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普天敎
차경석(車京石)이 창시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
*시대 : 현대
*설립 : 1921년
*성격 : 신종교
*유형 : 단체
*설립자 : 차경석(車京石)
*분야 : 종교·철학/신종교
1880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차경석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 접주(接主) 중의 한 명으로 관군(官軍)에 의해 처형당한 차지구(車致久)의 장남으로, 일찍부터 동학운동에 가담하여 전라북도 순회관(巡廻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증산교를 창교한 강일순(姜一淳: 호는 甑山)을 만난 뒤로는 자신의 이종사촌 누이인 고판례(高判禮)를 강일순의 부인으로 추천할 정도로 착실한 제자가 되었다.
강일순의 사망에 따라 흩어졌던 그의 제자들이 1911년 고판례의 종교 체험을 계기로 재집결하여 선도교(仙道敎: 뒤에 太乙敎라 함)라는 신종교를 세울 때, 차경석은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이 크게 늘어나게 되자, 차경석은 교권을 장악하고 신도들과 고판례와의 접촉을 차단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그를 떠나 별개의 종단을 설립하였다.
차경석은 천지개벽의 문로(門路)가 자기에 의하여 열린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가 될 것이고 조선은 세계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1920년에는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의 조직으로 묶고, 55만 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하기도 하였다.
1921년 차경석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리고 국호를 <시국 時國>, 교명을 <보화 普化:뒤에 보천교라 함.>로 선포하였다.
이 때부터 교단 안팎에서는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떠돌아 갑자등극설(甲子登極說)·기사등극설(己巳登極說)로 구체화되고, 민간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라 부르게 되었다. 1922년에는 ≪보광 普光≫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였는데, 건축자재를 백두산의 원시림에서 가져다 쓰면서 6백만 신도를 호칭할 정도로 교세가 대단하였다.
보천교의 세력이 커지자 일제는 교단에 대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은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내각총리대신에게 친일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시국대동단 時局大同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토를 순회하면서 보천교의 소개와 함께 대동아단결(大東亞團結)을 강조하는 친일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보천교혁신운동이 일어났고, 고위간부들이 신도를 이끌고 별도의 교단을 세우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교세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분파는 신현철(申鉉喆)의 태을교를 비롯하여 동화교(東華敎)·삼성교(三聖敎)·수산교(水山敎)·보화교·선도교·무을교(戊乙敎)·임무교(任務敎)·서상근파(徐相根派)·금산사미륵불교포정소(金山寺彌勒佛敎布政所)·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이었다. 1936년차경석이 죽고 이어 조선총독부가 <유사종교해산령>을 선포함에 따라 교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8·15광복 후 다시 조직화되었지만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어 있다. 신파는 차경석의 아들 용남(龍南)이 주축이 되어 차경석의 교의를 신봉하고 교조로 받드는 반면, 구파는 강일순을 교조로 하고 본부에서 떨어져 나와 같은 마을에 별파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신파와 구파를 합하여 1만여 명의 신도가 있다.
신앙대상은 초기에는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 ·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 칠성성군하감지위(七星聖君下鑑之位)를 써 붙이고 경천(敬天)이 위주였으나 지금은 삼광영(三光影)을 받든다.
삼광영이란 일(日)·월(月)·성(星)을 말하며 이는 모든 조직의 기본이 된다. 기본교리는 인의(仁義)이다. 즉, 인으로 생하고 의로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의를 행하는 것이 인도(人道)의 시종(始終)이 된다고 한다. 또, 경천·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의 4대 강령과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한다. 의례행사는 4절후 치성과 다섯 차례의 정례치성을 지낸다.
경전은 ≪대도지남 大道指南≫ · ≪이사전서 二師全書≫ · ≪교조약사 敎祖略史≫ 등을 신구파가 공동으로 쓰고 있으며, 각기 다른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보천교연혁사』 상·하 속편(보천교 중앙총정원, 1948·1958)
『증산교사』(이정립, 증산교본부, 1977)
『도훈(道訓)』(보천교, 1986)
「일제하의 증산교운동 -보천교를 중심으로한 서설적 연구」(노길명,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4)
「보천교운동연구」(안후상,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보천교 연구의 현황과 과제」(안후상, 『한국종교사연구』6, 한국종교사학회, 1998)
『증산교개설』(홍범초, 창문각, 1982)
『한국신흥종교총감』(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한국민족종교총람』(사단법인 한국민족종교협의회, 1992)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류병덕·양은용,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천교
일제강점기에 창시된 한국의 신종교. 증산교에서 유래한 종교로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이 사망한 후 차경석이 교권을 장악하고 1921년 창시했다. 한 때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으나 1936년 차경석이 사망하자 일제의 유사종교해산령에 따라 해체되었다. 해방 후 교단이 다시 조직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교리는 인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신앙의 대상은 삼광영으로서 일·월·성을 받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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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1880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차경석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 접주(接主)로 관군에게 처형당한 차치구(車致久)의 장남으로, 일찍부터 동학운동에 가담하여 전라북도 순회관(巡廻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증산계 종교의 비조(鼻祖) 증산 강일순을 만난 뒤로는 자신의 이종사촌 누이인 고판례를 강일순의 부인으로 추천할 정도로 착실한 제자가 되었다.[3][4] 강일순의 사망 이후 흩어졌던 그의 제자들이 1911년 고판례의 종교 체험을 계기로 재집결하여 선도교라는 신종교를 세울 때, 차경석은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이 크게 늘어나게 되자, 차경석은 1918년 교권을 장악하고 신도들과 고판례와의 접촉을 차단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그를 떠나 별개의 종단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차경석은 교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1920년에는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 조직으로 묶고, 55만 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하기도 하였다. 1921년 차경석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로 천제(天祭)를 올리고[5] 국호를 <대시국大時國>[6], 교명을 <보화普化>로 선포하여 나라를 세울 것 같은 행보를 이어갔고, 이 때부터 교단 안팎에서는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떠돌아 갑자등극설(甲子登極說)·기사등극설(己巳登極說)로 구체화되고, 민간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라 부르게 되었다.[7]
1922년에는 ≪보광普光≫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였는데, 건축자재를 백두산의 원시림에서 가져다 쓰면서 신도수가 600만[8][9]이라고 할 정도로 교세가 대단하였고, 한반도 최대 종교였다.
차경석은 천지개벽의 문로(門路)가 자기에 의하여 열린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가 될 것이고 자신이 다스리는 조선은 세계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교세가 매우 커지자, 차경석은 전라도 정읍에 보천교 총본산인 '십일전'을 세웠는데, 군산항을 통하여 만주에서 소나무를 들여오기까지 하여 조선시대 경복궁 근정전에 비견될 만큼 크고 아름다운 규모로 세웠다. 또한 보천교에서 쓰던 크고 아름다웠던 종은 한 번 치면 정읍의 보천교 본당에서 수 km 떨어진 익산에까지 잔잔하게 종소리가 울렸다고 전해졌는데 나중에 일제가 무기제조용으로 압수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차경석이 살아있을 1923년에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문제적 종교로 감시받던 신토계 신흥종교 오모토와 접촉이 있었다.[10] 식민지 조선과 일본 본토에서 각각 문제적 종교로 감시받던 양 교단이 서로 접촉하여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일본 정부 보기에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3. 독립운동 지원[편집]
보천교는 상해임시정부 설립자금 5만 원(현재 추산가 10억 원)을 대기도 했고, 보천교가 일제에 문제종교로 찍혀 감시를 받은 것도 독립자금을 전달하려다 발각되어서였다. 보천교의 조직체계는 교주 차경석이 있고 그 아래 각지에 60인의 고문이 있었으며 고문 아래에 6인조-12인조-8인조-15인조 등의 조직을 갖췄는데, 각각 30원-15원-10원-5원을 내어 일부는 제사 비용으로 쓰고 잔금은 전라도 정읍에 있는 본부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보천교의 재정간부 김홍규는 독립자금 당시 10만 원 (현재 추산가 20억 원)을 조성하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투옥되었고,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11]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의 부인(박자혜 여사)은 보천교 간부였고, 독립자금 지원을 위해 만주 정의부 독립군과 보천교 본부를 연결하였다. 이외에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재봉, 김철수에게도 보천교단은 많은 독립자금이 제공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자혜도 보천교 신자였다고 전해진다.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에 의하면, 1924년 초에 독립단체 정의부가 결성된 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을 국내로 파견했을 때 박자혜 여사가 보천교 북(北)방주인 한규숙을 중개했다고 한다.
일제는 증산 계열 교단을 독립운동의 소굴로 보고, 이를 대외적으로는 유사종교[12]라 하여 탄압을 하였고, 내부적으로는 보천교 분열작전에 들어간다. 이에 보천교 고위 간부였던 이상호를 내세워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파문당한다.[13]
하지만 이러한 독립운동 지원이 차경석의 야망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있다. 즉 자신이 동방연맹의 맹주가 된다는 예언을 확실시 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고 독립된 후 보천교를 국교로 하는 새 조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의견이다. 더욱이 1920년대부터 대동아공영론과 유사한 주장을 하고 시국대동단을 결성하고 조선총독부와도 교류하는 등 친일행위도 있었다.
보천교에서 옮겨온 현재의 조계사 대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