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99E770475ACD13BE28)
▽ 지하 주차장이 여유로와서 좋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292445ACD13B52C)
▽ 12시 금노동이라는 방이 예약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29E445ACD13B52C)
▽ 편대장 영화식당의 본점은 영천에 있다고 한다.
신회장의 고향이 영천이라서 빠삭히 알고 있다.
전국에 분점이 9개소나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317445ACD13B72C)
▽ 11시 50분 우리가 초청한 대구지역 동기생들 중 박영하 대장을 비롯 김관선과 김선영이 도착했다.
우리 둥기생들의 자랑, 동문들의 상징적인 존재 박영하.
그의 소탈하고 번뜩이는 지혜와 능력이 꽤나 희석되어 동기나 동문들로부터 때로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는 누구보다도 박영하 장군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이며 군생활을 통하여 여러번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거나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약간 길고 지루한 내용이 될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박영하라는 사람의 진면목을 여러분께 소개할까 한다.
필자가 82년 육대를 마치고 김천지역에 발령받아 가니 박영하는 얼마전 김천지역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점촌지역으로 옮긴 후였다.
그와 직접 만난 건 없었는데 당시 김천지역에서 근무하던 예비군 중대장들의 입에서 침이 마르도록 박영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친구이길래 그들이 그리도 칭찬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박영하는 대대장을 끝냄과 동시에 50사단 정보참모로 자리바꿈 했다.
당시 50사단장은 천하의 장홍열이란 닉네임이 따라붙었던 깐깐히고 빈틈없고 동키호테식의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다.
그 밑에서 근무했던 많은 사랍들은 그의 그런 행동에 치를 떨기도 했다.
작전참모는 결재받으러 들어가는게 꼭 지옥으로 가는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박영하는 정보참모를 하면서 사단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작전 업무 중 중요한 일은 그가 맡아 해결하곤 했다.
정보참모 보직이 만료되자 작전참모로 픽업되어 사단장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전후방 교류로 전방으로 가게되자 그곳 사단장이 동기였던가...
박영하를 잘 봐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 동기생들 중 1차 대령진급시기에 50사단장을 마친 장홍열 소장은 육본의 관리참모부장으로 영전을 하는데 아~~~ 하늘의 도움이던가...
관리참보부장이 그해 진급 심사위원장으로 들어간다.
대령으로 진급 후 그는 1사단 11연대장으로 간다.
필자는 그때 중령계급장도 달지 못하고 1사단에서 대대 부대대장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1사단에서 만난다.
박영하는 1사단에서 선봉연대와 RCT 최우수 부대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는 기염을 통한다.
1사단이 어떤 사단인가?
다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곳은 육사 출신중에서도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다.
일반 출신 장교들이 근무를 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육사출신장교들 틈에서 들러리 서는 정도로 그곳 생활을 마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는 1사단 창설 이후 일반 장교 출신으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그 뒤 그는 2군사령부 작전과장을 하면서 조성태 사령관을 만난다.
천하의 조성태 장군 밑에서 그는 또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다.
조성태 장군은 빈틈없는 일처리와 깐깐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조 장군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은 끝까지 챙겨주는 의리의 인물이기도 하다.
박영하대령이 장군 진급 해당하는 첫해에 동기생들 중 3명의 선두주자가 물망에 올라 있었다.
배학수, 김군식 그리고 박영하이다.
배학수는 윤용남 장군아 연대장 시절 대대장을 했고 김군식은 그가 사단장 시절 특공연대장을 했다.
박영하는 참모총장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이다.
그중에서 한명을 진급 시킨다면 우리들은 단연 배학수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배학수는 특출한 능력과 완벽한 자력을 갖추었고 총장과는 연대장과 대대장의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배학수는 육사출신 장교들을 우습게 알고 임관 후임이면 그들이 장군이라도 옛날 같은 대령시절처럼 마구 대하기가 일쑤였다.
육사 출신 장교들에게 배학수는 눈에 가사였다.
그런데 배학수는 3사 동문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의리를 잊지 않았다.
육본 권력(?)의 핵심부 장교들은 배학수의 이런 행동을 파벌을 조장하는 행동이라며 총장에게 보고를 한다.
당시 군은 파벌문제를 심긱하게 받아드리던 때
결국 배학수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린채 장군 진급에서 누락된다.
그때 2군 사령관 조성태 장군은 박영하를 진급시키기 위해 동문서주 뛰어다닌다.
그리고 박영하는 김군식과 함께 장군의 반열에 오른다.
몇 년후 박영하는 2군 정보참모로 보직을 바꾼다.
당시 2군 부사령관은 조영길 중장이었다.
부사령관은 한직으로 전역을 앞둔 사람들이 머물러 있던 자리로 알고 있었고 또 실제 그랬으며 그는 육사출신 장교가 아니고 갑종출신 장군이었다.
참모들은 그를 홀대했다.
그런데 박영하는 그리하지 않았다.
수시로 부사령관을 찾아가 보고를 드리고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헌데 기적(?)이 일어난다.
2군 사령부 창설 이후 처음으로 부사령관이 사령관으로 승진을 한다.
조영길 장군은 박영하에 대한 고마움을 갚아주는 의리를 지킨다.
다음번 2군 지역에서는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할 대상을 박영하 한 사람으로 못 박는 일을 감행한다.
우리 동기생들 중 처음으로 소장 계급장을 달고 사단장을 나가는 영예를 거머쥔다.
사단장이 끝난 후 박영하는 육본 감찰감으로 입성하는데 필자가 육본에 있을때 가끔 찾아가면 버선발(?)로 뛰쳐 나오며 반겨주곤 했다.
수수텁털,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은 농사꾼의 아들로 운이 좋아 이 계급에까지 올랐을 뿐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물론 운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운만 좋았다고 그리도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가.
남들이 갖지 못한 비범한 능력과 친화력 그리고 모두를 포용하는 넓은 가슴을 가진 덕이기도 했을 것이다.
감찰감이 끝날 무렵 조영길 장군은 국방부 장관으로 영전하고 박영하는 별 하나를 더 달고 군단장으로 나간다.
교육사령관이 끝나고 그는 3사관학교 1기라는 상징성과 그동안 능력이 조화를 이루며 군에서는 최고 직위인 4성장군에 오르며 군사령관으로 화려한 군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가 그토록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또 하나는 파벌조성과는 거리가 먼 행동으로 일관해온 것이 또한 일익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그 결과는 결국 동문들을 멀리한 것으로 오해(?)를 불러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혹 지금까지 기록한 내용이 잘못 되었거나 또는 오해의 소지가 발생한다면 이 내용은 삭제할 수도 있음을 첨언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418445ACD13B82C)
▽ 박장군...
이제 우리 동문들의 마당으로 들어와 보시지 않으시려나?
27사단 차성도 상 수여식에도 한번 참석해보고 3사관학교 창설 50주년 행사에도 나가 줄 것은 김선영 친구가 간곡히 주문했다.
그런데 박 장군은 다리가 아파 장거리 여행은 어렵고 3사관학교 창설 기념식은 고민을 해보겠다는 여운을 남긴다.
그때 필자의 차로 모시겠다고 했는데 답이 모호하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22E445ACD13B92C)
▽ 우리들의 만남은 장장 2시간 반을 넘기며 흉금을 털어놓는 장소가 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425445ACD13BA2B)
▽ 자 기념사진 한장
좌로부터 김선영, 박영하, 최익환, 신치호, 김관선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2DE445ACD13BB2C)
▽ 김관선이 사과 한박스를 가져와 싸우지 말고 셋이서 나눠 갖으라고 했는데
기권이 성님은 집안 사정으로 불참하고 신회장에게는 깜박 잊고 못 주었다.
횡재(?)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1F7F435ACDD0CC2F)
□ 이동로
- 14:21 편대장 영화식당 출발
- 14:52 비슬산 장암사 도착
- 이동거리 : 9km
- 소요시간 : 31분 <어떤 지체시간 포함>
- 머문시간 : 44분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AE5345ACDBFCA05)
▽ 군에서 한번 출세하겠다고 벼르던 신치호는 전방에서 수색 중대장 시절 권총 오발사고로 사회로 튀쳐 나온다.
그리고 그는 금융게에 몸을 담으며 화려한 출세가도를 달린다.
이곳에서 최연소 지점장을 하였는데 그때 그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개인 절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 왔으니 한번 들렀다고 하여 그리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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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회장이 무언가 자신의 카메라에 담기가 바쁘다.
에이 최회장 이리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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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비석 뒷면에는
![](https://t1.daumcdn.net/cfile/blog/995DF44D5ACD14082C)
▽ 경오년에 극락교라는 다리를 건설할때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신치호와 부인 그리고 아들과 딸의 이름이 보인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58964D5ACD140A2C)
▽ 절이라기 보다는 산장같은 분위기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57C74D5ACD140B2D)
▽ 신치호는 이곳 대구에서 지점장 시절 이 절을 다녔다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5E794D5ACD140C2C)
▽ 벽에는 부처님을 비롯
![](https://t1.daumcdn.net/cfile/blog/995E5C4D5ACD140D2C)
▽ 탱화가
![](https://t1.daumcdn.net/cfile/blog/9956B34D5ACD140E2E)
▽ 걸려있는데
![](https://t1.daumcdn.net/cfile/blog/995D064D5ACD140F2C)
▽ 요상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요 촛불을 사진기로 찍으면 그 속에 눈으로 보지 못하는 용의 모양이 찍힌다는 것이다.
단 불심이 깊은 사람의 사진기에만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아무려면...
왕대가 찍은 사진이다.
아무것도 없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EF0435ACD14102A)
▽ 헐~~~
그런데 신회장이 찍은 핸폰속에는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용 모양의 물체가 찍힌게 아닌가?
세상에 이럴수가
![](https://t1.daumcdn.net/cfile/blog/99C754435ACD141129)
▽ 불가사의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C848435ACD141229)
□ 이동로
- 15:36 비슬산 장암사 출발
- 18:36 우리집 도착
- 이동거리 : 177km
- 소요시간 : 5시간 <조방낙지 저녁식사>
![](https://t1.daumcdn.net/cfile/blog/99D59B505ACDCE7814)
▽ 15:56 북대구 요금소를 통과
![](https://t1.daumcdn.net/cfile/blog/99C63E435ACD141229)
▽ 17:36 계룡요금소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F58435ACD14132A)
▽ 17:45
18시 차인줄 알았는데 18:20분 차이다.
시간이 남는다.
밥 묵고 가자.
조방낙지 식당으로
![](https://t1.daumcdn.net/cfile/blog/99C936435ACD141429)
▽ 식사
그런데 식사도중 신회장은 다 먹지도 못하고 차 타러 떠났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C8AA435ACD14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