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갑자기 많아지거나 갑자기 적어질 때
세상의 새로운 면을 많이 알게 된다는 말...
오늘 아침 어디선가 읽은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남편이 드디어 출근을 한다고 부산하게 준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비록 적응 훈련 기간이라 부서배치도 받지 못하고 그야말로 아르바이트 생들과 함께 청소도 하고 티켓도 끊어주고 안전 바도 점검하면서 몸으로 때우고 있기는 하지만...
지난 주에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때까지 하루종일 하얀 유니폼으로 갈아 입고 그 큰 놀이동산을 청소하러 다녔다. 저녁에 집에만 들어오면 다리가 아프다느니, 어떤 초등학교 학생들은 그 징그러운 "뿌셔뿌셔"만 먹는다느니, 어떤 유치원 아이들은 롯데샌드를 땅바닥에 떨어 뜨리고 죄다 밟고 지나가서 그 파인애플 크림을 치우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느니 하면서 하루 일과를 종알종알 보고하는 거였다.
애들이 "뿌셔뿌셔" 먹는 걸 보고는 먹고 싶었는지 피자 맛, 불고기 맛, 바베큐 맛 "뿌셔뿌셔"를 사 와가지고는 " 요즘 이게 인기래 " 하면서 애들처럼 생라면을 씹어 먹는다. 퓌... 31살이면서 자기는 절대 386세대 아니고 297세대라고 우기는 남편. 유행에 뒤쳐질까봐 정말 고생한다.
백화점 세일기간에 큰맘 먹고 후부 스웨터 하나 사 입혔더니 맨날 조아라고 그 옷만 삼일째 입고 다닌다.
아우 우리남편 언제 철들지?
며칠 전에는 밥상을 보자마자 너무나 반가운 반응을 보여야 하는 우리 남편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아우... 못먹겠다" 그러는 것이다.
아니 감히? 하늘같은 아내가 해준 밥을 왜 못먹어?
그 날은 난 싫어 하고 오빠는 좋아하는 카레밥이었는지라 더 화가 나려고 했다.
" 아까 낮에 피크닉동산 청소하는데 말야..."
"그런데?"
"이말 하면 너두 밥 못먹을텐데...?"
"먼데?"
"오늘 유치원 생들 소풍 무지 많이 왔걸랑.. 근데 크리넥스 있잖아. 화장지가 풀밭에 떨어져 있는 거야."
"응..그래서?"
여기까지 듣고는 상상력이 훌륭한 나는 좀 비위가 상하려고 했다.
음....어떤 어린애가 김밥 먹다 토해 놨나 부다. 에이... 쯔업~~
" 근데...그냥 화장지인줄 알구 화장지를 손으루 딱 집었더니... 우웩"
"나두 우웩"
화장실을 못찾은 아이들이 응가를 해논 것이었다.
워낙에 비위가 약한 남편은 정말 그날 카레를 못먹었다.
나두 일단 상을 치웠다가 배고파서 그냥 먹었다. 나는야 아줌마잖아. 으흐흐...
막내아들에다 늦둥이로 태어나 나름대로 곱게 자랐다고 우기는 우리 남편이 세상에 그런 걸 다 치우다니... 신입사원때 꽃마을 가서 불편하신 할머님들 기저귀 빨아본 이후 처음이란다.
아우 기특도 하여라... 가만 보면 가장으로써 식구들 굶길 일은 없을 것 같단 마랴... 남자 파출부로도 훌륭하다. 으흐흐... 특기는 청소. 빨래. 설겆이. 취미로 애완견이랑 놀아주기. 음... 광고 한 번 내볼까나..?? 홍홍~
하여간에 일주일간의 청소를 끝내고 어제부터는 놀이동산에 그것도 바이킹에 소속되어서 운전보조원쯤으로 일했나보다. 바이킹.... 워낙에 겁은 많아도 안전이 보장된 스릴은 즐길 줄 아는 우리 부부는 번지점프도 같이 했기 때문에 이제 그런 건 시시하다. 해적선 바이킹이기 때문에 선원 복장을 갈아 입어야 했는데 우리남편왈...
"바지는 일단 젤 큰걸루 달래서 입었더니 겨우 들어가기는 하더라구...
그런데 윗도리가 완전 브이넥으로 깊게 파인거야... 우하하하..."
"푸하하하... 캭캭, 그래서 입었어?"
"응...어떡하냐 그럼..일단 입구 옷핀으로 목까지 채워찌..."
"으흐흐흐.."
남편은 이상하게 진화가 덜 되었는지 아니면 워낙에 햄, 쏘세지만 많이 먹어서 환경 호르몬 때문인지 가슴에 털이 무지무지 많다. 가슴만이 아니라 머리 숱도 많고 수염도 많고 다리는 시커멓고...
하여간에 온몸에 털이 북실북실하다. 그래서 추위도 안타나?
그래서 털많은 강아지를 좋아하나?
남들이 입으면 몸빼처럼 헐렁할 빅 사이즈 바지를 오빠가 입었으니 꽉 맞았을 테고
그런 바지에 가슴이 ?게 파인 하얀 색 셔츠를 입고, 게다가 가슴엔 털이 몽실몽실...
그리고 가을볕 아래 청소라느라 구리빛으로 그을린 얼굴...
상상해보니 조금 멋있을랑 말랑 한다.
완전 만화 보물섬에나 나오는 갑판장 스타일이군...
아직 한달이나 남았다고 투덜투덜 대지만, 젊은 나이에 해보지 않으면 안될 새로운 경험이고 값진 시간이 될 것임을 의심하진 않는 것 같다.
매일매일 환기통의 먼지가 얼마나 쌓였을까를 상상하며 회색빛의 서울역앞에서 회색빛 얼굴로 앉아있는 나는 ,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시원한 공기, 생기발랄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부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