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동과 서소문 일원에 있는 몇몇 근대 문화재와 문화재가 있던 옛터를 잠깐 돌아봤다. 먼저 웨스틴조선호텔 안에 있는 사적 제157호 환구단(圜丘壇)이다. 시청 앞 광장 남동쪽에 출입문이 있지만 문만 보존되고 있는 것이고, 이 옆이나 뒤로 돌아서 들어가게 된다. 아니면 웨스틴조선호텔로 들어가 로비 앞을 지나가면 환구단을 볼 수 있다. 소재지는 서울 중구 소공동 87-1번지이다.
환구단(圜丘壇)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이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다.
황궁우를 정식으로 들어가는 문은 남쪽인데 지금은 호텔건물 때문에 이쪽으로 바로 들어갈 수 없고, 서남쪽 쪽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문을 통해 나간 뒤 다시 이 문을 통해 황궁우로 들어가면서 정식 출입의 기분을 내본다.
이 문의 계단에는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석물들이 자리한다.
3개의 돌북, 즉 석고(石鼓)는 황궁우 옆쪽 조금 높은 단 위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 석고는 광무 6년(1902년)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조형물이라고 한다.
석고는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용무늬는 조선 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서 당시 최고의 조각 중 하나로 평가된다고 한다.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서울의 중심지역이었기에 많은 근대 건축물이 남아 있고, 이들은 대개 사적이나 유형문화재, 그것도 아니라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사적 제280호 ‘서울 한국은행 본관’은 남대문로 39(남대문로3가)번지, ‘한국은행 앞 교차로’ 서북쪽, 즉 신세계백화점 맞은편에 위치한다. 신세계백화점 옆에는 ‘옛제일은행본점’ 건물이 있다. 사진의 오른쪽이 한국은행 본관, 길 건너편이 옛제일은행 건물이다.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르네상스시대 성 건축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정교하고 우아한 건물이다. 1910년대에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건물로 일본의 제일은행 경성지점이었으나 옛 조선은행이 설립되기까지 중앙은행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행 본관이 되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골 콘크리트 구조로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다. 일본사람이 설계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내부가 불에 타서 1956년에 보수하였다. 그 후 1987년 신관을 건물의 뒤쪽에 건립하고, 이 건물은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1호 옛제일은행본점의 주소지는 중구 충무로1가 53번지이며, 한국은행본관 건물 맞은편에 있다. 서민금융의 전당을 목표로 했던 제일은행 본점 사옥이다. 1913년 국내 건물로는 처음으로 국제 현상 설계에 의해 1933∼1935년에 지어졌다. 한국전쟁 때에도 피해가 없어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로서 은행 건물로는 한국 최초의 철골·철근 구조를 사용하였으며, 한국산 화강석을 사용하여 마감하였다. 영업장 천장의 꽃 모양 석고부조는 근대 건축 양식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단아한 모양의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는 전형적인 네오-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와 건국 초기의 격동기를 거치며 최근의 고도경제 성장을 이룩하기까지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금융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기념비적 건물이다. 아쉽게도 두 건물 다 안쪽까지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숭례문이 보인다. 숭례문은 얼마 전에 다녀왔으므로 걸음이 닿는 대로 뒷모습, 옆모습만 잠깐 바라본다.
숭례문의 서쪽에는 대한상공회의소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의 서쪽 담장은 서울성곽을 복원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
초입부에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으며,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담장 아래쪽에는 일부 오래된 돌이 있어 이들은 어쩌면 옛 성돌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복원된 성곽은 다음 건물인 올리브타워까지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더 많은 오래된 돌이 쌓여 있다. 내력은 확실히 조사해보지 못했지만 이렇게나마 성곽의 복원을 상징적으로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오래된 돌들을 활용한 것은 칭찬받을 만하다.
이 길을 따라가면 왼쪽에는 중앙일보사와 호암아트홀이, 오른쪽에는 철골 구조의 호암아트홀 주차장 건물이 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서소문고가도로가 시작되는 서소문로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한양도성의 서소문에 해당하는 소덕문(昭德門)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문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주차장 건물의 꺾이는 지점에 표지석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표지석이 있는 곳의 주소는 서울 중구 서소문동 58-41번지에 해당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서울의 4대문과 4소문 중에 묘하게도 서쪽에 있는 서대문과 서소문만이 복원조차 되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에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다.
소덕문은 서울의 서소문으로 태조 5년(1396)세웠다. 예종 때 소의문(昭義門)으로 고쳤고 1914년 일제가 철거하였다. 소덕문은 도성의 서남쪽인 숭례문과 돈의문의 중간지점에 있었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이 원래의 위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14년에 소덕문의 문루를 다시 건축하였는데, 석문을 개축할 때 왕이 문의 이름을 고치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소덕문의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쳤다. 소덕문은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구실을 하였다. 당시 도성의 시신은 광희문과 소덕문을 통해서만 운구하도록 했는데, 불편하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자 1909년 이 제도는 폐지됐다.
소덕문은 성보다 약간 높게 돌을 쌓은 뒤 가운데에 홍예문(虹霓門) 하나를 만들어 통로를 만들었다. 그 위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구조의 문루를 세웠다.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경복궁 중건을 위해 비용을 마련하고자 서울의 4대문을 통과하는 사람들로부터 통과세를 거두었다. 이 때 소덕문은 훈련도감이 관할했다. 소덕문은 일제 때인 1914년 도시 계획이라는 구실로 철거되었고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소덕문터를 돌아 나오니 시청 방향이다. 이곳에 또 표지석 하나가 있어 살펴보니 ‘시위병영터(侍衛兵營址’라고 쓰여 있다. 시위병영터는 조선 후기에 임금의 호위를 위하여 조직된 보병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시위대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전투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산되었다. 시위대의 해산은 군인들의 항일시위투쟁이 벌어진 계기가 되었다.
[인용 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문화콘텐츠닷컴, 현장설명판]
첫댓글 조선호텔 드나들땐 무심히 보았는데 이제보니 새롭습니다
슬픈 역사지만 그것도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역사니까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나중에 서울 갈 때 꼭 참고해야겠네요.^^
서울시청-서울역 중심으로 인근의 근대문화유적만 돌아보려도 하루 종일로도 모자랄 거예요. 덕수궁, 경복궁, 경희궁도 인근에 있으니 더더욱...
상공회의소 옆에는 원래 한양성곽이 조금 남아있었어요....
전 분명히 알고 있어요...많이 보고 아쉽다고 했거든요.
그걸 그대로 살렸네요 ㅎ
역시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저는 성벽들이 언제까지 남아있는지도 알지 못했고, 지금 이렇게나마 복원의 시늉이라도 낸 것조차 불과 얼마전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보니 더 반갑네요~~ 연수원 교육가며 자주 가던곳~~
그렇군요.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자주 가지는 못한답니다^^
잘 봤습니다. 그렇잖아도 환구단에 대해 알아 보려던 참인데......
환구단(원구단) 옛모습 사진이 있더군요. 그조차 약소국의 몸부림이었겠지만 무참하게 헐려나가고 숙박시설이 들어섰으니 우리 근대사의 슬픈 자화상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