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년(一千年,1000년) 백제왕조(百濟王朝)를 회상(回想)하다 [1편]
2022년 11월 06일
○ 『일천년(一千年) 백제(百濟) 왕조(王朝)』 라고 한다면 독자(讀者)분들께서는 누구나 “뭔 소리?”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천년(一千年), 그 이상(以上)의 역사(歷史)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백제(百濟) 역사(歷史)’라고 할 수 있을 같다.
왜냐하면 ‘온조(溫祚)가 백제(百濟)를 세우기 그 이전(以前)부터 마한(馬韓)의 54개 나라 가운데 한 나라’였기 때문이며, 삼한(三韓)이 언제부터 존재(存在)했는가? 하는 것에 대해 『한(馯)이 한(韓)』 인데, 『주(周) 이전(以前)’에 이미 존재(存在)해 있었다.』 고 했기 때문이다.
➨ 우리 학계(學界)의 고대사(古代史) 해설(解說)은, 추측(推測)과 가정(假定), 주관적(主觀的)인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유물학적(遺物學的)으로도 ‘단 1점’도 발굴(發掘), 발견(發見)된 적이 없다. 따라서 특정(特定)한 흔적(痕迹)이나 증거(證據), 고증(考證)이 전혀 없는, ‘이야기’ 수준(水準)으로, 이게 오늘의 우리 현실(現實)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한 삼한(三韓)은, 기원전(紀元前:BC) 200 년 경(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최소한(最小限)으로 축소(縮小)시킨다고 해도 “백제(百濟)는, 1,000년 역사(歷史)를 가진 왕조(王朝)다.”
그러나 실제(實際) 역사서(歷史書)에서는 : “백제(百濟)”에 대한 연구(硏究)는 미궁(迷宮)속에 빠져 있다. 오늘의 우리가 생각하기엔 “비운(悲運)의 왕조(王朝)”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것 어디까지나 오늘의 우리들 생각일 뿐일 것 같다. 예(例)를 들면 : 海東繹史 3 世紀 3 三韓 편을 보면 :
➊ 《해동(海東)의 여러 이(夷)에는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馯)ㆍ맥(貊)”의 족속이 있는데,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이들 모두와 길을 통하였다. [상서전]》
《한서(漢書)에는 고구려(高駒麗)ㆍ부여(扶餘)ㆍ한(韓)은 있으나 여기에서 말한 이 ‘한(馯)’은 없다. 이 ‘한(馯)’은 바로 저 ‘한(韓)’과 같은 것으로, 음은 같으면서 글자 모양만 다른 것이다. [상서소(尙書疏)] 【정씨집운(丁氏集韻)에, “한(馯)은 하(河)와 간(干)의 반절(反切)로 음은 한(寒)이다. 동이(東夷) 별종의 이름이다.”하였다.】》
➋ 모시(毛詩)에 이르기를 : 《溥彼韓城, 燕師所完 : 커다란 저 한성은,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王錫韓侯, 其追其貊 : 왕께서 한나라 제후에게,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 奄受北國, 因以其伯 :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아서, 그곳의 제후가 되시었도다.》하였다.
➨【위에 기록(記錄)된 “한성(韓城)”은 지금도 섬서성(陝西省) 요충지(要衝地)에 자리 잡고 있다. ‘모시(毛詩)’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것을 서한(西漢) 때 모공(毛公)이 훈고(訓詁)를 해 경전(經典)의 뜻을 해설하였기 때문에 ‘모시(毛詩)’라고 하며, 춘추시대(春秋時代)는, 기원전(紀元前: BC) 770~403년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위의 글 “➊+➋”에서 보는 것처럼 『주무왕(周武王)이 상(商) 【BC 1,765∼BC 1,122=644年間】 을 이기고 주(周) 【BC 1,121∼BC 249=873年間】나라를 건국(建國)하니, 『해동(海東)의 여러 이(夷)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馯)ㆍ맥(貊)”의 족속(族屬)들과 통(通)하였다.』 고 하였다. 이는 “주무왕(周武王) 이전(以前) 상(商) 나라 때도 존재(存在)해 있었으므로 주무왕(周武王) 때에 통하게 된 것이다.” “존재(存在)가 없었다면 통(通)할래야 통(通)할 수 없는 것은, 세상(世上)의 이치(理致)다.”
『‘한(馯)이 곧 한(韓)’이다.』 바로 ‘삼한(三韓)’의 선대(先代)임을 알 수 있다. 삼한(三韓)의 기원(起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지만, 『백제(百濟) 역시(亦是) 옛 “한(韓)”에 속해 있었으며, 삼한(三韓)으로 나누어져 “마한(馬韓)”의 54개 나라 가운데 한 나라로 ‘마한(馬韓)’의 진왕(辰王) 지배(支配)를 받았다』고 보면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될 것이다.
여기서 특히 “맥(貊)”은 ‘북맥(北貊)’으로 『한고조(漢高祖)가 초왕(楚王) 항우(項羽)와의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危機)일 때, 용감하고 날랜 기병(梟騎)을 보내어 한고조(漢高祖)를 도왔다.』고 하였다. 즉(卽) “해동(海東)이란 반도(半島)를 지칭(指稱)하는 말이 아니다”라는 것을 고증(考證)해 주는 기록(記錄)이다.
이를 토대(土臺)로 보면 : 『‘고구려(高駒驪)나 백제(百濟)’는, “기원전(紀元前) 1,121년” 그 이전(以前)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백제(百濟: 韓)과 구려(駒驪), 부여(扶餘), 맥(貊)’등은 1,800년 그 이상(以上)의 역사(歷史)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➊+➋”에서 보듯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는,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반도(半島)”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세상(世上)의 이치(理致)다.
【2022년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 99% 정도(程度)는, ‘백제(百濟)는 한수이남(漢水以南), 충청(忠淸), 전라(全羅) 땅에 있었다’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음모(陰謀)에 말려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잘못된 주장(主張)이 결코 아니다. 이건 현실(現實)의 팩트[Fact]다.】
(1) ‘백제(百濟)’의 고도(古都) ‘부여(扶餘)’
동사강목(東史綱目)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에 따르면 :『백제(百濟)가 융성(隆盛)할 시에, 도성(都城)의 민호(民戶)가 ‘15만 2천 3백호’였다.』고 기록(記錄)하였다.
“가구(家口) 당 5명-6명의 가족(家族)이 있다고 하더라도 ‘75만∼90만 명(名)’을 훌쩍 넘기는 백성(百姓)들이 도성(都城)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도성(都城)이 ‘부여(扶餘)’가 되었든, ‘한성(漢城)’이 되었든, ‘공주(公州)’가 되었든 말이다. 그러나 백제(百濟)는 부여(扶餘)를 도성(都城)으로 할 때 가장 융성(隆盛)했다고 보아지니,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말하는 도성(都城)은 “부여(扶餘)”를 말하는 것일게다.
서력(西曆) 660년 소정방(蘇定方)에 의해 백제(百濟)가 망(亡) 후하고 난 뒤에, 많은 백제(百濟) 백성(百姓)들은, ‘말갈(靺鞨)과 돌궐(突厥)’등지로 투항(投降)하고, 이주(移住)하고, 망명(亡命)했다고 전해지며, 백제(百濟) 영토(領土)에는, “5부(部), 37군(群), 200개 성(城), 76만(萬) 호(戶)”가 있었다고 하였다.
➨ 及菴先生【閔思平, 1295년(고려 충렬왕 21)-1359년(공민왕 8)】詩集 卷之三. 詩. : 扶餘懷古 :《當 時 十 萬 戶 懽 康 : 당시에 십만호(十萬戶)는, 덤덤하게 맞아들였다.》고 하였다. 이때는 660년 백제(百濟) 망시(亡時)를 말하는 것이다.
백제(百濟)가 당군(唐軍)과 신라(新羅)에 의해 무너져 내릴 때, 부여(夫餘) 도성(都城)안에는 “십만 호(十萬 戶)있었다.”는 것이니, 「망(亡)시에 최소(最小)한 50만-60만의 백성(百姓)들이 부여(夫餘)의 도성(都城)안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도(半島) “부여(扶餘)”의 지세(地勢)를 살펴보면, 좁아도 너무 좁아, 1백만(百萬)의 많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이 없다. 이건 약(約) 1362년이 지난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옛 ‘백제(百濟) 왕조(王朝)’는 어디에서 일천년(一千年)을 이어왔다』는 것일까?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땅은, 백제(百濟)의 고토(故土) 즉(卽) 고향(故鄕)이다.
(2) 三國志 魏書 東夷 : 한(韓) [馬韓] 에 따르면 :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中略. :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南)쪽에 있다. 동(東)쪽과 서(西)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하며, 남(南)쪽은 왜(倭)와 접해 있으며, 사방 4천리(千里)이다.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辰韓)은 옛날 진국(辰國)이다. 마한(馬韓)은 서(西)쪽에 있다. 중략(中略).》
《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凡五十餘國.中略. :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소석색국(小石索國)·대석색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신분고국(臣濆沽國)·백제국(伯濟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리국(高離國)·노람국(怒藍國)·월지국(月支國)·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소위건국(素謂乾國)·고원국(古爰國)·막로국(莫盧國)·비리국(卑離國)·점리비국(占離卑國)·신흔국(臣釁國)·지침국(支侵國)·구로국(狗盧國)·비미국(卑彌國)·감해비리국(感奚卑離國)·고포국(古蒲國)·치리국국(致利鞠國)·염로국(冉路國)·아림국(兒林國)·사로국(駟盧國)·내비리국(內卑離國)·감해국(感奚國)·만로국(萬盧國)·벽비리국(闢卑離國)·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일리국(一離國)·불미국(不彌國)·지반국(支半國)·구소국(狗素國)·첩로국(捷盧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신소도국(新蘇塗國)·막로국(莫盧國)·고랍국(古臘國)·임소반국(臨素半國)·신운신국(臣雲新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일난국(一難國)·구해국(狗奚國)·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원지국(爰地國)·건마국(乾馬國)·초리국(楚離國)등 무릇(凡) 50여 나라이다. 辰 王 治 月 支 國. : 진왕(辰王)【마한(馬韓) 왕(王)】은 월지국(月支國)【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월지국(月支國)이 있었다.】에서 다스렸다.》고 하였다.
백제(百濟)는 본래(本來), 삼한(三韓)중의 마한(馬韓)속에 있었던 54개 나라 중의 한 나라였다는 사실(事實)로 미뤄보면 : 그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주(周)나라 이전(以前)’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➊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海)로 한계(限界)하고, 남(南)쪽은 “왜(倭)”와 접(接)하고 있다〉고 하였다. 위의 기록(記錄)을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대로 하면 : “반도(半島) 땅의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지역(地域)은, 왜노(倭奴)들의 땅이었고, 그 백성(百姓)들은 왜(倭)였다”는 말이 된다.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민들께서는, 이걸 인정(認定)할 수 있는가?” 이걸 인정(認定)하지 못한다면 “백제(百濟)는 그 땅에 없었다.”것이 된다.
대한민국(大韓民國) 5,500만 국민(國民)들! 이제 믿을 수 있겠는가! 분명하게 말하건대, 위서(魏書)에 따르면 :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南)쪽에 있다. 동(東)쪽과 서(西)쪽으로 바다(海)를 한계로 하며, 남(南)쪽은 왜(倭)와 접(接)해 있으며, 사방(四方) 4천리(千里)이다.〉라고 하였다.
➨ “오늘의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지역(地域)은, 왜(倭)의 땅이었다.”
➨ “오늘의 반도(半島) 한강(漢江) 이남(以南) 땅이 사방(四方) 4천리(千里) 땅이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한반도(韓半島)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수천(數千)년 크게 변함이 없다는 것이 과학(科學)계의 설명(說明)이요, 자연환경(自然環境) 또한 사계절(四季節)로 큰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사방(四方) 4천리(千里)에 한(韓)이 있고, 그 남(南)쪽으로는 “왜(倭)와 접(接)해 있다”라고 하였으니, “왜(倭)를 포함(包含)하는 땅은, 5천리(千里)인지 6천리(千里)인지 모른다는 뜻과 같다.〉
오직 ‘한(韓)’의 땅이 사방 4천리(千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세(地勢)를 보면 : ‘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님은, 확실(確實)하게, 분명(分明)하게 증명(證明) 해 주고 있다.
➋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에서 다스렸다〉고 하였는데, “월지국(月支國)”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한 복판에 있었던 옛 나라’다. 이곳을 도성(都城)으로 하여 54개 나라들을 통치(統治)했다는 것이다.
확실(確實)하게 설명(說明)해 놓기를 본래(本來)는 “월지국(月支國)”이었는데, 월지국(月支國)은 서방(西方)에 있는 아라 이름이라서 “목지국(目支國)”으로 바꿔버렸다고 하였다. 이건 발상(發想)의 전환(轉換)이 필요한 문구(文句)다. 즉(卽) 당시의 ‘마한(馬韓)’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서토(西土)로부터 동방(東方)까지에 걸쳐 54개 나라가 있었다.” 는 뜻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사실(史實)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가(史家)들은, 사가(史家)의 자격(資格)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과 같다.
(3) 후한서(後漢書)에서 이르기를 :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한(韓)은 3종(種)이 있다. 첫째는 마한(馬韓)이요, 둘째는 진한(辰韓)이요,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馬韓)은 서(西)쪽에 있어, 54개국이 있으며 북(北)으로 낙랑(樂浪)에 접해있고, 남(南)으로 왜(倭)와 접한다.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 : 진한(辰韓)은 동(東)쪽에 있어 12개국이며, 북(北)으로 예맥(濊貊)에 접한다. 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의 남(南)쪽에 있으며 역시 12개 나라로 남(南)쪽은 또한 왜(倭)에 접해 있다. 凡七十八國,伯濟是其一國焉. : 무릇 78개 나라로 백제(百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 땅은 합하여 사방 4천 여리이고 동(東)쪽과 서(西)쪽을 바다로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馬韓)은 가장 커, 함께 그 무리에서 진왕(辰王)을 세워,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고, 오래도록 삼한 땅의 왕이 되었다. 그 여러 나라의 왕(王)은 우선 모두 마한(馬韓)종류의 사람이었다.》
➨ 【校勘記 : 2818頁13行: 都目支國魏志作治月支國. 校補謂魏志及通志「目」均 作「月」,附載五十餘國亦作「月支國」,則此作「目支」誤也. : 교감기(校勘記) : ‘都目支國’은 위지(魏志)에서는 ‘월지국(月支國)’에서 다스렸다하였다. 교보(校補) : 위지(魏志)와 통지(通志)에서는 “목(目)”이 “월(月)”이고, 부재(附載) 50여국도 역시 “월지국(月支國)”이라고 하여 따랐다. 이것은 목지(目支)의 오(誤)다. 今按:月支乃西域國名,魏志及通志之作「月支」,後人習見「月支」之名而臆改與?當考. : 살펴보면 : 월지(月支)는 서역(西域) 나라이름이다. 위지(魏志)와 통지(通志)에서 “월지(月支)”라고 하니, 후인(後人)들이 “월지(月支)”라는 이름을 보고 배워 고친 것이 아닐까? 마땅히 생각해봐야 한다. 】 하였다.
➨ “월지국(月支國)”은, 서방(西方)【中央亞世亞】땅에 있는 옛 나라이름(古國名)이다.
“목지국(目支國)”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에 의해 만들어진 반도조선(半島朝鮮) 땅, 충청도(忠淸道)에 있었던 옛 소국(小國)이었다고 하면서 “삼한(三韓)이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려 만들어 놓은 ‘조작품(造作品)’이다.
【‘한자(漢字)’외에 달리 표현(表現)할 수 있는 글자가 없었던 옛 성현(聖賢)들이 『“月”과 “目”』도 구분하지 못했을까? 글자 한 자(字)를 놓고 목숨까지 내놓던 성현(聖賢)들을 생각하면 우리 후손(後孫)들이 그들을 모욕(侮辱)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 당시(當時)에 “수만리(數萬里) 서방(西方) 땅에 있었던 월지국(月支國)”을 반대방향(反對方向)인 극동(極東)의 “반도(半島) 땅의 목지국(目支國)”과 혼동(混同)할 이유(理由)나 연유(緣由), 또는 명분(名分)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유(緣由)로 인하여 ‘월지국(月支國)이 목지국(目支國)’ 으로 왜곡(歪曲), 조작(造作)되는 것으로,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도성(都城)을 “월지국(月支國)”에 두고,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부터 동방(東方)까지에 걸쳐 있었던 54개국을 속국(屬國)으로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 이렇게 ‘서방(西方)과 동방(東方)’에 걸쳐 있었던 삼한(三韓)이기에, ‘왕건(王建)’에 의해 삼한통일(三韓統一)이 이루어지자, 천하통일(天下統一)이니, 통일환영(統一環瀛)이니 하는 역사기록(歷史記錄)이 탄생(誕生)할 수 있었으며, ‘천하태평(天下太平=天下泰平)’을 노래할 수 있었으며, 고려(高麗)를 지칭(指稱)하여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고 했던 것이다.
근세(近世)의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 이러한 것들을 “오(誤)” 또는 “오류(誤謬)”라는 단어(單語)를 차용(借用)하여 “왜곡(歪曲)과 조작(造作)된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만들어 놓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에게 강제(强制) 주입(注入)을 통해 심어 놓은 것이다. 이게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한국사(韓國史) 이야기다.”
(4) 북사(北史) 백제(百濟) 편을 보면 :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中略. : 동명(東明) 이후에 구태(仇台)가 있어, 어질고 믿음이 두터워, 처음으로 대방(帶方)고지(故地)에서 나라를 세웠다. 한(漢)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의 여식(女息)을 얻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 : 그 도성(都城)은 거발성(居拔城)이라고 하는데, 또 고마성(固麻城)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 5방(方)이 있는대 : 중방(中房)은 고사성(古沙城)이요, 동방(東方)은 득안성(得安城), 남방(南方)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西方)은 도선성(刀先城), 북방(北方)은 웅진성(熊津城)이다.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亦有中國人.土田濕,氣候溫暖,人皆山居. : 그 사람들은 신라(新羅), 고려(高麗), 왜(倭)등 또한 중국인들이 섞여 있었다. 땅이 습(濕)하고, 기후가 온난(溫暖)하여. 사람들이 모두 산(山)에서 산다. 國中大姓有八族: 沙氏,燕氏,協氏,解氏,真氏,國氏,木氏,苗氏. : 나라안에는 큰 성씨가 8족이 있다 :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묘씨(苗氏)이다. 其王每以四仲月祭天及五帝之神.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皆有城邑. : 그 나라의 왕(王)은 매 4중월에 하늘(天)과 오제지신(五帝之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나라의 서남(西南)에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이 15개소가 있는데, 모두 성과 마을이 있다. 自晉,宋,齊,梁據江左【校勘記[31]:自晉宋齊梁據江左,諸本左,下衍右字,據周書刪.】亦遣使稱藩,兼受拜封.亦與魏不絕. :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이 강좌를 점거하고 있을 때, 또한 사신을 보내 칭번(稱藩)하고, 봉(封)함을 받았다. 또 위(魏)와도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➊《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 : 그 도성(都城)은 거발성(居拔城)이라고 하는데, 또 고마성(固麻城)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 5방(方)이 있는대 : 중방(中房)은 고사성(古沙城)이요, 동방(東方)은 득안성(得安城), 남방(南方)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西方)은 도선성(刀先城), 북방(北方)은 웅진성(熊津城)이다.》라고 하였는데,
중방(中方)인 고사성(古沙城)을 중심으로 사방(四方)으로 큰 성(城)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 모두는 어디에 있었을까? 반도(半島) 땅 어디에서 그 흔적(痕迹)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➋ 《國中大姓有八族: 沙氏,燕氏,協氏,解氏,真氏,國氏,木氏,苗氏. : 나라안에는 큰 성씨가 8족이 있다 :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묘씨(苗氏)이다.》라고 하였는데,
한반도(韓半島) “한강(漢江) 이남(以南)으로부터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국민(國民)들 중에서 위의 8개 성씨(姓氏)를 가진 분은 몇이나 될까?” 가당치도 않은 말로, 『반도(半島) 성씨(姓氏)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륙(大陸)의 형편(形便)은 이와는 전혀 달라, 지금(只今)도 위와 똑같은 성씨(姓氏)들이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사는 곳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우리 국민들이나 사학계(史學界)는 반성(反省)해야 되지 않을까?
➌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亦有中國人.土田濕,氣候溫暖,人皆山居. : 그 사람들은 신라(新羅), 고려(高麗), 왜(倭)등 또한 중국인(中國人)들이 섞여 있었다. 땅이 습하고, 기후가 온난하여. 사람들이 모두 산에서 산다.》고 하였는데,
도대체 왜, 백제(百濟)는 다민족(多民族)이 살아가는 나라였을까? 사서(史書)에 따르면 : 바로 ‘한국(韓國), 진국(秦國)들의 유민(遺民)’들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한반도(韓半島) “한강(漢江) 이남(以南)으로부터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백성들이 모두 산에서 산다.”고 한다면 『지나가는 “0새끼, 0새끼”도 기막히다고 코웃음 치며, “쪽팔려 할 것은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지 않는 무식(無識)한 오리발은 인간(人間) 이하(以下)의 취급을 받아도 싸다.』 또한 반도(半島) 땅은 사계절(四季節)이 아주 확실(確實)하게 구분(區分)되는 땅으로, 사시사철 산(山)에서 살 수 없는 자연환경(自然環境)을 가진 땅이다.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확실(確實)하게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➍ 《其王每以四仲月祭天及五帝之神.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皆有城邑. : 그 나라의 왕(王)은 매 4중월에 하늘(天)과 오제지신(五帝之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나라의 서남(西南)에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이 15개소가 있는데, 모두 성과 마을이 있다.》고 하였으니,
백제(百濟)는 ‘오제(五帝)’의 후예(後裔)들이라는 이야기다. 【오제(五帝) :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또는 황제(黃帝), 소호(少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을 말한다.】또 서남(西南)쪽 바다 가운데 15개의 섬(島)이 있고, 이곳에는 성읍(城邑)이 있어 백성(百姓)들이 살며, 이들은 모두 백제(百濟)에 속(屬)했다는 이야기다. 이곳이 어딘가?
위의 글 ‘➊+➋+➌+➍’의 조건(條件)에서, ‘지형지세(地形地勢), 자연환경(自然環境)’등의 요인(要因)으로 보면 : 결코 “반도(半島) 땅일 수 없다”는 것이며, 이러한 지세(地勢)는 “대륙(大陸)의 남(南)쪽 땅에서나 가능(可能)한 것이다.” 『바로 강좌(江左)의 땅에서 말이다.』
➎ 『自 晉, 宋, 齊, 梁 據 江 左 : 진(晉), 송(宋), 제(齊), 양(梁)나라가 강좌(江左) 즉(卽) 장강(長江)의 동(東)쪽을 점거하고 있을 때』라고 하였는데, 교감기(校勘記)에 의하면 “좌(左)”가 “우(右)”라고 하였다. 즉(卽) “진(晉), 송(宋), 제(齊), 양(梁)”등의 옛 나라들은 강우(江右) 즉 장강(長江)의 서(西)쪽 땅에 있었다는 뜻이다. 【강우(江右)는 : ‘귀주성(貴州省)·사천성(四川省)·호남(湖南)일부(一部)·호북(湖北)일부(一部)’ 등을 말한다.】
본래(本來),『교감기(校勘記)에 의하면 : “自 晉, 宋, 齊, 梁 據 江 右 : 진(晉), 송(宋), 제(齊), 양(梁)나라가 강우(江右) 즉(卽) ‘강(長江)의 서(西)’쪽을 점거하고 있을 때』라고 하여, 『강좌(江左)【강(江)의 동(東)쪽 지방】에는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뜻이다. 【강좌(江左)는 : 호남(湖南), 호북(湖北), 강서(江西), 안휘(安徽), 강소(江蘇), 절강(浙江), 복건(福建) 일부(一部)까지를 어우르는 광활(廣闊)한 땅으로 이곳에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뜻이다.】
본래(本來), “강우(江右)”인데, “강좌(江左)”로 만들어버렸다는 뜻이다. 즉 「주서(周書)에서 “우(右)”자(字)를 삭제(削除) 없애버리고, “좌(左)”자(字)로 만들어버렸다」는 거다.
➨ 이렇게 『백제(百濟)가 “강좌(江左)”에 걸터앉아 있었다.』고 할 때, 〈“북위(北魏)=북노(北虜)”가 수차(數次)에 걸쳐 ‘수십만(數十萬) 기병(奇兵)’을 보내어 백제(百濟) 영내(領內)로 쳐들어갔으나, 백제(百濟) 왕(王)이 사전(事前)에 알아차리고, 병사(兵士)들을 매복(埋伏)시켜 급습(急襲)하는 바람에 대패(大敗)하였다〉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을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5) 남제서(南齊書) 백제(百濟)편에서 이르기를 :
《牟大又表曰 : 行建威將軍 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 假 行龍驤將軍 帶方太守, 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 今假行廣武將軍 清河太守, 假沙法名行征虜將軍 邁羅王, 贊首流為行安國將軍 辟中王, 解禮昆為行武威將軍 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又拔臺舫 為行廣威將軍 面中侯, 行龍驤將軍 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 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中略.》
➊ 《광양테수(廣陽太守)·조선태수(朝鮮太守)·대방태수(帶方太守)·광릉태수(廣陵太守)·청하태수(清河太守)·낙랑태수(樂浪太守)·성양태수(城陽太守)·매라왕(邁羅王)·피중왕(辟中王)·불중후(弗中侯)·면중후(面中侯)》등의 태수(太守)와 제후왕(諸侯王)등은,
반도(半島) ‘충청(忠淸), 전라(全羅)’ 땅 어디에 있었을까? ‘남해(南海)와 서해(西海)’의 용궁(龍宮)속에 숨어 있었다는 것일까?
이건 누가 보더라도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에서 있었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한 것이다. 이걸 “반도(半島) 한강(漢江)이남(以南) 땅에 만들어 놓으니, 뒤죽박죽이 되어 뭐가 뭔지 모르는 이야기책이 되어버린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한민족(韓民族)의 “얼과 혼”을 빼앗는 부역매국(附逆賣國) 사관(史觀)이다.
➋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眾襲擊虜軍,大破之. : 이때에, 위노(魏虜)가 또(다시) 수십만(數十萬) 기병(騎兵)을 발(發)하여 백제(百濟)를 쳐, 그 지경으로 들어갔으나, 백제왕 모대(牟大)가 보낸 사법명(沙法名),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등이 무리들을 인솔하고 습격(襲擊)하여 노군(虜軍)이 크게 패하였다(大敗).》고 하였다.
『發 騎 數 十 萬 : 수십만(數十萬) 기마(騎馬)를 파견했다(보냈다)』는 것이다. 이건 인류(人類) 역사상(歷史上)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전쟁사(戰爭史)라고 할 수 있다. 이때가 서력(西曆) ‘489’년(年)이다.
일만(一萬)이니 오만(五萬), 혹은 십만(十萬) 기병(騎兵)까지는 그래도 이해(理解)할 수 있는 숫자(數字)다. 그러나 수십만(數十萬)이면 최소(最小)한 20만(萬)∼30만(萬) 이상(以上)의 기병(騎兵)을 말하는 것으로, 사실(事實)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規模)인 것이다.
〈魏 虜 又 發 騎 數 十 萬 攻 百 濟〉에서 “又” 자(字)를 보면 : ‘또, 다시’의 뜻이므로, 몇 차례에 걸쳐 기마(騎馬)를 보내어 백제(百濟)를 쳤다는 것이다. 몇 차례에 걸쳐 기병(騎兵)을 보내 쳤으나 모두 실패(失敗)했다는 것으로 추측(推測)할 수 있는 것은, 백제(百濟)가 망(亡)하지 않고 ‘7세기(世紀)’까지 이어왔다는 것으로 증명(證明)이 된다.
➨ 이러한 것은,〈“북위(北魏)=북노(北虜)”가 다시 ‘수십만(數十萬) 기병(奇兵)’을 보내어 백제(百濟) 영내(領內)로 쳐들어갔으나, 백제(百濟) 왕(王)이 사전(事前)에 알아차리고, 병사(兵士)들을 매복(埋伏)시켜 급습(急襲)하는 바람에 대패(大敗)하였다〉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을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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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百濟)’와 관련(關聯)된 기록(記錄)이 많은 것은, “북사(北史)·남제서(南齊書)·송서(宋書)·남사(南史)·양서(梁書)”등인데, 이때가 ‘남북조(南北朝)’라고 칭할 때인데, “북사(北史)”를 제외(除外)하고 나머지 국가(國家)들은 남조(南朝)하고 칭했던, ‘장강(長江) 유역(流域)’의 여러 왕조(王朝)들이다.
➊ 백제(百濟) 나라 땅에는 22개의 담로(檐魯)가 있어, 모두에 자제(子弟)나 종족(種族 : 王族)들을 보내 분거(分據)토록 하였다. 22 ‘담로(檐魯)=담로(擔魯)’란 제후국(諸侯國)을 말하는 것이다.
➋ 또 <남제서(南齊書)·송서(宋書)>에 기록(記錄)된 백제(百濟)의 제후(諸侯)들을 보면 :
〈面中王…都漢王…阿錯王…邁盧王…邁羅王…右賢王…左賢王〉
〈八中侯…弗中侯…面中侯…弗斯侯〉
〈廣陽太守…朝鮮太守…帶方太守…廣陵太守…清河太守…樂浪太守…城陽太守…西河太守〉등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는 백제(百濟)란 중국(中國)에서 5천리(千里)나 떨어져 있는 해외(海外)의 조그만 제후국(諸侯國)으로써, 그들로부터 책봉(冊封)이나 받고, 조공(朝貢)하는 이런 나라로 묘사(描寫)시켜 놓았는데,
위에 열거(列擧)된 제후왕(諸侯王)과 후작(侯爵)과 태수(太守)등을 보면 : 백제(百濟)란 나라가 조그만 제후국(諸侯國)이 아닌 ‘대제국(大帝國)’이었음을 증거(證據) 또는 고증(考證)해 주고 있다.
더구나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은 또 무엇일까? 반도(半島) 땅 서남(西南) 모퉁이에서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의 백제(百濟)가 ‘하늘(천(天)의 아들(子)이었다’는 ‘황제(皇帝)의 나라(國)’라도 되었다는 것이냐?
‘좌현왕(左賢王)이니 우현왕(右賢王)’이니 하는 말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그렇다. 돌궐(突厥)이니 흉노(匈奴)니 하는 ‘서융(西戎)과 북적(北狄)’ 나라(國)에서 등장(登場)하는 왕(王)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백제(百濟)가 서융(西戎)이었는가, 아니면 북적(北狄)이었는가? 당연(當然)한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일 수 있다. 이건 바로 ‘백제(百濟)의 요서경략(遼西經略)’과 관계(關係)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즉(卽)『요서(遼西)는 서방(西方) 땅』 이기 때문이다.
➌ 남제서(南齊書)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眾襲擊虜軍,大破之. :이해에, 위로(魏虜:北魏)가 다시(또) 수십만(數十萬)기마(騎馬)를 보내어 백제(百濟)를 공격(公格)하여, 백제(百濟)의 지경(地境)으로 들어갔는데, 모대(牟大)가 보낸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등이 무리들을 이끌고 위로(魏虜) 군대(軍隊)를 습격(襲擊)하여, 크게 깨뜨렸다.》고 하였다.
이 기록(記錄)은, 자치통감(資治通鑑) 제기(齊紀)에도 기록(記錄)되어 있다. 곧 【資治通鑑 136 齊紀 二. 世祖武皇帝 :《永明六年,魏遣兵擊百濟,為百濟所敗. : 영명(永明) 6년, 위(魏)에서 보낸 군사가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고 하였다.
● <제(齊) 세조(世祖) 영명(永明), 6년(六年)은, “서력(西曆) 489년”>이다.
이때 「북위(北魏)가 백제(百濟)를 치기 위해,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을 출병(出兵)시켜, 백제(百濟) 땅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를 눈치 챈 백제(百濟) 왕(王) “모대(牟大)”의 명(命)을 받은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등이 거느린 군대(軍隊)가 기습(奇襲), 공격(攻擊)하여 북위(北魏) 수십만(數十萬) 기병병단(騎兵兵團)을 궤멸(潰滅)시켰다.」는 이야기다.
근데,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것은, “又”자(字)다.
【네이버한자사전 : 「又」/ 1. 또 2. 다시 3. 또한, 동시에 4. 더욱 5. 오른손, 오른쪽 6. 거듭하다, 두 번 하다 7. 용서하다(容恕--) / 자원(字源) : 상형문자 : 又자는 ‘또’나 ‘다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又자는 사람의 오른손을 그린 것으로 이전에는 ‘손’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중국에서는 오른쪽이 옳고 바름을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오른손잡이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又자는 ‘손’을 뜻하다가 후에 ‘또’나 ‘자주’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자주 쓰는 손이라는 뜻인 것이다. 특히 금문에서부터는 손과 관련된 여러 글자가 파생되면서 又자는 손이 아닌 ‘자주 사용한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又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여전히 ‘손’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 그렇다면 서력(西曆) 489년 이전(以前), ‘북위(北魏)=위로(魏虜)’가 백제(百濟)를 침공(侵攻)했었고, 〈제(齊) 세조(世祖) 영명(永明), 6년(六年)【서력(西曆) 489년】〉에, 또 다시 침공(侵攻)했다는 뜻이다.
➨ 당(唐) 소정방(蘇定方)은, 겨우 보기(步騎) 혼성부대 13만(萬)으로 백제(百濟)를 쳤다고 하였다. 의자왕(義慈王)때에 이르러 백제(百濟)의 국력이 쇠(衰)하였거나, 또는 내부(內部)의 반란(叛亂)등으로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한 것이 아닐까?
‘기마(騎馬) 수십만(數十萬)’은, 그 편제(編制)로 볼 때, 세계(世界) 역사상(歷史上)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기병병단(騎兵兵團)이다. 백제(百濟) 역시(亦是) 이와 대등(對等)할 정도의 무력(武力)을 소유(所有)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말이 틀렸는가?
곧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뜻이다.〉 는 것이다.
※ 【이 부분(部分)은 백제(百濟)와 관련(關聯)된 ‘중요(重要)한 기록(記錄)’이라고 판단(判斷)되어, 전회(前回)의 것과 보충(補充)된 내용(內容)으로 중복(重複) 설명(說明)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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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사(南史)에서 이르기를 :
《百濟者,其先東夷有三韓國:馬韓有五十四國.百濟即其一也. : 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 晉世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 號所都城曰固麻,謂邑曰檐魯,如中國之言郡縣也.其國土有二十二檐魯,皆以子弟宗族分據之. : 도성(屠城)은 고마(固麻)라고 부른다. 고을(邑)은 담로(檐魯)라고 있는데, 이는 중국(中國) 말로 군현(郡縣)과 같다. 그 나라 땅에는 22개의 담로(檐魯)가 있어 왕(王)의 아들(子)이나 종족(宗族=王族)들이 나누어 다스렸다. 其 人 形 長, 衣 服 潔 淨. : 그 나라(백제(百濟) 사람의 형상(形狀)은 키가 크고, 의복(衣服)은 깨끗하고 말끔했다. 其言參諸夏,亦秦,韓之遺俗云. : 그【백제(百濟)】말에는 하(夏)의 여러 말이 뒤섞어 있는데 역시 진(秦)과 한국(韓國)의 유속(遺俗)이다.》라고 하였다.
➊ 《其 人 形 長, 衣 服 潔 淨. : 그 나라(백제(百濟) 사람의 형상(形狀)은 키가 크고, 의복(衣服)은 깨끗하고 말끔했다.》고 하였는바,
백제(百濟)인들은 “주변(周邊)의 다른 나라사람들에 비해 키가 더 컸다”는 뜻이고, “의복(衣服)은 깨끗하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녔다”는 뜻으로 보인다.
➋ 그 외(外)의 것들은, 양직공도(梁職貢圖)【아래 (7)항】에서 말하는 바와 큰 차이(差異)가 없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내용(內容)들이다.
(7) 양직공도(梁職貢圖) 편을 보면 : 원문(原文)【관심부분(觀心部分) 발췌(拔萃)】 :
《晉末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 : 진(晉)【서진(西晉)이다】말(末)에 구려(駒驪)가 요동(遼東), 낙랑(樂浪)을 다스릴 때, 또한 백제(百濟)가 요서(遼西)의 진평현(晉平縣)에 있었다.【다스렸다】 所治城曰固麻謂邑檐魯於中國郡縣有二十二檐魯分子弟宗族爲之. : (百濟의) 치소(治所)는 고마(固麻)라고 부른다. 고을(邑)은 담로(檐魯)라고 있는데, 이는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으로 22개의 담로(檐魯)로 나누어 왕(王)의 아들(子)이나 종족(宗族=王族)들이 다스렸다. 旁小國有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巳文,下枕羅等附之 : 주변(旁)의 소국(小國)들인 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연(麻連), 상사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등이 의지(附)해 있었다. 其言參諸夏亦秦韓之遺俗. : 그【백제(百濟)】말에는 하(夏)의 여러 말이 뒤섞어 있는데 역시 진(秦)과 한국(韓國)의 유속(遺俗)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양직공도(梁職貢圖)는 : ‘서력(西曆) 526-552년’, ‘양(梁) 원제[元帝: 蕭繹]’ 때의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양직공도(梁職貢圖) 원문(原文) 전문(全文) 중에서 관심부분(觀心部分)만을 발췌(拔萃)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➊ 〈‘구려(駒驪)=고구려(高駒驪)’가 서진(西晉) 말기(末期), 요동(遼東) 땅을 경략(經略)할 때에, 백제(百濟) 역시 요서군(遼西郡)에 진평현(晉平縣)을 설치하고 다스렸다〉는 것을 재차(再次) 확인(確認)해 주고 있으며,
➋ 〈22개소(個所)의 읍락(邑落) 즉(卽) 담로(檐魯)를 설치해 놓고, 왕(王)의 아들(子)이나 종족(宗族=王族)들에게 그곳을 통치하도록 했다.〉는 것을 재차(再次) 증거(證據)해 주며,
➌ 〈6세기 당시(當時)에도 백제(百濟)는, 주위의 여러 작은 나라들 즉『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연(麻連), 상사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등을 속국(屬國)으로 다스렸다는 것인데,
여기서 “사라(斯羅)”는 신라(新羅)의 다른 이름으로, 신라(新羅)라는 국호(國號)가 정해지기 전(前)까지 “사라(斯羅)와 신라(新羅)”가 동시에 호칭되었다. 신라(新羅)라는 국호(國號)는,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4년[AD 503]”에 되어서야 확정(確定)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위에서 언급(言及)한 『10개의 속국(屬國) 중에서 “사라(斯羅)”를 뺀 나머지 9개 나라는 어디에 있었다는 것이냐?』 이건 ‘6세기(世紀) 때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➍ 〈그【백제(百濟)】말에는 하(夏)의 여러 말이 뒤섞어 있는데 역시 진(秦)과 한국(韓國)의 유속(遺俗)이다.〉라고 하였으니, 백제(百濟) 또한 ‘진(秦)과 한(韓)’의 백성(百姓)들이었다는 이야기다. 진(秦)과 한(韓)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春秋時代 BC
770~403 戰國時代 BC 403~221】에 기원(起源)하는데, 백제(百濟)의 백성(百姓)들은 바로 이들의 유민(遺民)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韓)은, 한(馯)이다.’고 하였으니, ‘주(周)’ 이전(以前)의 상탕(商湯) 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백제(百濟)는, ‘중국인(中國人)과 신라(新羅)인, 고려인(高麗人), 왜인(倭人)’등 여러 나라 백성(百姓)들이 함께 섞여 살고 있었다.』는 기록(記錄)을 남길 수 있었다고 설명(說明)하면 올바른 표현(表現)이다.
그렇다면 ‘진(秦)이나 한(韓)나라’는 오늘날의 대륙(大陸)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던 나라들이고, 이들은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 당요(唐堯), 하(夏), 은(殷), 주(周)의 후예(後裔)=후손(後孫)”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➎ 결국(結局), 백제(百濟) 또한 이들의 후손(後孫)들이란 이야기다. 이런 설명(說明)은,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중국(中國)”이라고 하는 ‘하(夏)=화하(華夏)‘란,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덧붙여 설명(說明)한다면 :
➨ 고구려(高駒驪)는,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후예(後裔:後孫)라서 “고씨(高氏)”다.
➨ 신라(新羅)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後裔:後孫)라서 “김씨(金氏)”다.
➨ 백제(百濟)는, 이들의 유민(遺民)이라서 계절(季節)마다 오제(五帝)에게 제사(祭祀)를 지낸 것이다.【오제(五帝) : 黃帝軒轅氏, 少昊金天氏, 顓頊高陽氏, 帝嚳高辛氏, 唐堯】
【 ‘중국(中國)’이란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지칭(指稱)하는 말이자, ‘하(夏) 또는 화하(華夏)’ 역시(亦是) ‘조선(朝鮮)’의 다른 표현(表現)일 뿐이다. 한족(漢族)이란 옛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19-20세기(世紀)에 출현(出現)한 민족주의(民族主義)에서 파생(派生)된 정치구호(政治口號)였을 뿐이다. 이러한 정치구호(政治口號)를 역사(歷史)로 만들어 놓은 자(者)들이 바로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인 서세(西勢)와 왜(倭),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인 오늘날의 중국(中國) 당국(當局)이다.】
○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께서는 “한국사(韓國史)”에 관한 관심(關心)은 어느 정도나 될까?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무능력(無能力)하고 무지무식(無智無識)한 사람을 대통령(大統領)으로 선출(選出)해 놓고, 이 “0 망신(亡身)”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0새끼 0새끼”하는 욕설(辱說)이나 “쪽팔려서 어떡하냐” 하는 등의 비속어(卑俗語)는, 아무리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國家)에서라도 비난(非難)받아야 마땅하고, 국민(國民)들에게 사죄(謝罪) 또는 사과(謝過)해야 함은 인간(人間)의 최소한(最小限)의 도리(道理)다.
사죄(謝罪), 사과(謝過)도 하지 않고, 비난(非難)과 손가락질을 모면(謀免)하기 위해 “거짓말 또는 오리발”을 내미는 것은, 또 다름 범죄행위(犯罪行爲)와 같다.
“사람같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도리(道理)를 모르는 사람에게 적용(適用)되는 말이다. 사람의 도리(道理)를 모르는 사람은 야수(野獸)와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이런 사람이 한 나라의 대통령(大統領)이라고 할 때, 그 나라와 그 민족(民族)에게는 희망(希望)이 없다. 임기(任期)가 끝날 때까지, 암울(暗鬱)한 시간(時間)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選擇)은 자유(自由)이나, 선택(選擇)에는 그에 따르는 책임(責任)이 뒤따른다.”고 하는 것이며, 국가(國家)와 국민(國民) 모두에게 불행(不幸)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2022년 11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왜 "한국사"는 "식민사관"의 연장이어야 하는가?
"식민사관" 이 뭔가?
[네이버 국어사전 / 식민 사관 : 일제가 한국 침략과 식민 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조작해 낸 역사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데도 해방이후 지금까지 누구도 이에 대해 항변한다거나 반기를 들고 깃발을 든 사람이 없다.
오직 "재야"라는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륙조선사'를 주장하는 극소수의 연구자들만이 반기를 들고, "식민사관"을 타파하기위해 목터져라 외치고 있을 뿐이다. '한국사'는 일제 제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둘러리로 전락해진 지 이미 오래다.
왜 그래야만 하지?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과연 누군가?
왜 보수주의자들이나 보수정권은 친일에 목매고 있는 건가?
극일(克日)에 목을 매면 안 되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한국사의 한 장면이요, 이해불가한 보수정권이다.
특히 "윤석열"정권은, "친일"에 "안보"와 연결시켜, 마치 "친일"이 아니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구멍이 뚫린 듯 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과 말을 한다. '친일'을 하면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이 된다"라는 식의 안보논리는 누가 만들어낸 건가?
솔직하게, 진솔하게 말하면 :
"일본의 안보를 위해 대한민국의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논리고, 이는 일본 아이들이 줄기차게, 은밀하게 한국의 군사력을 이용해 먹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간파하지 못하는 000들 같은 보수주의자들! 아니면 '토착왜구'들이던가! 그렇치 않은가?
왜 우리가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지? 그 이유가 뭔가? 천황폐하를 위해서 인가?
일본은 자신들의 국가안위와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훌륭한 방패막이가 아닌가! 한반도 땅 자체가 말이다. 하늘이 일본에게 내려준 천혜의 참호와 같다.
이런 정치적 지리적 잇점 하나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는 불쌍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
어처구니 없게 매번 당하기만 하는 보수 정권들! 우리가 왜 일본의 안보를 위해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지?
"존경하는 윤석열 대통령님! 왜 우리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합니까?"
"욱일기는 '천황폐하 만만세'를 외치는 일제 제국주의자들의 깃발이다"
그들은 오늘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물론 그것이 뜻대로 될 일은 없다.
이런 깃발을 바라보며, 대한민국의 국군장병들이 거수경례를 한다? 왜 그래야 하지?
"윤석열 정권"은 한반도 7700만 국민들의 자존심과 민족의 얼과 혼을 빼았으려 한다. 헌데 그 이유가 뭐냐?
"극일"을 위해 "얼과 혼"을 다 바쳐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친일 군사동맹을 맺으면, 중국이나 러시아나 북한"이 "아이구 무서워라! 우리 빨리 영구 평화조약이라도 맺자" 할까봐! 빙0들! 거기다가, 우리의 소원인 남북통일은 요단강 건너가는 일밖에 없다.
"러시아는 그동안의 우호관계를 파탄시키려 할 것이고, 적대관계가 될 수 있으며, 북한은 매국노라고 한 층 더 도발을 증가시킴과 동시 중국,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설정할 것이고, 중국은 동북군구와 해군력을 증가시켜, 서해는 내해다라며, 도발을 할 것이다. 누굴 위해서 이런 멍청한 외교를? '천황페하'를 위해서?
"왜"는 옛 조선왕조의 울타리노릇을 했다. 왜 과거의 역사를 우리 뇌로부터 없애려 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