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전선현
(1) 나는 엄마를 좋아한다. 엄마는 내 위로 둘이나 유산하고, 어렵게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나를 낳자마자 ‘ 내 딸이라도 꼭 서울로 대학 보낼끼다. ’ 라고 굳게 결심하셨단다. 그리고 엄마는 그 생각을 틈날 때마다 내게 말씀하셨다.
(2)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아빠는 공무원에서 무역회사로 이직하셨지만 내 밑으로 남동생 여동생이 연이어 태어나자 엄마는 집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엄마는 대학만 보내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고, 세 남매 대학 보내는 것이 꿈이 되었다고 하셨다.
(3) 나는 엄마 뒤에 찰싹 붙어서 아이들이 문제 푸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봤다가 틀리면 엄마에게 이르곤 했다.
“ 엄마, 쟈 3 x 6을 잘못 썼다. ”
“ 조용히 해라. ”
엄마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나는 내심 뿌듯 해했다. 어린 내가 초등학생 문제를 맞추고 있는 것을 엄마가 속으로 좋아할 것이라 느꼈다.
(4) 엄마가 젊었을 때, 대학을 안 나온 사람에게도 교사 시험을 볼 기회가 주어졌단다. 그런데 그만 풍금을 치고 노래를 하는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단다. 엄마는 음치였다. 엄마는 아이가 어릴 때 피아노를 가르치면 음치가 안 될 것으로 생각하고 일곱 살 내 손을 잡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가정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악보 보는 법은 빨리 익혔지만, 안타깝게도 엄마처럼 음치였다.
“엄마, 노래를 가르쳤어야지.” 음악 시간만 되면 내가 엄마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몰랐다. 피아노 배우면 노래도 잘할 줄 알았지.”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5) 정권이 바뀌어 과외가 금지되자 엄마는 공부방을 접어야 했다. 옆집 아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 이 문제 물어보는 거는 안 걸리겠지예? ”
(6) 엄마는 집에서 우리만 키우고 싶은데 아빠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했었다. 공부방을 접고 엄마는 화장품 외판원이 되고 원래 살던 동네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덜컥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했다. 출퇴근 시간이 두세 시간 걸리는 곳이었는데….
(7) 엄마는 칠판을 사 걸고, 사자성어를 써놓고 출근하셨다. 해가 지면 나와 동생들은 차려둔 밥을 먹고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렸지만 사실 사자성어 외우는 것을 까먹을 때가 많았다. 피곤함에 지친 엄마도 확인하는 것을 자주 거르셨다. 가끔 기억나면 묻고 모르면 혼나고 가 되풀이되었다.
(8) 초등학교 시절 내가 오직 바라는 것은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있는 것 그것뿐이었는데, 엄마가 바라는 것은 내 인생에 바라는 것은 공부 잘하는 것 그것뿐인 것만 같았다. 가끔 쉬는 날엔 엄마는 우리 남매들에게 시를 외우게 하셨다. 햇살이 듬뿍 들어오는 큰 방에서 나는 엄마를 베고 누워서 동생들이 시를 외우는 것을 구경했다. 동생들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같은 긴 시도 척척 외웠는데 나는 엄두도 못 냈다. 외울 때마다 꼭 몇 자씩 틀려서 나는 슬쩍 외우는 걸 확인하는 역할로 넘어갔다.
(9) 내가 고2 때 아빠가 회사 노조 위원장이 되어 활동하다 술병을 얻어 퇴직하게 되자 엄마는 식당을 열게 되었다. 그때도 엄마의 꿈은 여전히 나를 서울로 대학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딸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MBTI 유형에서 가장 공부 습관 붙이기 어렵다는 ENFP 유형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아빠를 더 많이 닮았던 것 같다.
(10) 아이들 키울 때 우연히 만나게 된 중학교 동창이 엄마 안부를 물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 잘 계시제? 우리 중학교 때 일곱 명씩 너거 집으로 몰려가면 그 때마다 어머니가 라면 끓여주셨자나. 진짜 맛있었다 아이가. 어머니 복받으실끼다.” 간혹 엄마가 늦게 나가거나 쉴 때 친구들이 오면 먹을 것을 내주던 엄마를 그 친구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이 돌아간 후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말이다.
(11) 나는 엄마에게 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엄마가 원하는 대학을 갈 만큼 좋은 성적표를 가져가지 못했다. 곧 도로가 생겨 헐리게 될 줄 모르고 속아서 넘겨받은 식당을 접게 되는 상황이었는데도 나는 노느라 바빴고 엄마에게 옷 사달라 졸랐다. 엄마가 영어 학원이며, 수학 학원이며 보내줬는데, 나는 불안해하면서도 친구들과 놀았다. 엄마 몰래 미팅에 나가기도 했다.
(12) 아, 나는 엄마를 좋아했지만, 엄마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말 잘 듣는 그런 딸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돈 잘 벌어서 엄마를 호강시켜드리고 싶었지만, 그것도 못 했다. 아르바이트도 안 하고 서울에서 대학 4년을 보내며 나는 무엇을 했을까. 엄마는 나중엔 그저 취직해서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되었으면 했는데,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고 말았다. 엄마는 엄마대로 힘겹게 삶을 살고, 나는 나대로 내 한 몸 버거워하며 살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안정적인 직장은 주어지지 않았고, 작은 회사들을 전전하다 결혼했다. 결혼해서는 엄마처럼 공부방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늘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이 숨어 있다.
(13) 그래도 이제는 안다.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받지 못했지만 서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것을 말이다. 엄마는 사실 내가 엄마 딸이라서 좋았던 거다. 엄마처럼 살지 말고 당당하고 자신있는 여성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요구한 것이었다. 엄마의 기대는 오직 나를 위해서였는데√….
(14) 사랑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아도 멈출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원망하고 섭섭해하면서도 다시 만나는 것이 사랑이다. 항상 용서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나는 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랐으면서도 더 안 해준다고 원망했었다. 무거운 기대로 나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고 원망했었다.
(15) 하지만 안다. 엄마가 없이는 나도 없다는 것을. 엄마의 강인한 생활력으로 이렇게나마 살 수 있다는 것을. 팔순이 된 엄마는 말씀하신다.
“ 너거가 내 희망이었다. ”
그렇게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엄마와 딸로 만났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