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4월 14일, 북대서양 뉴펀틀랜드 해역에서 침몰한 거대 유람선 타이타닉호! 승선자 2228명 중 1523명이 사망한 역사상 가장 큰 해난사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더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 있다.
추정 사망자가 약 8천명에서 1만 2천명. 타이타닉호 침몰사건 사망자의 약 5배에 달했던 대참사로 1945년 8월 24일 일본 교토부 북부 와이사만 서쪽의 마이즈루 해역에서 발생했던 우키시마호 폭침사건[浮島丸號爆沈事件]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대한 일본 황제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35년간 지속돼왔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가혹한 식민통치가 드디어 막을 내리면서 한반도 일대는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려는 환희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한반도의 해방 소식은 곧바로 일본 열도에 강제 징집됐던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도 전해졌는데,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기다리던 그들에게 조국의 해방이란 감격 그 자체였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의 귀환을 허락받은 한국의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오미나토 항구에서 부산을 향해 가는 무게 4천 7백여톤의 해군 군수물자 수송선 우키시마호에 승선한다.
그리고 8월 22일, 드디어 출항하는 우키시마호. 그런데 출항한 지 이틀 후인 8월 24일 오후 5시 20분, 우키시마호는 교토부 부근 마이즈루항 해상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침몰하고 만다. 고국 땅을 갈망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수몰된 것이다.
사건 발생 일주일 후인 9월 1일, 침몰사건을 조사하던 오미나토 해군 경비부에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던 한국인 3725명 중 524명, 일본 해군 승무원 225명 중 25명이 사망했다면서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미국군에 의해 설치된 기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 열도 주변 해상에 기뢰를 부설해 일본의 해군을 위협했는데, 일본 해군 당국은 우키시마호가 미국군이 깔아놓은 기뢰에 부딪쳐 폭발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일본 해군의 조사결과에 대한 반론이 제기됐다. 일본 해군이 발표한 사망자 수와 폭발 원인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다. 일본 해군은 우키시마호에 총 3725명의 한국인이 승선했고 그 중 524명의 한국인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내세우며 일본 측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의 해군 경비부가 한국으로 가는 배는 오직 우키시마호가 유일하므로, 우키시마호에 탑승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이에 고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어떻게든 승선하려 했고, 4천명을 태울 수 있는 우키시마호에 두 배가 넘는 인원이 승선하면서 배 안은 넘쳐나는 사람들로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비좁았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승선 인원이 최소 8천명에서 최대 1만 2천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밝혔는데, 실제로 아오모리현 일대에 징용되어 끌려온 한국인들의 수가 1만 2천명 정도로 집계되었고, 이들 거의 대부분이 배에 탔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우키시마호에 1만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승선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은 선박의 정원에 훨씬 못 미치는 인원이 승선했다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승선자 명부를 비롯한 그 어떤 증거 자료도 내놓지 않고 있다.
〈우키시마호 폭침, 역사의 풍화에 맞서 싸우다〉를 저술한 다큐멘터리 작가 시나다 시게루는 우키시마호가 미국의 기뢰에 의해 폭발했다는 일본 측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못박으면서 당시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가는 항로는 기뢰가 모두 제거된 안전한 항로였다고 주장했다. 시나다 시게루는 당시 우키시마호의 항해장이었던 해군 장교 와지마 사다오 대위의 증언을 근거로 내세웠는데,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항에 입항하기 직전 ‘소해 완료’라는 신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해’란 일본의 해군이 사용하는 군사암호로써 안전한 항해를 위해 바다에 설치한 기뢰 따위의 위험물을 없애버리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소해 완료’라는 신호는 해역의 기뢰를 모두 처리했다는 의미로, 이는 우키시마호가 기뢰의 위험이 없는 안전한 항로를 운행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란은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을 조사한 일본 군부가 고의적으로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가중시켰는데, 일각에서는 더욱 놀라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희생자 유족들과 언론인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우키시마호가 침몰된 것이 일본의 소행이며 일본이 계획적으로 한국인 노동자들을 몰살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들은 주로 격납고나 지하 탄약고 같은 군사기지 건설에 동원됐는데, 일본 군부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일본의 군사기지에 대한 기밀을 유포할까봐 우려했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 측은 기밀 누설의 가능성이 높은 한국인 노동자들을 한꺼번에 폭살할 계획을 세우고 결국 도발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이 일본의 소행이라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했다.
당시 우키시마호의 승무원이었던 나시무라 이치로(가명)가 놀라운 사실을 증언했는데, 그는 우키시마호가 불충분한 연료를 지닌 채 출항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증언은 애초에 우키시마호가 부산까지 항해할 계획이 없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마디로 우키시마호는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폭파될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우키시마호의 폭발이 있기 직전 일본인 승무원들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승무원들이 항해 도중 갑자기 한국인들에게 선내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곧바로 230여명의 승무원들이 우키시마호에서 탈출했으며, 승무원들이 탈출한 직후 곧바로 배가 폭침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언을 바탕으로 그들은 일본인 승무원들이 그 때 이미 우키시마호의 폭발을 알고 탈출한 게 분명하며, 이는 일본의 계획된 도발이었음을 방증한다고 주장했다.
우키시마호의 인양 과정에서 밝혀진 놀라운 사실이 있다. 사고 발생 5년 후인 1950년에 일본 해군 당국은 그동안 미뤄왔던 우키시마호의 인양작업을 실시한다. 그런데 일본 해군은 갑자기 인양작업을 전면 중지하겠다고 선언한다. 일본이 인양작업을 중지한 이유는 무게 360톤의 돌 때문이었다. 선체 내 균형장치 부분에 360톤 무게의 돌이 들어 있어서 당시의 기술로는 인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키시마호의 승선 정원이 훨씬 초과된 상태에서 360톤의 돌을 배에 실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며 이는 배를 빨리 침몰시키려는 일본의 의도적인 계략을 알게 해 주는 근거라는 점이 유족들의 주장이다.
또 폭발 사고 후 다행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마이즈루항 근처 타이라 해병대 숙소에서 난민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생존자들이 머물렀던 해병대 숙소에서 의문의 증기 폭발 사고가 발생해 숙소에 있던 50여명의 한국인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모든 게 한국인들을 몰살하려는 일본의 계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증기 폭발 사고가 하필이면 한국인들이 머물던 해병대 숙소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역설하면서, 이는 일본 정부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의 전모를 입막음하기 위해 일부러 생존자들을 공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무수한 의혹을 남기며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이 사건으로 고국 땅을 밟고 싶었던 1만여명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간절한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채 수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은 사건 발생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 한 번도 제대로 시행하지 않으며 희생자에 대한 배상금 청구 소송을 번번이 기각했는데, 우키시마호 폭발은 기뢰 접촉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였음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다 속에 잠들어 있는 1만여명의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에게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첫댓글 일본의 본성을 잊으면 안된다.
전형적인 한국의 권력자들과 같다.
강한자에 약하고 약한자는 한없이 짓밟는.....
세월호 수장사건 쥐.닥년이 불법선거 눈가림용으로 고의침몰한거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