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 경제전쟁, 중화학공업으로 승리의 쐐기를 박다
⊙ 중국, 인도 경제발전 모델의 원형은 한국의 ‘수출제일주의+공업입국’(EOI) 개방 경제
“임자! 100억 달러 수출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해야 하지?”
이날의 짧은 대화는 역사가 됐다. 한국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그해 우리나라 수출 목표는 18억 달러로, 15년 전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일본은 수출액이 20억 달러였던 1957년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했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2010년 8월, 김정일(金正日)이 함경남도 비날론 공장을 시찰한 사진이 북한 매체를 통해 보도됐다. 나는 사진을 보며 “북한이 완전히 망했다”고 확신했다. 비날론은 한국에선 더 이상 찾아보기도 어려운 섬유다. 그 공장을 재가동한다고 떠들썩한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전후(戰後) 기반시설과 자원 환경에서 남한을 월등히 앞섰던 북한 경제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우리나라 경제발전 요인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많이 꼽는다. 나는 고속도로보다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이 국민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경부고속도로는 km당 1억원, 총 429억원의 건설비가 투입됐다. 농어촌 전화사업은 만 15년간 926억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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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 가까운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핵심 키워드는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EOI(Export Oriented Industrializationㆍ수출주도산업화)’다. ‘피라미드형 개발전략’은 CEOI(The Construction of Pyramid type EOI)다. EOI가 “노동집약적 상품의 수출을 장려하는 정책만으로도 수출이란 견인력에 의해 공업을 선두로 경제가 발전한다”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적 관점이라면, CEOI는 “공업기반이 없는 한국에서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구조(피라미드)를 정부 주도하에 새로 구축한다”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적 관점이다. 한국은 경제개발 모델이 다른 나라와 완전히 달랐다. 당시 대부분 선진국은 공업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화학공업화가 이뤄졌고, 수출도 늘어났다. 우리나라는 먼저 수출 목표를 수립해 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다.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1972년 5월 30일, 상공부가 개최한 수출확대회의를 마친 후 수출 상품 전시장을 시찰했다. 마침 자동차 부품이 전시됐는데, 박 대통령은 기계제품 수출에 관심이 컸다. 피스톤 핀(piston pin)의 정밀도에 대한 그의 질문에 한 관계자가 “1/100mm 정도 되는, 아주 정밀한 부품”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M16 총열의 정밀도와 비슷하구먼”이라고 해 함께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내게 수출 100억 달러 달성에 관한 ‘역사적 질문’을 했다. 중화학공업 발진 명령 직후 나는 우리나라가 공업을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정리, 종합해서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중화학공업화와 80년대의 미래상’이란 제목의 보고로, 후진국 경제개발 전략, 공업화 발전의 5단계, 경제개발계획의 계획상 문제점과 대안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날 보고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각하!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것은 ‘남북 간의 경제전’에 돌입한다는 뜻입니다. 이 전쟁에서 패하면 패한 쪽의 체제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중화학 건설의 성공 여부로 남북문제는 결판이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국민은 앞으로 10년간 ‘제2의 한국전쟁’을 치른다는 단단한 각오로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정부나 기업가나 국민이 모두 필승의 신념을 갖고 분투노력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을 개시할 때 선전포고를 하는 식으로, 각하께서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국민에게 다짐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올립니다.” ‘중화학공업화’와 ‘국민과학화’ 박 대통령은 이날 보고에 만족했다. 그는 “기능자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라고 했다. ‘기능자→중화학공업 건설→조국근대화→민족중흥’이란 행정 식이 성립된 셈이다. 그는 또 공단계획을 수립할 때 주거지역에 대한 도시계획까지 포함하라고 했다. 공단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토 전체를 놓고 보라는 의미였다. 기술인력 양성 문제와 국토개발 문제 등 중화학공업 건설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계획에 포함하라는 지시다. 이는 우리나라의 공업구조를 완전히 개편하는 계획이다. 군대식으로 표현하면 ‘작전계획’이 아니라 ‘전략계획’을 수립하란 의미였다. 박 대통령은 이미 결심을 굳혔고, ‘남북 간의 경제전’은 이미 개시됐다. 나는 임무의 중대성과 책임의 막중함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10월 유신)’을 발표했다. 이를 체제개혁에만 한정해 보는 것은 옳지 않다. 10월유신에서 ‘체제개혁’과 ‘혁명과업’은 차량의 두 바퀴와 같은 개념이다. 이제 중화학공업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와 ‘국민과학화’를 선언했다. 그날 회견 내용 중 일부다. “우리나라 공업은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내가 제창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과학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국력이 급속히 신장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 우리는 절대 선진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80년대에 가서 우리가 100억 달러 수출, ‘중화학공업의 육성’ 등등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범국민적인 ‘과학기술의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되겠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은 그 의미가 크다. 목표가 달성되면 우리나라 국력은 북한을 완전히 압도하게 되고, 국민 생활 수준이 북한 주민보다 월등히 윤택해진다. 방위산업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이 북한을 능가해, 감히 6ㆍ25전쟁과 같은 도발을 하지 못하게 억제할 수 있다. 남한의 자유경제체제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입증돼 남북한 간 ‘체제 경쟁’에서 완승하게 됨을 의미한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1973년 1월 31일,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 태완선(太完善) 부총리, 남덕우(南悳祐) 재무장관 등 주요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업구조 개편론’에 대해 최종 브리핑을 했다. 중화학공업 계획, 방위산업과의 관계 등 핵심 사안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이날의 클라이맥스는 브리핑이 끝난 후 박 대통령의 짧은 네 문장의 말이었다. 엄숙하고 조용한 말투였는데, 한마디 하고 말을 끊고, 한참 후 다음 말을 하고 또 말을 끊었다. 이때 박 대통령의 표정은 중대 결심을 앞둔 군사령관과 같았다. 입은 굳게 다물었고, 시선은 줄곧 정면을 향했다. 부동의 자세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최종 결단에 앞서, 또 한 번의 정리를 하기 위해 자문자답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는 계속 먼 곳만 바라봤다. 질문인 동시에 대답이었다. 이 말의 뜻은 “나(박 대통령)는 6ㆍ25와 같은 전쟁의 재발을 막으면서 평화통일을 하자는 것이지, 동족상잔의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적 아래 중화학공업을 추진코자 하는 것이다”란 의미였다. 독백은 천천히 이어졌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이 기꺼이 따라줬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줘서야 되나.”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대한 그의 결론이 나왔다. 마지막 한마디 말의 뜻은 “중화학공업은 꼭 해야만 한다. 그 결과는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 최후의 결단은 국가원수인 내가 혼자서 내려야 한다”였을 것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2월 12일, 박 대통령은 ‘전 산업의 수출화’라는 휘호를 직접 써서 중화학공업기획단에 하사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목적은 수출에 있다는 명령이었다. 중화학공업기획단은 이 휘호를 액자로 만들어 단장실 정면에 걸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이룩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조국의 국운(國運)을 건 민족적, 역사적 과업이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 국가가 된다는 것은 “우리도 산업혁명을 이룩했다”는 의미다. 1970년대 세계정세는 우리에게 크게 유리하지 않았다.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됐고, 석유파동에서 시작된 에너지 위기로 물가가 인상되는 등 경제불안이 이어졌다. 당초의 3차 5개년계획은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을 우리나라는 슬기롭게 극복해 냈다. 진정한 기술강국 1973년 원유 값 폭등이 수입상품 가격 인상을 불렀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졌다. 1960년대 ‘달러 고갈’이 몰고 온 위기 후 두 번째 경제위기였다.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통해 국민 불안 심리를 안정시키고 중동 진출로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우리 역사엔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스스로 목숨 걸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의병(義兵)이라 부른다. 삼국통일 때의 화랑, 임진왜란 때의 어린 의병, 6ㆍ25전쟁 때의 학도병은 모두 10대 후반의 청소년이었다. 1973년 석유위기로 나라 경제가 파국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린 용사들은 분연히 나섰다. 중동에 파견된 17~18세 청소년 기능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수만 리 이국 땅의 경제전쟁의 최전선에서 나라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했다. 1974년, 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동안 한국은 GNP 8.1% 성장, 수출 38.3% 성장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기능사와 기술자를 양성해 중화학공업과 엔지니어링 산업을 육성했다. 공업구조를 선진화해 해외에 플랜트까지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수출 100억 달러와 중화학공업 비율 50% 이상을 이룬 한국은 완전한 선진공업국으로 성장했다. 기적 같은 업적을 국민이 이뤄낸 것이다. 방위산업의 육성은 자주국방 실현 의지를 한 발자국 앞당겼다. 세계는 ‘불굴의 도전’으로 이룬 ‘한강의 기적’을 주목했다. 20세기 후반 경이적으로 발전한 4마리의 용(龍ㆍ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중 선두주자로 한국을 꼽았다. 1977년 미국 <뉴스위크>는 커버스토리로 한국을 다뤘다. ‘한국인이 몰려온다(The Koreans are coming)’란 제목의 이 특집기사는 한국인을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공업구조와 국민 생활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본인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는 세계 유일한 국민”이라고 소개했다. 33년 후, <뉴스위크>는 또 하나의 특집기사를 내놨다. 미소(美蘇) 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 지형도를 인종ㆍ종교ㆍ문화적 요인을 기초로 재조명한 기사다. 미국 채프먼 대학의 조엘 카트킨(Kotkin) 석좌 연구원이 분류한 북미동맹, 중남미 자유주의국, 이란 권역, 중화 왕국 등 복잡한 구도에서 한국은 일본, 프랑스, 브라질, 스위스 등과 함께 ‘자립국가(stand-alones)’로 구분됐다. 중요한 대목은 그들이 한국을 ‘진정한 기술강국(true technological power)’으로 규정한 부분이다. 40년 전 아프리카 가나보다 경제 수준이 낮았던 나라가 일본과 대등한 힘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그들은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여전히 위기는 존재한다. 인접한 대국(大國) 중국의 경제는 무섭게 성장하고, 일본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을 통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한다.
2061년의 대한민국 한국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새로운 국가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국태를 위해 자주국방과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을 확립하고 국민생활 안정 및 향상이란 민안을 이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핵심정책으론 우선 전 국민의 정신무장이 필수다. “하면 된다” 정신과 근면ㆍ자조ㆍ협동ㆍ저축 정신이 부활해야 한다. 그리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안보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1970년 닉슨독트린에 의한 주한미군 7사단 철수 당시 ‘한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란 협의가 있었다. 한국 측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25억~3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결국 15억 달러로 낙착됐다. 당시 경제 규모로도 우리는 ‘자위(自衛)’에 경주했다. 지금은 훨씬 큰 경제규모와 국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안보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하면 국민 총생산은 1조8000억 달러가 된다. 국방비로 5%를 쓴다면 900억 달러를 지출할 수 있게 된다. 한 해 1000억 달러 정도의 시장이 형성되면 최첨단 군 장비의 연구, 개발, 생산이 가능해진다. 국가안보 확립과 국부창출을 통해 후손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국토개발과 경제개발을 이뤄야 한다. 전 산업의 수출화와 전 국민의 과학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선진 최첨단 기술공업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위한 인력 양성을 지속해야 한다. 과학기술 발전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조건이다. 50년 전 경제개발계획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근로자들의 희생으로 시작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땀은 세계사(史)에 유례없는 초고속성장을 이뤄냈다. 경제사령관 박정희는 조국을 경제강국으로 만들었다. 경제개발계획 100주년이 되는 2061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 우리의 선택과 노력이 후손에게 잠시 빌린 조국의 흥망(興亡)을 결정한다.⊙[정리 :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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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게 사실은... 원문보기 글쓴이: 證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