등장으로 인해 일대 풍운이 야기되는데...
▣ 후기 호화대협(好花大俠) 제1부를 마치며
호화대협(好花大俠) 여문량(呂文凉)-!
대륙제일(大陸第一)의 신비(神秘)이며, 강호무림(江湖武林)의 불파신화(不破神話)인 용황성
(龍皇城)!
그곳 용황성에 괴변(怪變)이 일어났다.
용황성 여덟 명의 장로 중 종리단황(鐘里段皇)을 위시한 여섯 명이 용황성을 배신하고 강호
로 뛰어든 것이다.
이에 용황성에서는 그들을 척살(刺殺)하기 위해 고수를 파견하니 여문량의 강호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배신자들을 찾기 위해 여문량은 변칙적인 방법을 쓴다.
바로 만사무불통(萬事無不通), 만사해결(萬事解決)의 해결사로 강호에 등장한 것이다.
숱한 신화를 창출해 나가면서 강호의 주역으로 떠오른 호화대협 여문량, 그런 그가 뜻하지
않게 황궁(皇宮)의 암운에 휘말리고, 지고무상한 신분을 나타내는 천명어사대인(天命御使大
人)이 되어 만주(滿洲) 누루하치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는데...
여문량의 만주행,
그리고 중원무림의 마세(魔勢)와 새외삼패천의 중원 진출(進出)-거기에 대명(大明) 황궁(皇
宮)의 위기(危機)와 급변하는 변방(邊方)의 정세(政勢)!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여진(女眞) 후금(後金:훗날 청나라가 된다.)의 발호(跋扈),
쓰러져 가는 대명을 살리려는 목훈왕자(穆焄王子)와 협걸의인(俠傑義人)들!
그리고 용황성을 탈출한 자들의 강호 무림은 물론 대명 황실까지 전복시키려고 펼치는 음모
(陰謀)와 계략(計略)...
-호화대협 여문량,
그의 기인행(奇人行)은 2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