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중개사 Report : 새로운 부(富)의 축으로 한남동, 압구정동, 성수동을 말하다
현재 성수동1가에 위치한 아크로(ACRO)포레스트 아파트의 모습 | |
하진중개사 REPORT ( 글, 사진 두하진 ) | |
성수동 특별보고서 | 봄철 교외에는 가는 풀 비단자리 깔렸는데, 봄바람에 술을 싣고 노는 사람 찾아가네. 아침엔 준마타고 푸른 풀 밝고 나갔다가, 저물게 취해 돌아와서 공연히 봄을 애석해 하는구나. 푸른 옷 저 소년들 다락구비 올라서 높은 저와 퉁소 소리 정히 들리네. 버들가지 한들한들 녹음도 깊었는데 명일엔 그네가 담장가에 걸렸으리. - 월산대군의 詩 - |
새로운 부(富)의 축으로 : 성수동 편
조선시대 기록에서 말하는 성수동
오늘날 성동구 성수동은, 한천(漢川: 현재의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류하면서 만들어 놓은 퇴적 평야지대 위에 있다. 이 일원은 조선시대에 동쪽 성저십리(城低十里)에 속하여 흔히 동교(東郊), 즉 동쪽 교외로 불렸다. 동교는 전교(箭郊)라고도 불리기도 하였다. 전교는 전관평(箭串坪)에서 유래한 말인데, 화살 전(箭), 꽂을 관(串), 평평할 평(坪)이기 때문에 우리말로는 '살곶이들' 혹은 '살곳이벌'이 된다. 그 전관평야를 가로지르는 냇물이 중랑천이고, 그 하류에 조선시대의 가장 긴 다리로 유명한 '살곶이 다리'가 있다.
'여지도'중 도성삼군문분계지도(1751, 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연구소, 『고지도를 통해 본 서울지명연구』수록)
풀과 버들이 무성한 살곶이 벌에는 조선 초부터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이 설치되었다. 마장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하는데, 이 마장에서는 군마와 더불어 급히 연락을 할 때 역마로 쓸 파발마를 길렀다. 또한 이곳에는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수도방위령부대가 있었던 것이다. 말을 먹이는 마장이 있고 군인들이 주둔한 이곳에서, 왕은 신하들과 함께 봄과 가을에 말 탄 군사를 열병하고 군인들의 무예를 검열했다. 현재 성수동1가와 2가에 걸쳐있는 '진터마을'이 군대가 무예를 수련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없지만 군인들이 무예를 수련하고, 왕이 말을 기르는 것과 군 사열을 지켜보던 정자인 성덕정(聖德亭)도 이곳에 있었다. 오늘날의 성수동인 살곶이 벌은 조선 전기 이래 오랫동안 이용된 말 탄 군사들을 기르는 곳으로 이용된 열무장(閱武場)이었다.
조선 역대왕들의 애정하는 사냥터
조선의 역대 왕들은 열무(閱武)가 끝난 뒤에 이곳 살곶이 벌에서 사냥을 즐겼다. 살곶이 다리 근처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물고기가 지천으로 있었고 땅이 비옥하여 짐승과 새가 많이 살았다. 역대 왕들은 이곳에서 주로 매사냥과 노루사냥을 하였다. 태조에서 9대 성종까지, 성종 이후에도 조선시대 내내 왕들이 이곳에서 군대를 사열한 후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동교수렵(東郊狩獵)'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살곶이 다리에서 바로 보이는 높지 않은 응봉산에서 주로 매를 놓아 꿩을 잡기도 해 매봉 또는 응봉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태조가 살곶이벌에서 매사냥을 즐기기 위해 즉위 4년 (1395년)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을 한강 위, 곧 지금의 응봉 기슭에 설치하였다.
진헌마정색도, 1663,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매봉 기슭에 매사냥을 맡아보는 응방이란 관청을 설치하였고, 아들인 세종, 형님인 정종과 살곶이벌, 아차산을 누비며 사냥을 즐겼다. 왕이 사냥을 하러 나올 경우, 왕이 계신 곳을 알리고 백성은 함부로 범접하지 말라는 뜻으로 높은 기를 세웠다. 왕이 병사들을 열무할 때도 임금이 계신다는 상징으로 높은 기를 세웠다. 이 기를 독기(纛旗), 우리말로는 '둑기' 혹은 '뚝기'라고 불렀다. 그래서 살곶이벌 중에서 독기를 세워 둔 한강가 땅을 뚝섬이라고 했다. 중랑천, 한강에 의해 3면이 둘러싸인 땅이 마치 섬처럼 보였기 때문에 '뚝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독기의 우리말인 뚝기 혹은 둑기를 세운 섬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을 뚝섬, 둑섬, 또는 뚝도, 둑도라고 불렀다.
『순종국장록 純宗國葬錄』(朝鮮博文社, 1926) 순명황후(純明皇后)의 옛릉인 뚝섬 유릉(裕陵)의 천봉(遷奉) 시 여사군(轝士軍)의 모습이다. 사진 속에서 지나고 있는 장소는 살곶이 다리이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살곶이 다리는 이곳이 광나루로해서 강릉으로 나가거나 잠실을 거쳐 광주로 나가고 뚝섬나루를 건너 삼성, 양재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만들어졌지만, 교통상의 요인 외에도 또 다른 건설 목적이 있었다. 세종이 자주 이곳을 행차하게 되자, 왕의 통행 편의를 위해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성동구 일대의 뚝섬, 성수지역에서 말 사육과 함께 유명했던 것은 채소 재배였다. 보와 저습지가 곳곳에 만들어지고 논과 밭이 일구어져, 벼, 보리, 밀, 조 등 여러 가지 작물이 재배되었다. 특히 이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퇴적층 지대였기 때문에 식량작물보다 무, 배추와 같은 채소 재배가 잘되어 관련농사가 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찌 보면 조선시대의 이 곳 성수동 등지에 대해 정리해보면 뚝섬나루터, 매 사냥, 말 사육, 군대열병식, 농사 등의 키워드로서 정리된다.
일제강점기 성수동과 경성 수도수원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뚝섬 일대는 남서 두모방 전곶일계와 전곶이계의 전곶동으로 편재되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는 경성부를 축소하면서 수개 동을 합쳐 정(町) - 정목(丁目) - 동(洞)의 새로운 체제로 개편하고, 5부 8면제를 폐지하여 성외(城外)의 8면의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둑도일계와 양주군의 고양주면 자마장리 일부를 편입시켜 동독도리(東纛島里: 현재 성수동2가)로 칭하였고, 둑도이계를 서독도리(西纛島里: 현재 성수동 1가)로 칭하였다.
『寫眞帖 朝鮮』(朝鮮總督府, 1921), 현재 성수1가1동에 위치했던 신식 급수시설(경성 수도수원지)과 재래식 급수방법(물지게꾼),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근대에 들어와 뚝섬에는 많은 새로운 근대적 시설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뚝도(뚝섬)수원지였다. 뚝도 수원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수원지 시설이었다. 송수실과 여과지는, 이미 서울에 전차, 전기를 도입한 바 있던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가 1903년 12월 당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상수도 시설, 경영에 관한 특허를 얻어 1906년 8월에 기공하여 1908년 8월 준공하였다.
뚝섬은 유독 홍수로 인한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었다. 1925년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었던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뚝섬, 장한평 일대가 크게 피해를 입자,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현재의 성수대교 북단에서 한강 연안을 따라 동서로 뚝섬 수원지에 이르는 긴 제방을 쌓았다. 그리고 침수지에는 지금은 사라진 저자도에서 모래와 흙을 파다가 부어 지표를 높이고 방수에 힘썼다고 한다.
'경성도' 중 뚝섬 일대(1922)의 모습이다. - 출처『성수동; 장인, 천 번의 두들김』(2015), 27쪽 -
언제부터 공업지대가 되었을까?
해방 후 성수동 공단의 탄생
뚝섬일대는 해방 이후 1949년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50년에는 지명이 성수동1가, 성수동2가로 바뀌었다. 오늘날 성수동1가와 2가에 걸쳐 있는 진터마을이 군대가 무예를 수련하던 곳인데, 앞서 말했던 왕이 군사훈련을 참관하던 성덕정(聖德亭)에서 성스러울 성(聖)자를 따고 또 수원지의 물 수(水)자를 따서 성수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한강을 낀 물가 마을로 한강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라는 뜻으로 '성수(聖水)'라는 동명이 붙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대체 말을 기르고, 나루터에서 나무를 보내고, 채소를 심어 팔던 이곳이 언제부터 공업지대로 변모했는지가 궁금했다. 이러한 일제 하 공업정책과 성수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의외로 성수동은 일제의 공업육성정책과 연관성이 없었다.
(왼)뚝섬 배추밭(1959),(오)모토로라 코리아 공장(1968, 광장동), -출처『성수동; 장인, 천 번의 두들김』(2015) -
1939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일본 자본의 진출을 조장하기 위해 공장용지 조성지구를 설정하였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성동 지역에서 공업 및 상업 활동은 거의 전무했고, 뚝섬 포구로 모이는 제목과 땔감을 취급하는 점포들이 있었을 뿐이다. 1936년 경성상공회의소가 조선 전체에 등록된 회사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일제 하 서울의 동교에는 단 1개의 공, 사설 시장도 없었으며 은행 지점도 없었다. 이처럼 성수동 역사에서 국가 정책사업으로 성수동을 공업단지로 지정하여 공단산업을 장려한 것도 아닌데, 공업단지가 조성된 것이 성수동의 한 가지 큰 특징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본 뚝섬 경마장 부근 현재의 성수동 1가의 '서울숲'이 위치한 곳이다. -출처 ,1974, 서울특별시 역사편찬위원회 -
성동지역에 최초로 입지한 근대적 제조업체는 1929년에 창설된 삼성제약이었고 이어 1945년 동양전기산업 그리고 1947년 대한제지공장 등이 입지했다고 한다. 6.25전쟁을 겪은 후 성동 지역에는 1950년대 후반에서부터 1960년대에 걸쳐 많은 수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제조업체들이 앞 다투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비교적 값싼 용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고 천호동이나 거여동으로부터 많은 노동인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더불어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공단지대로 변모하였다. 성동교와 뚝섬간의 저습지가 매립되어 공장지대와 주택지가 만들어지고, 광장동과 장안동의 도로연변과 뚝섬 동부 제발 내부지역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성수동은 점차 공업화되기 시작했다. 청계천 일대에 밀집해있던 봉제, 섬유, 금속, 기계업체들이 1950년대 청계천 재개발 과정에서 외각인 성수동 방면으로 이동했다. 전쟁으로 인해 터전을 잃어버린 영세업체들이 도심과 가깝고, 땅값이 싸고 인접한 하천(성수천)을 이용할 수 있는 성수동을 이전 대상의 최적지로 삼아 성수동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공장지대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성수동 공단은 구로공단처럼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조성한 공업단지가 아니라, 도심제조업의 공간적 확산과정 중에서 과거 서울 중심에 입지해 있던 제조업체들이 외각으로 이전하면서 제조업 밀집지역으로 자연스럽게 형성 발전한 공업단지이다. 1960년대 후반 고도성장기 서울의 공장신설은 성수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63년 마포에서 모나미가 이전하고 1966년부터 성동구에서 진행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마무리되면서, 구획정리가 끝난 광장동, 화양동, 성수동에 대형 공장들이 집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성수동 공업지역 한 수제화 공장 -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이로 인해 공장 및 가로정비 작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주로 빨간 벽돌로 지은 2~3층 건물의 공장들이 성수천을 따라 바둑판 형태로 늘어서면서 가로정비사업도 대대적으로 전개돼, 구변은 잘 정리된 공장지대로 면모를 갖추었다. 성수동은 모범적인 대기업들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수준도 타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었고 노사분쟁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결과 성수동 지역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공장지대로 전성기를 누렸다.
도시의 확대, 환경오염 주민갈등
성수동 공단의 이전
성수동은 공장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져 있는 곳이었다. 개발이 있기 전까지 이곳은 주로 공장지대와 낡은 벽돌주택이 밀집했던 곳으로 주공이 함께했으며 현대의 부촌으로 변화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당시 공장 노동자들은 화양동이나 성수동 골방에서 3~4명이 집단 거주를 해야 하는 열악한 생활을 했다. 공장지대와 주거가 합쳐진 오밀조밀한 벽돌집이 모인 환경에서 거주해야 했다. 1980년대를 전후로 강남지역의 개발이 놀라운 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1970년대 초부터 빈터에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한 주택들이 어느새 대규모 주거지를 형성한 점은 성수동 공단에 부담이 되었다. 뚝섬 경마장 부근에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전철역 부근에는 대규모 연립주택이 건립됨에 따라, 성수동의 주거기능은 대폭 강화되었다. 이 때 당시 준공업지역으로 설정된 지역을 점차 해체하여 주거지역으로 바꾸기 시작했는데 주거지역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공장이전이 불가피해졌다. 그로 인해 성남, 반월 등지로 새 공장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공단으로 인한 환경오염문제로 주민과의 마찰이 커졌고, 공장 부지들을 외각으로 이전시키고 새로운 공장 신설도 금지되었다.
영동교 부근 성수동 일대(1973) 공장, 벽돌집, 논밭이 어우러져 보인다. -출처 『성수동; 장인, 천 번의 두들김』(2015), 48쪽 -
대한민국 최초의 아파트형 공장
오늘날의 성수 지식산업센터
오늘날의 지식산업센터라고 일컬을 수 있는 아파트형 공장은 성수동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지식산업센터는 도심 지역 또는 신도시 지구에서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 공장과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아파트형 건물을 말한다. 1991년 삼풍건설산업에 의해 서울지역에서 민간업체가 건설하는 최초의 아파트형 공장이 성수동에 만들어진 이래, 많은 아파트형 공장들이 이 지역에 들어섰다. 이 용어는 2009년까지는 아파트형 공장으로 불리다가 법률개정으로 지식산업센터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무실빌딩은 내부에 생산시설을 설치할 수 없지만, 지식산업센터는 생산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성수동에 아파트형 공장이 특히 많이 건설되었던 이유는 이곳이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공업지역이었기 때문이다. 1997년 말에 시작된 IMF 금융위기로 인해 지가가 큰 폭으로 하락하였고 거의 대부분 미분양이 되었다고 한다.
성수동 삼표레미콘 부지에 들어서는 건축물 예시 - 출처 서울특별시 -
성수동 일대는 지금 한남동, 압구정동과 함께 'MZ세대'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다양하고 특색 있는 리테일 상권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다만, 한남동, 압구정동과 차별을 둘 수 있는 것은 아직 개발할 수 있는 부지가 비교적 많으며, 지가가 앞선 두 동네보다 훨씬 경쟁력이 있다는 점이다. 투자가치로서 성수동은 앞으로 잠재적인 능력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공장지대를 이전 후 철거하고 서울시에서 주도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부지가 있다. 바로 옛 삼표레미콘 시멘트 공장 부지이다. 2022년 8월 16일 철거가 완료되었으며, 신개념 스마트 오피스이자 국제 인증을 받는 친환경 LEED 플래티넘 건축물로 건축하고, 서울숲 및 주변과의 연계성을 강화하여 저층부를 선큰, 덮개공원 등으로 연결하여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여 '미래산업의 신(新)성장 거점의 촉매재 역할을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수동은 '성수동 2가 333-16 일대'에 건축계의 노벨상인 '2023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건축물이 국제공모에서 선정되면서 혁신 디자인 업무시설이 들어오게 되었다. 해당 건축물은 풍부한 공개공지 및 조경 연출을 통해 성수동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를 것으로 기대된다.
MZ세대가 주로 찾는 성수동 핫플레이스 연무장길 팝업스토어 설치 모습
서울시의 주도하에 개발 속도를 내면서 성수동은 성수 준공업 지역 및 IT 사업개발진흥지구 (신산업) 성수전략정비구역(주거) 등 성수 지역의 기능적 연계를 통해 미래형 첨단산업(TAMI : Technology, Advertising, Media and Information)의 기반의 미래 성장을 견인하는 신산업 성장 거점, 도시 · 자연 · 첨단산업 · 문화가 어우러진 미래선도 수변복합도시로 더욱 더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성수동은 아직까지 강남에 비해 지가경쟁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고 시가 주도하는 속도감 있는 개발로 인해 '한국의 브루클린'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성수동 일대는 현재 많은 해외자본이 유입되고 있고, 유명 건축디자이너들의 관심을 받아 과거와 마찬가지로 '아파트형 공장'인 지식산업센터가 개발되며 2026년까지 20여만 평의 업무시설이 공급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