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지라 포터 아저씨와 나 둘이서만 일했다. 아직 물 채우지 않은 연못에 다리를 놓을 예정이었다. 제일 먼저 콘크리트로 쌓은 지반 위에 H빔을 세워야 했는데 이 과정에 용접이 필요했다. 내가 한 일은 가접이라고 해서, 세워 둔 H빔의 균형이 흔들리지 않게 아주 잠깐 용접기를 갖다 대는 일이었다.
맨 처음 시도했을 땐 납땜과 전혀 다른 그 손맛에 깜짝 놀랐다. 흔들리지 않도록 4면의 끝과 중앙에 가접을 놓으면 그제야 포터 아저씨가 왔다. 용접봉을 고데기와 똑 닮은 홀더에 물린 다음, 황토빛깔 용접면을 쓴 채 무릎 굽히고, 아래로 내려다보며 빔에다가 봉을 갖다 대는 순간, 용접이 시작되었다. 지이이익. 고장 난 스피커의 잡음 같은 용접 소리가 이어졌다. 빔 하나 다 떼우고, 다음 가접까지 끝내자 아저씨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용접 처음이야?”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용접면 하나를 내밀었다. 머리에 쓰는 형태가 아니라 가운데에 손잡이가 달린 핸드실드였다.
“하는 거 함 봐. 용접 배워두면 어디서든 도움 돼.”
‘용접’이란 단어는 거칠고 힘든 노동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다. 나 역시 달리 생각지 않았다. 눈앞에 태양만큼 눈 따가운 빛이 아른대고 사방으로 벌건 불똥이 튀어대는 위험한 일 정도로 치부했다. 처음으로 용접면을 쓴 순간. 내 짧은 인식이 얼마나 큰 편견 덩어리였는지 깨달았다. 온통 어두운 시야 속, 번뜩이는 불꽃만 남은 고립무원 속에서 치열하며 섬세한 손놀림이 팔자를 그리며 흐느적댄다. 천천히 진군하는 용융풀은 나긋하게 산책 나온 주홍 반딧불이 같다. 목적지에 도달한 불길이 사그라지고, 지나왔던 길엔 위아래 간격이 똑바른 용접 비드만 남아 철판과 철판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어때, 해 볼만 한 것 같애?” 아저씨의 물음에 “근사하네예.”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이 처음으로 용접을 접한 날이었다.
포터 아저씨는 전문 노가다꾼이었고 주말마다 온갖 공구가 실린 트럭을 몰고 날 데리러 왔다. 입담은 무척 좋았는데 단점이라면 이야기에 조미료를 너무 쳤고 디테일도 심하게 어설펐다. 예를 들어,
“한창 쫓기던 마르크스가 마침내 고국 러시아에서……”
“아재요. 마르크스는 유럽 사람.”
“아 그래. 런던에서……”
“아재요. 마르크스는 독일 사람.”
“국적이 중요하냐? 사람하고 생각이 중요하지 짜식아!”
이런 식. 비록 세세한 쪽은 약했지만 큰 틀을 보는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편입 실패와 학벌 콤플렉스에 대해서 횡설수설 떠들었는데, 아저씨는 의외로 진지 표정으로 내 고민을 듣고선.
“야, 현우야. 우리 없으면 누가 다리 만들어 주냐? 우리뿐만 아냐. 청소쟁이, 간호사, 택배, 배달, 노가다, 이런 사람들 하루라도 일 안 하면 난리 나. 저기 서울대 나온 새끼들이 뭐하는 줄 알어? 서류 존나 어렵게 꼬아놓고, 돈으로 돈 따먹기만 하고, 땅덩어리로 장난질이나 치지. 그런 새끼들보다 우리가 훨씬 대단한 거야. 기죽지 마.”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놀라웠다. 중학교 때였던가. 체육 선생님이 야구하다가 교직으로 빠진 사연을 얘기한 적 있었다. 눈치라곤 없던 천현우는 곧바로 손을 들었다. “우리가 아는 선수들. 박찬호 같은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는데, 선생님은 왜 선생님이 됐어요?” 체육쌤은 무례함을 꾸짖는 대신 담담하게 대답했다. 박찬호 선수는 공을 잘 던져서 많이 받는 거예요. 선생님은 공을 잘 못 던져서 별로 못 받았어요. 다시 물었다. “선생님은 얼마 받았는데요?” 그때 체육쌤 입에서 나온 액수를 듣고 너무도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박찬호 선수가 담임 선생님 백 명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까? 그날의 의문은 끝끝내 풀리지 않았다. 그저 나이를 먹어갈수록, 어딜 가나 얼마 안 되는 승자들이, 패자가 응당 가질 몫까지 몽땅 빨아들이는 현실만 알아갈 뿐. 스물다섯의 나는 사회에 투항해버렸다. 명문대는 공부 많이 했으니 유능해서 대단한 일을 하고, 전문대는 공부 안 했으니 무능해서 못난 일만 한다. 그리 생각하면 세상만사가 일목요연하고 단순해졌다. 체념하면 모든 게 편할 텐데, 오히려 ‘우리가 훨씬 대단한 거야.’ 라니!
그때부터 우린 친해졌다. 트럭 아저씨는 토요일 아침에 날 픽업하러 왔다. 차에서부터 일하는 내내 서로 대화를 나눴다. 국밥집에서 소주 한 잔 걸치기도 하고, 회 한 사발 사서 아저씨 집에서 먹기도 했다. 그땐 언제나 집안일 끝마친 형수님이 드라마를 보고 계셨다. 내가 오면 선반에서 화요나 안동 소주 같은 비싼 술을 꺼내주시곤 했다. 소독약 같던 희석식 소주완 달리 달큼한 맛이 아주 인상 깊었다. 한 번은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쯤 불콰한 낯으로 물었다. “형수님. 대체 이 형하고 와 결혼했답니까?”, 형수님은 박장대소하며 서랍에서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었다. 색 바랜 사진엔 장발 미남이 청자켓 차림으로 통기타를 만지고 있었다. 아랫목에 있는 점이 아니었으면 아저씨임을 못 알아볼 뻔했다.
“웬수지 웬수라. 놈팽인 거 모르고 결혼했드만.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애새끼가 되드라니깐.”
형수님은 농담 속에 신세한탄을 섞어 말했다. 포터 아저씨는 원래 경남은행 본점에서 일했다고 했다. 그러나 IMF 여파로 2001년 해가 뜨자마자 정리해고 당해 실업자가 됐다. 간신히 마산 수협으로 재취업에 성공했고, 대학생 때의 인연이 닿아 결혼도 했지만, 아저씨는 원래부터 누구 밑에서 일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자리 좀 잡나 싶으면 회사를 나오길 반복하더니 뜬금없이 마흔 줄에 아파트 대출금 다 갚으면 노가다를 하겠다고 선언했단다. 정해진 날 매일매일 일어나 출근하는 게 너무 싫었다나. 하도 간절하게 빌어서 승낙해줬더니 오히려 지금 더 열심히 일한다고 했다. 마흔 중반 되어서야 체질에 맞는 일을 찾은 셈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역시 전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부는 괴로웠고 일도 손에 맞지 않았다. 편입을 생각했지만 그마저 더 잘 알고 잘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전문대 졸업이란 콤플렉스 때문 아니었던가. 갑자기 든 생각에 문득 남은 회를 쓸어 담던 아저씨에게 물었다.
“용접은 어때예? 뭐 벌이라던가. 일자리라던가……”
“용접? 재밌지. 돈도 되고. 함 해봐. 니 나이 땐 뭘 해도 안 하는 거보다 이득이야.”
용접은 어디서 어떻게 배웠냐고 물으니, 건설 막노동하다가 알게 됐다고 했다. 막상 해보니까 재밌어서 사비로 학원 끊었지만 국비지원 받는 게 나을 거란 팁도 줬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저녁 11시. 안주도 술도 다 떨어진 가운데. 서로 호감과 신뢰가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진짜배기 대화가 오갔다. 나는 세월호 당시의 혼란을 이야기했다. 하필 소집해제일과 겹쳤던 그 참사는 근육통 비슷한 우울감과 소화불량 같은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죽었는데 괴로워하는 내가 정상이냐 물었다. 아저씨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어 선장을 욕하도록 유도하는 언론,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정부의 모습 속에서 대체 어떤 게 진실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아저씨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책을 열 권 가까이 가져왔다. 제목보단 저자 이름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박성호, 유시민, 김어준, 김용민, 이동형…… 뭐하는 양반들인지 몰라서 그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아저씨는 친절하게 쇼핑백에 책을 담아 건네주더니.
“정치를 몰라서 그래. 물론 정치를 몰라도 사는 데 아무 문제없어. 모르면 대통령이랑 국회의원 욕하면 되거든. 근데 그럼 신문이랑 뉴스 볼 때마다 답답하지. 정치를 모르니 나라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잖아. 만사 관심 끄고 살 생각 아니면 정치를 알아야 해. 자, 이것들 다 읽으면 좀 트일 거다. 그리고 현우야. 넌 잘 될 것 같애. 내가 촉이 좀 좋거든.”
순간 냉랭한 공기를 한껏 들이켠 듯 코가 시큰했다. 빚더미에 깔린 후 처음으로 듣는 타인의 격려. 그것은 밑불도 남지 않은 가슴에 던진 화염병이었다. 그래. 늦기 전에 정치랑 용접을 공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