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위한 예술, 몸을 위한 활동 - 메를로퐁티와 로댕
시각예술은 눈을 위한 예술이 아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프랑스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한눈에 보아도 르네상스의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다비드 상〉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반면 로댕의 작품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는 차이도 명백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재료 자체보다 재료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은 자신의 조각상을 대리석이라는 돌덩이가 아닌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다비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는 데 있다. 다비드를 감상하는 동안 우리의 눈은 대리석이라는 물성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비드라는 인물을 떠올린다.
로댕,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 1880
미켈란젤로, 〈다비드 상〉 David, 1504
시각예술은 눈을 위한 예술이므로 조각은 눈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다비드 상〉이 시각적으로 나무랄 곳 없이 완벽한 데 비해 〈생각하는 사람〉의 거친 표면은 시각적으로 완벽한 실루엣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에 매료된다. 이는 조각이 눈을 위한 것이 아닌 몸을 위한 예술이라는 뜻이다. 메를로퐁티는 세계의 의미가 인간의 지성이 아닌 몸에 축적된 체험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로댕의 작품은 이와 전혀 다르다. 〈생각하는 사람〉은 표면부터 거칠다. 물론 그의 작품이 거친 이유는 단지 재료가 대리석이 아닌 청동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재료와 상관없이 그가 작품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댕의 작품에서 그리스나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매끈한 표면이나 시각적인 완전함을 기대하였다면 실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는 데는 단순히 재료나 재료를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조각, 나아가 시각예술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방향의 차이를 의미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우리가 조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상을 구현하였다. 조각이란 시각예술이며 시각예술은 눈을 위한 예술이므로 조각은 눈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비록 대리석으로 만들었지만 〈다비드 상〉의 완벽한 표면과 흐트러짐 없는 실루엣은 시각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완성도를 지닌다.
이에 반해 로댕의 작품은 조각은 시각적인 예술이라는 통념을 위반한다. 생각하는 사람의 거친 표면은 시각적으로 완벽한 실루엣을 이루고 있지 않다. 거친 표면은 사람의 근육을 표현한다기보다 청동 자체의 질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시각적 실루엣보다는 표면의 질감 자체를 수용하게 된다.
시각적 실루엣이 아닌 거친 표면에 관객이 반응한다는 것은 시각예술에서 매우 큰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조각이 오직 ‘눈’을 위한 예술이 아닌 ‘몸’을 위한 예술로 바뀌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표면의 질감에 반응하는 것은 시각적인 반응이 아니다. 가령 어떤 사람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는 것과 10센티 정도로 밀착하여 보는 것은 다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볼 때는 사람의 실루엣이 드러나며 우리는 이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정보화한다.
이에 반해 밀착된 상태로 사람의 얼굴을 볼 경우 실루엣이 아닌 피부의 질감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눈이라는 기관을 거친다는 점에서 시각적이지만 사실상 거칠거나 매끈하다는 등의 촉각적 경험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촉각적 경험은 눈뿐만이 아니라 눈과 손, 코와 귀 등이 총체적으로 얽혀 있는 우리의 ‘몸’을 전제하는 것이다.
미국의 미술평론가 할 포스터(Hal Foster, 1955~)의 분석을 참조하여, 자코메티 작품 〈떠도는 공〉(Suspended ball, 1931)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두 개의 독립된 돌조각이 불안정하게 포개진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 보자면 매우 위태롭기까지 하다. 초승달 모양의 비스듬하게 누운 돌 위에 마치 사람의 엉덩이를 연상시키는 홈이 패인 공 모양의 돌이 올려진 상태는 누가 보아도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듯 불안감을 준다. 이러한 불안감은 눈으로 봄으로써 발생하지만 결코 시각적인 경험이 아니다. 중력에 대한 경험은 시각적인 것이 아닌 몸의 체험과 관련되는 것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1/25/2011012502107.html
이 작품이 애초부터 눈이 아닌 몸의 체험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각의 형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두 개의 돌덩어리는 어느 것이 남성이고 여성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성적인 행위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인 욕망은 단순히 시각적인 욕망이 아니다. 성이란 보는 것, 만지는 것, 맡는 것 등을 모두 총괄하는 몸의 총체적 욕망이다. 성적 주체란 시각적 주체가 아닌 몸적 주체를 겨냥한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눈이 아닌 몸을 겨냥한 것이다.
로댕이나 자코메티의 작품은 눈을 위한 예술로 여겨졌던 시각예술조차 그 바탕에 눈이 아닌 몸이 있다는 교훈을 준다.
'몸의 철학' 혹은 '지각의 현상학'으로 유명한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모든 경험의 원천이 바로 인간의 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당시 매우 도발적인 그의 철학적 원칙은 몸보다는 인간의 추상적 정신활동, 즉 지성을 궁극적인 가치로 내세웠던 서양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도전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각예술은 눈을 위한 예술이 아니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