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산.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동백꽃 필 무렵에 계절 산행 하는 것이
운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인생을 이렇게 향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또한 어떠냐고 하고
구름 위에 누워 禪의 도를 닦는 곳(參禪臥雲)에서
선운사가 유래되었다는
글에 혹해서 선운사로 향했다.
전라도 지역으로 갈 때 마다
지대가 낮아서인지 항상 안개가 자욱하고
멀리 불피우는 장작 연기가 하얗게 떠오른다.
여긴 길가의 작은 구릉에 유난히 무덤이 많다.
아마 높은 산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나즈막한 구릉 위로
한그루, 또 한그루의 나무들.
저 멀리는 바닷가일까.
海松같은 것이 들판 너머로 무리지어 있다.
해송이 있으면
저 건너 섬에는 해당화도 피어있겠지.
버스 창문에 습기가 어려
자꾸만 손으로 창을 닦고 밖을 쳐다본다.
능선에 올라
아스라한 산자락과 계곡
물안개에 휩싸여 있는 몽환의 세계에 빠져 든다.
밑에서 가파르게 습기가 올라온다.
진달래가 이슬을 한방울 머금고 능선 밑으로 고개를 숙인다.
습기란 우울을 상징한다는데 나는 푸른색이 좋다.
靑이 아닌 蒼이 좋다.
蒼에는 단순히 푸르다는 뜻을 넘어선 숙명이랄까
맑음, 푸름 뒤의 그 어떤 의미까지 포함된 색,
습기와 푸른색은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선운산에는 相思花가 유명하다는데.
능선 너머에는
안개와 구름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구름 위에 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 같다.
경수봉에 오르니 <동답산악회> 라고 적혀있는 띠가 보인다.
선운사에 온다고 였을까.
어제 꿈에서 동답산악회의 유래를 들었다.
산을 열심히 다니던 두 친구가 선운산에 올라
구름 위에 누워 禪의 도를 닦는 곳 參禪臥雲의 지세에 반해
의기를 투합하여 東踏會를 만들었다던가.
해가 뜨는 동쪽으로 발을 디디면서도
서쪽을 돌아다 볼 수 있는 친구가 되자는.
인생이란 양지 만이 아닌 음지도 있는 법.
항상 양지를 추구하되 음지에서의 생활을 잊지 말고
초심을 잊지 말고 살아가자고.
그것이 동답 산악회의 모태였다던가.
저 멀리에는 동답호가 산정에 떠 있고
불쑥 쏟아 나온 동답봉의 모습과 어우려져
신비감을 더해가고 있고.
산우가 가져온 복분자를 마시며
술에 취해 엉터리 시를 짓고 읊어 본다.
동쪽으로 발을 디디고 서쪽을 뒤돌아 본다.
원숭이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보이는 것은 아스라이 곰소만 뿐.
낙조대.
코끼리바위.
巨象峰.
예전 어느 때 코끼리도 날개가 있어
펄럭이고 펄럭이며 여기서 노닐다가
대왕 코끼리는 죄를 지어 巨象峰으로 변하고,
모든 코끼리는 이 낙조대에서
해가 떨어지는 순간에 장엄하게 생을 마쳤다는
그래서 맘모스가 멸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작대기를 앞으로 하고
山僧의 흉내를 내어 본다.
거상봉에서 바라다 보는 선운사는 황량하다.
건물만 몇 채 둥그러이
그래도 낙조대로 가자는 유혹을 뿌리치고 선운사로 향한다.
이곳에서 參禪臥雲 하고 싶어서 일까.
입구의 작은 개천물은 까맣고 푸르게
선운사를 휘감아 돌고 있다 .
떡갈나무의 탄닌이 변하게 하더라도
선운사의 물은 청정할 수 밖에 없다 .
선운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쓰여 있는 법구경 한 귀절.
"자신의 지난 생을 꿰뚫어 보고
하늘의 기쁨과 동시에 지옥의 고통도 알고 있는 사람.
탄생과 죽음의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
그 영혼의 새벽 강가에 앉아있는 사람.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해 버린 사람.
그를 일컬어 불제자라 한다."
나는
언제나 그 영혼의 새벽 강가에 앉아 볼 수 있을까.
인간이란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천재란 노력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애인(愛人)-육바라밀/이광수
님에게서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布施)를 배웠노라 .
임께 보이고자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持戒)를 배웠노라.
임이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忍辱)을 배웠노라.
자나깨나 쉬일 새 없이
임을 그리워하고 임 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精進)을 배웠노라.
천하에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오직 임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禪定)을 배웠노라.
내가 임의 품에 안길 때에
기쁨도 슬픔도 임과 나의 존재도 잊을 때에
거기서 나는 지혜(智慧)를 배웠노라 .
인제 알았노라.
임은 이 몸께 바라밀(波羅蜜)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툰 부처시라고
동백의 붉은 꽃망울은 丹心을 의미한다던가.
선운사 경내에 활짝 핀 목련
아래에서 고아한 모습과 빛깔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목련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마음과 몸도 곱지 않을까.
사진 전에 있는 선운사의 사계에 넋이 나간다.
魂은 사진 속에 있고 魄은 여기에 남아 관조한다.
사물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단련이 되어서 일까.
정신의 단련일까.
마음의 단련일까.
極과 極은 통한다는데 通했는가.
유아의 눈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면 세계를 볼 수 없다.
선운사 경내의 찻집에서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지는 않는다"
라는 짧은 귀절 하나가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선운사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 옆의 사꾸라.
곧 하얀 사꾸라가 땅에 떨어져
꽃잎을 세우며 이 대웅보전 앞으로 뛰어가리라.
계곡의 거머스럼한 물 위에
야광처럼 흰 빛을 발하여 떠내려 가리라.
그렇게 또 봄은 지나가고
지난 겨울처럼 우리는 아쉬워 하리라.
그리고
언제인가 반드시 떠올리리라.
선운사의 이 봄을
인생이란 한걸음 한걸음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라 한다.
알지 못하는 미래에 눈을 돌릴 필요없고
인생을 향유하며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한 때 좋아했던
그 무엇은 잊어버리고
아니
잊어 버린척 하고.
淸眼
첫댓글 좋습니다.
제가 밤늦게 음악방에 댓글 도배하난 뜻은, 한 사람을 꼬셔내기 위함이었으니
걸려들었다고나 할까요.
글이 참 좋아요
음악을 밝히는 분들은 참 까다롭워서
청보다 창을 좋다하심은 일종의 심도 깊은 색을 좋아하신단 말씀
술마시긴 좋은데 연애하긴 피곤한 스타일 같은데
다행이 남자라서...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는데,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아니오고,
잡새가 날라와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음에 만나면
몇잔 마시고 남아있는 우량예 마시죠.
뚝뚝 선혈이 낭자한 그 동백꽃 깔리는 길이나
선운사의 상사화를 보면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것 일체를 배격하며 익숙해진 척
담담한 표정으로 있으려 해봐도 그 꽃잎의 가녀린 떨림에
순간 등골까지 여전히 아프고 쓰릴 때가 있어요
시대를 관통한 우울과 불안에 꽃 같은 시절을 잠식당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을 품고 사는지도 몰랐거나 혹은
상대방이 더 힘들어할까 봐 애써 진심의 반토막만 보이며
손을 놓아야 했던 그때.
나중에 돌이켜보니 우린 서로 진심으로 사랑을 했구나
한탄만 하게 되는 엇갈린 시간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며
선운산 그 상사화 피고 지는 지층에 얼마나 많이 퇴적되어 있을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까지 생각하면
각각 당위성을 갖게 되는 지성과 반란의 작용으로
더 모호해지고 더 복잡해지지만
이젠 점점 단순해진 눈을 갖고 싶네요. 저도 나이가 드나 봐요.
좋은 글들에 한참 앉았다 갑니다.
동백이나 상사화.
그 모든 것은 생명체로서 영속하기 위하여 그러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 뿐인데
마음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리 보여서
뜻이 부여되게 되고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드디어 어떠한 의미체로 되나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금강경의 한 귀절이 있습니다.
"법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모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허상이니,
그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니라.
심즉불이라.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지요.
마음이 그 사람이기에
마음이 원하는 길이
가야할 길이 아닐런지요.
프로스트의
'The road not taken"
즉 선택되지 않은 길이
국내에서는 두갈래 길로 번역되었네요.
인간에게는 매시간 매시간 선택하여야 하는 고뇌가 있지만
그 것이 인간다움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 아닐런지.
유키 쿠라모토
오랜만에 듣는 맑은 선율.
선운사의 수선화를 떠오르게하는 피아노 음색입니다.
감사드리며
글도 음악도 즐감했습니다.
유키 쿠라모토의 피아노 소리가 좋지요.
'선운사는 여러가지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곳 같습니다.
항상 봄 정도에 갔었는데 가을에 가면 또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