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오 야이시여, 당신이 잘못을 지켜보신다면 ··· 누가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시 130:3. 여호와께서는 용서하는 면에서 참으로 탁월한 본이 되십니다. 첫째, 그분은 언제나 기꺼이 용서하십니다. 둘째, 그분은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완벽히 아시며,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는지 판단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계십니다. 셋째, 여호와께서는 용서해 주실 때 잘못을 완전히 지워 없애셔서 우리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깨끗한 양심과 그분의 승인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불완전성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통찰」 제2권 1200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의 육적인 약함을 참작해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므로, 그들은 유전받은 불완전성으로 인한 잘못들로 인해 끊임없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시 103:8-14; 130:3) 하느님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라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빌 4:4-6; 요1 3:19-22)” 「파22.06」 7면 18-19항 |
오 야이시여, 당신이 잘못을 지켜보신다면 ··· 누가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If thou, LORD, shouldest mark iniquities, O Lord, who shall stand? —시 130:3. Barnes' Notes on the Bible If thou, Lord, shouldest mark iniquities - If thou shouldst observe, note, attend to, regard all the evil that I have done. The Hebrew word means properly to keep, to watch, to guard. The word, as used here, refers to that kind of vigilance or watchfulness which one is expected to manifest who is on guard; who keeps watch in a city or camp by night. The idea is, If God should thus look with a scrutinizing eye; if he should try to see all that he could see; if he should suffer nothing to escape his observation; if he should deal with us exactly as we are; if he should overlook nothing, forgive nothing, we could have no hope. Who shall stand? - Who shall stand upright? Who could stand before thee? Who could hope to be acquitted? This implies (1) that the petitioner was conscious of guilt, or knew that he was a sinner; (2) that he felt there was a depth of depravity in his heart which God could see, but which he did not - as every man must be certain that there is in his own soul; (3) that God had the power of bringing that to light if he chose to do it, so that the guilty man would be entirely overwhelmed; (4) that he who urged the prayer rested his only hope on the fact that God would not mark iniquity; would not develop what was in him; would not judge him by what he saw in his heart; but would deal with him otherwise, and show him mercy and compassion. Every man must feel that if God should "mark iniquity" as it is - if he should judge us as we are - we could have no hope. It is only on the ground that we may be forgiven, that we eau hope to come before him. 반스의 성경 노트 주여, 주께서 죄악을 표시하시면 - 주께서 내가 행한 모든 악을 관찰하고, 주목하고, 주의를 기울이시고, 고려하신다면. 히브리어로 '지키다, 주의하다,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이 단어는 경계를 서는 사람, 밤에 도시나 진영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이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그런 종류의 경계 또는 경계를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처럼 면밀한 눈으로 보시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려고 하시고, 그의 관찰을 피하기 위해 어떤 고통도 받으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다루시고, 아무것도 간과하지 않으시고,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설 것인가? - 누가 바로 서겠습니까? 누가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누가 무죄 판결을 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1) 청원자가 죄책감을 의식했거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 타락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보실 수 있지만 자신은 보지 못하는 타락의 깊이가 자신의 마음에 있다고 느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것을 드러내어 죄인이 완전히 압도될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4) 기도를 촉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악을 표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발전시키지 않으시며, 마음에서 본 대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다른 방법으로 그를 다루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에 자신의 유일한 희망을 걸었다. 하나님께서 죄악을 있는 그대로 "표시"하신다면, 즉 우리를 있는 그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고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땅 위에 있을 때입니다. |
하느님에게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이란 유익한 것이고 악이란 해로운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유익하지도 해롭지도 않거나 또는 온전히 유익한 것입니다. 후자에서 나온 관념이 하느님은 전선(全善)하신 분이라는 관념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선하다'라는 개념은 좋게 표현한 것이며, 사실은 존재하는 그 자체이지 선하고 악한 개념이 아닙니다. 완전히 선하다는 것은 악의 개념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며 이는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이고 비교되는 개념이 없는데, 작다 크다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듯이, 선하다 악하다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하다 또는 악하다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인간을 비교의 기준으로 정한 것입니다. 동물을 잡아 먹을 때 그 동물을 기준으로 본다면 인간은 살인적으로 악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받는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선악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질서에 잘 어울리면 그는 선택을 받는 것이고 어긋나면 그는 유기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이중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준에서 선악은 자연의 질서에 포함되어야 하며 포함되는 것입니다. 성경 히브리서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게 되며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겠다고 하였는데(히 9:27), 만일 죽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이 심판은 무의미해집니다. 따라서 심판을 받을 자는 반드시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살아 있을 동안의 모든 정보를 통하여 보상과 처벌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공의입니다. 하느님이 마치 인간처럼, '자기를 믿는다는 뇌물'을 바친다고 좋아하시어 처벌할 것을 용서하는 인간 같은 인격이 아닙니다. 그는 인격보다 차원이 높은 신격이므로 인간적인 점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인간처럼 행동하시지 않습니다. 그는 완전의 기준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생각과 의지로 행동하시지만 인간이 볼 때는 기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하며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분은 사물이나 사람처럼 개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성질(=속성)로 존재하고 있으며 늘 존재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존재가 있고 상대적으로 없음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지 없음이 있고 존재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없음이란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있음을 생기게 하는 바탕으로서의 없음이란, 말 그대로 없으며 그러한 개념조차 의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가 없다가 있게 되었다면 하느님은 이 세계와 분리된 초월자일 수 밖에 없고, 이 세계가 시작이 없었다면 하느님이 바로 이 세계이며 동시에 내재자인 것입니다. 빅뱅이론에서 빅뱅의 시작은 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과거의 존재에서 현재의 존재로 커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지금도 이 우주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빅뱅은 시작이나 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커짐이 진행형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주는 시작이 없으며 따라서 하느님은 이 우주 자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물론 이 이론에는 반론과 비판이 쏟아질 것이 예상됩니다 ^^ 그러나 결론이 어떠하든ㅡ하느님과의 소통을 위해서ㅡ그분을 인격으로 취급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라 생각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좋은 인식으로 소통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
질문:
1. 선악은 무엇이 기준이 됩니까?
2. 이 세계는 시작이 있습니까?
물론 이 질문들은 이율배반적이므로 정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가 정답이라고 제시한다면
그것은 도그마에 지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