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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이끌어가는 교회(행13:1-3)-2024.3.17
예수님 승천후에 제자들은 성령을 받아야 했다. 성령을 받아야 권능이 임하고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했다. 최소한 예루살렘교회의 개척멤버는 120명이상은 되었으리라.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명이 회개하여 세례 받고, 그 후로 말씀 듣고 회심한 영혼이 남자만 5천명이 되었다. 그리고 후로는 숫자를 계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치 못했다. 기능적으로 볼 때 교회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는 흩어지는 교회로서 취약했다.
그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는 일과 기도하는 일은 잘했으나 흩어질 생각을 안했다. 그리고 차츰 교회가 커지다보니 불협화음이 생겼다. 이른바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의 구제 문제가 교회의 골칫거리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 일곱 안수집사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율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충격요법을 사용하신다. 일곱 집사가운데 가장 신실하고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순교의 제물로 거두어 가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가하신다.
이는 사도행전1장8절의 말씀을 성취시키시기 위한 선교적인 비상조치였다. 사도들을 제외한 믿는 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강제적으로 말이다. 결국 스데반의 일로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교회사적으로 보면 대단히 중요한 교회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을 받게 된 교회요, 선교사를 가장 먼저 파송한 교회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의 3번에 걸친 선교여행의 시작점이요, 마침점이 되었다. 바울은 세 번의 전도여행을 안디옥교회에서 시작하고 안디옥에서 마쳤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제국의 3대도시중 하나였다. 당시 인구가 5십만 명에 가까운 큰 도시로서 그곳에 교회가 세워짐은 기독교가 세계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안디옥 교회를 주도하셨다. 그래서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한 것이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다. 그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아 하나님께 드린 자였으며, 권위자라는 이름을 가진 자였다. 그는 안디옥교회로 파송되면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악명 높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다소까지 찾아가서 데리고 간 사람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피해 다니는 사울을 알아보고 선교의 파트너로 세운 것이다. 사울의 회심에 대한 진정성 문제로 사람들이 모두 꺼려할 때 인물보증까지 서 준 사람이다. 한마디로 바울의 영적인 멘토가 바나바였던 것이다. 바나바는 자신이 안디옥 교회 담임목회자로 부임하면서 사울을 부목사로 청빙한 셈이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의 틀을 갖춘 것이다. 이른바 강소형교회가 된 것이다. 작지만 강한 교회라는 말이다. 교회는 무조건 크다고 건강한 교회는 아니다. 재정상태가 좋다고 건강한 것도 아니다.
교회의 건강상태는 전적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달려 있다. 안디옥교회는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였다. 그래서 교회의 주도권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안디옥교회로 급속도로 바뀌게 된다.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성령의 이끄심이 없다면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릭 워렌 목사는 20세기 교회의 핵심 이슈가 성장이었다면, 21세기 교회의 이슈는 건강한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의 건강함을 기도할 때라는 것이다.
(1) 성령이 이끌어가는 안디옥 교회
안디옥교회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였다.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성령의 이끄심이 없다면 교회도 아니요, 성도도 아니다. 세상에서 쉽지만 가장 어려운 일은 성령 받지 않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요, 반대로 가장 어렵지만 가장 쉬운 일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일이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하는 가장 큰 욕은 ‘성령 받지 말고 예수 믿어라’는 것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더구나 관심 없는 영화를 보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관심 없는 영화는 시작 전 광고시간에 이미 졸기 시작한다. 때문에 성령 받지 못하고 예배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아는가? 그런데 성령 받고 주의 일을 하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지 모른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도 역시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면서 이런 질문을 한다(19:2).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말이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주의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성령 받지 못하고 주의 일을 하니까 교회의 힘이 아니라 짐이 되는 것이다. 즉, 성령 받지 못하고 주의 일을 하면 일군이 아니라 일감이 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반드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전2:4).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성령의 권능을 의미한다. 성령의 나타남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인정하는 것이요, 성령의 능력은 내주하시는 성령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을 말한다. 성령이 임재하심을 믿어야 권능으로 역사하신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가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라는 말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는 복음이 있었고, 복음의 일군이 있었으며, 복음을 위한 비전이 있었다는 말이다.
(2)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안디옥교회는 복음이 있는 교회였다. 교회의 생명은 복음이다. 여러분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는가? 복음의 핵심은 예수다. 예수의 핵심은 구원이다. 구원의 핵심은 영생이다. 영생의 핵심은 천국이다. 천국의 핵심은 하나님이시다. 당연히 하나님의 핵심은 복음이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면 동일한 사이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안디옥교회에 복음이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오늘날 복음이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있다.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서 그렇지 복음이 없는 교회가 많다. 미안하지만 예수 없는 교회는 복음이 없는 교회다.
안디옥 교회가 복음이 있는 교회라는 말은 성령이 이끌어가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령이 주도하시는 교회였다. 보라, 2절에 ‘성령이 가라사대’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성령이 친히 말씀을 들려주시는 교회였다는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3절에는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안수하여 보냈다고 말씀한다. 안수하였다는 말은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4절에는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내려갔다고 말한다. 모든 일정을 성령이 주도하셨다는 말이다. 안디옥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을 받았다는 말이다.
가장 좋은 교회는 성령이 이끄심을 받는 교회다. 안디옥 교회처럼 말이다. 제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혹은 다양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가 아니면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은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를 찾으신다. 이런 교회를 통해 역사하신다. 그리고 영광을 받으신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큰 교회,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만 찾는다. 무조건 큰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물론 작은 교회라고 무조건 건강하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가 진짜 좋은 교회요, 건강한 교회라는 것이다.
‘제자입니까’의 저자 아르헨티나의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재적교인이 170여명 정도였다 한다. 그런데 부임한지 2년차에 6백명의 교인으로 불어났다. 대단한 성장이 아닌가? 우리 보기에는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그런데 목사님에게는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허함이 있었다한다. 그래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산에 가서 기도하던중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한다. 주님의 말씀은 ‘네 교회는 지금 성장한 것이 아니라, 살이 찐 것이다’는 말씀이었다.
살이 찐 것과 성장은 전혀 다르다. 미안하지만 살이 찐 것은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이어트를 시도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냥 살이 찌는 것을 부흥으로 포장하고 성장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진짜 하나님이 바라시는 교회는 크기가 아니다. 혹은 재정의 건전상태도 아니다. 정말 교회가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를 원하신다. 모든 성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관심이 없다. 그냥 즐겁고 재미있으면 좋아한다. 뭔가 교회에서 제공하는 부가적인 서비스에 만족해한다.
사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교인이 있고, 신자가 있으며, 성도가 있다. 어느 교회든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먼저 교인은 교회에 등록한 사람이다. 믿음과 상관없이 출석하는 교회에 등록하면 교인이 된다. 그리고 신자가 있다. 신자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다만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는 것이다. 믿음의 종류도 다양하다. 지적인 믿음도 있고, 감정적인 믿음도 있으며, 의지적인 믿음도 있다. 솔직히 입으로만 믿는 믿음도 있고, 머리로만 믿는 믿음도 있다. 또한 자기만의 신념도 일종의 믿음의 영역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교인이나 신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찾으신다. 성도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성도는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은 자여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교인이나 신자를 성도로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사도행전13장22절을 보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였다. 그러나 사울왕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울은 평생 다윗만 바라보았고, 다윗은 하나님만 바라본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운명을 바뀐 결정적 계기인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시고, 사울은 버리신 것이다.
안디옥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는 것은 먼저 복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이 있다는 말은 예수의 몸이 되는 교회라는 말이다. 즉,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라는 말이다. 아무도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12:3).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였다. 먼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교회요(2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며(3절),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교회였다(4절). 다시 말해 성령의 음성에 민감한 교회요,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한 교회며, 성령의 보내심에도 민감한 교회였다는 말이다. 이보다 더 건강한 교회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모든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교회가 이런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안디옥교회라는 이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3) 안디옥 교회가 성령이 충만한 교회라는 증거
안디옥 교회가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라는 증거는 교회의 구성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구성원들이 매우 다양하다(1절). 유대인과 헬라인이 섞여진 교회요, 신분이나 스펙도 다양했다. 그것은 성령이 하나되게 하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안디옥교회가 선교하기 좋은 교회라는 말은 비빔밥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 목사는 자기 교회는 90%이상이 대졸자라고 자랑했었다. 개인적으로 썩 달갑지 않는 말이었다. 만일 대졸자가 아니면 적응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건강한 교회는 아무나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특수한 상황에 처한 교회가 있을 수는 있다. 군인교회라든지, 혹은 연예인 교회 같은 경우 말이다. 물론 그런 교회도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면 안된다. 그것은 십자가의 정신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안디옥 교회는 좋은 일군들이 있었다. 먼저 바나바라는 걸출한 종이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인물이다. 그는 겸손하고 섬기기를 잘하고 남을 위로하는 자다. 모름지기 주의 종은 그래야 한다. 그래야 누구든지 교회 들어와서 하나 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된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라는 단어에 부담을 느낀다. 특별한 사람들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 선교하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라. 선교나 전도는 같은 것이다.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이 두 단어를 너무 신학적으로만 거창하게 설명하다보니 전도보다 선교를 부담스러워한다.
용어 자체를 가지고 불편해하지 말라. 여러분은 선교사와 선교지의 차이를 아는가? 간단하게 말씀드리겠다. 선교사는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고, 선교지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다. 즉, 선교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선교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둘 중 하나다. 선교사든지, 선교지든지 말이다. 내안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선교지요,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선교사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모두 선교사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선교지가 아닌지 확인해보라. 만일 내 영혼이 선교지라면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령은 친히 두 사람을 지명하여 따로 세우라고 하셨다. 바나바와 사울이다. 솔직히 이 두 사람은 안디옥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기둥 같은 인물이다. 담임목사와 부목사인 셈이다. 아직 안디옥교회는 신앙의 연륜이 짧다. 이제 막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는 교회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보내라니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사람이 없으면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교회가 심각해지지 않을까?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교회는 성령이 책임져 주신다.
만일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면 심각한 지경에 처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부했을는지 모른다. 성령께 민감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께 순종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볼 때도 이런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애써 부인하든지, 혹은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틀에 박힌 거절을 했었을 수도 있다. 우리 솔직해 보자.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거절할 때 자주 사용하는 립서비스가 아니던가?
그런데 성령은 단호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란다. 분명한 미션을 제공하시는 것이다. 결국 선교는 주님의 일이요, 주님의 일은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다만 우리는 그분의 손에 들려진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선교사는 교회가 파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는 성령이 주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선교명령이 하달되면 교회는 순종해야 한다. 안디옥 교회처럼 말이다. 형편이 되든지 아니 되든지 말이다. 만일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두 사람이 빠져버리면 안디옥 교회는 금방 시들어버릴 것 같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이사야서 55장8절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이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 방법도 다르다. 그러면 우리 생각과 방법을 그분께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 그분께서 일하기를 시작하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책임을 져주신다. 안디옥 교회는 즉시 두 사람을 세워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1차전도 여행의 파트너가 된다. 최상의 조합이다. 최고의 파트너쉽이다. 물론 얼마 못가서 둘은 갈라설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의 주도권을 갖고 사역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를 증거 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믿는 자를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신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성령이 친히 주도해 가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성령님께 민감해야 한다. 지금은 성령시대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 과거 우리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배웠다. 구약은 성부시대, 신약은 성자시대, 지금은 성령시대라고 말이다. 시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다만 지금은 성령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한다.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성령이 지배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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