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pe Rachado (라차도 곶)은 , KL에서 가까운 해변휴양지인 “포트 딕슨”해안의 남쪽 끝에 위치한 바다로 돌출된 지역으로 아래 지도에 빨간원으로 표시된 지역 입니다. 포트 딕슨은 “느게리 셈빌란” 주 지역인데, 이곳은 “말라카”주 소속으로 주정부는 주변 약 20만평의 산림지대를 “딴중 투안 산림 공원(Tanjung Tuan Hutan Rekreasi)”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라차도 곶 (Cape Rachado)"의 산림공원 입구
1. 5링깃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100여미터 높이의 언덕 정상에 오르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레이다탑 과 함께한“라차도 곶 등대(Cape Rachado Lighthouse)”가 나타납니다.
"라차다 곶" 정상에 위치한 등대 와 레이다 시설
“말레카(Malacca)”를 점령한 포르투갈인 들이 그 곳의 방어를 위하여 1528년 이곳에 최초로 등대를 건설했다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지않고 , 현재의 등대는 155년전 영국인이 건설했다죠.
보안시설 이라 등대의 내부 관람은 허용되지 않고, 말레카 해엽이 한눈에 드러나는 조망을 느긋하게 감상하기엔 등대앞이 비좁습니다. 야자나무가 무성한 주변 산림엔 원숭이들이 곡예를 부리며 이방인의 호기심을 잠시 끌지만, 말레이시아에서야 흔한 관경 이지요.
"라차다 곶 등대" 앞에서 바라본 "말레카 해엽"
바람도 없는데 야자수 잎이 이상스레 흔들리기에 바라보니 원숭이가 뛰놀고 있더군요.
바닷가로 10여분쯤 내려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데, 서쪽 해안 주위엔 오래전에 사용되었던 우물등 뭔가 사연이 있을 듯 하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여느 해안 “곶”과 다름없는 풍경이지요.
"라차다 곶" 서쪽 해안에서 바라본 경치 - 앞의 섬은 "메스짇 섬(Pulau Mesjid)"
서쪽해안 근처에서 보이는 우물
하지만 이곳 앞바다는 약410년전 동남아 식민역사의 주요 분기점이 되는 “라차도 곶 해전(Battle of Cape Rachado)”이 벌어진곳으로 유명합니다.
15세기 중엽이후 적극적으로 해상무역을 시작한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 서부의 “Goa(고아)”를 점령하고 1년후인 1511년 “말레카”를 점령하여 요새화 한후 향신료무역의 중개지로 사용합니다. 고아는인도대륙의 서부에서 생산된 “후추”의 집산지 였고, 말레카는 당시 생산지를 알 수 없었던 “정향(clove)”과 “육두구(nutmeg)”가 거래되는 해상무역의 중개지 였습니다.
그들은 이후에도 꾸준히 노력하여 “정향”과 “육두구”의 유일한 생산지 였던 “말루꾸 제도(Maluku Islands) – 인도네시아 ”에서 직구매에 성공(1513) 하고, 그곳에 이를 전담하는 현지 상관을 설치합니다. 이후 100여년 동안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과 타 유럽국가들의 경쟁을 뿌리치고 향신료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이익을 향유합니다. 15-16세기 유럽시장에서 “정향” 과 “육두구”의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비싼값으로 팔렸기에, 무역상들은 평균 160배의 이익을 남겼다 하죠.
이탈리아 의 도시국가인 "베네치아" 와 "제노아"에 의해 지배되던 향신료의 거래 루트 - 16세기 전엔 중동지방을 육로로 거쳐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말루꾸 제도"는 "몰루카(Moluccas) 제도"라고도 합니다.
12~13세기의 동남아의 지역별 왕조에 의한 주요 해상 교역로로 16세기 초 부터 포르투갈에 의해 시작된 향신료의 생산(말루쿠 제도의 위치가 보입니다) 및 중개지와 유사하지만 "말레카"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대항해시대의 향신료 생산지, 중개지 및 해상 루트를 표시한 세계지도 - 초록색은 포르투갈 식민지이고 숫자는 현지상관을 설치한 연도
당시 3류국가에 불과했던 포르투갈의 횡재를 부러워하던 타 유럽국가들도 향신료 무역에 뛰어드는데 , 스페인과 영국 및 스페인으로부터 막 독립한 네덜란드가 가장 적극적 이었습니다.
영국이 세계최초의 주식회사인 “영국 동인도 주식회사”를 설립(1600)하며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자 네덜란드 또한 650만 길더(현시가 1300억원)의 자본금으로 “VOC ( Verneigde Oostindische Compagnie, 네덜란드 동인도 주식회사)”를 설립(1602)하여 본격적으로 향신료무역을 시도합니다.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과거 "네덜란드 동인도주식회사(VOC)" 본부 - 현재는 암스테르담 대학교 건물로 사용중입니다.
동인도 주식회사(VOC) 로고
1605년 VOC는 요새화된 말레카를 탈취하고자 “용게”제독의 지휘하에 13척의 함정과 20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3번째 함대를 파견합니다.
코르넬리우스 마테리프 용게(Cornelius Materif Yonge) 제독
1606년 5월, 11척의 VOC 함대는 말레카를 포위했고, 이에 맞서 포르투갈은 고아 총독이었던 “카스트로”지휘하에 20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파견하여, 같은해 8월16일 “라차도 곶” 앞바다에서 양 세력이 격돌합니다.
사흘간에 걸친 해전이 끝났을때, 2 :1에 달하는 숫적열세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함선은 각 2척씩 침몰하여 무승부를 기록하지만 포르투갈함대의 사상자가 3배에 달하는 등 VOC의 선전 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목표인 “말레카 탈취”에 실패했기에 네덜란드의 패배로 간주하는데, 이후 반전이 일어납니다.
포르투갈인들에게 말레카를 침탈당해 “조호(Johor)”로 근거지를 옮기고 말레카 회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조호 술탄”은 수적열세인 네덜란드세력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해전 이후 술탄은 네덜란드인들의 용맹무쌍함에 감동하고 적극적으로 네덜란드함대를 돕습니다.
술탄의 협조로 “River Joho(조호 강)”근처로 피항하여 수리를 마친 VOC 함대는 2달후에 다시 포르투갈 함대와 격돌하여 그들 함선10척을 격침시키고 말레카 해엽에서의 해상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후 VOC는 목표를 변경해, 정향과 육두구의 유일한 생산지였던 “말루꾸 제도”를 점령하여 향신료 생산을 장악하고, 자카르타 (당시 “바따비아(Batavia)”)를 1619년 점령하여 현지 상관을 설치하며 차근차근 향신료 무역의 생산지와 중계지를 장악해 들어갑니다. 마침내 1641년 VOC는 “조호 술탄”과 연합하여 “포르투갈” 세력으로 부터 말레카를 탈취하고 현지상관을 설치합니다.
결국 유럽행 향료무역중 “정향”과 “육두구”는 네덜란드의 VOC가 독점하게 되어, 1799년12월31일 회사가 해체될때까지 약200년간 세계 최대 회사였던 그들의 영광이 지속됩니다.
전성기였던 1669년 기준, VOC는 150척의 상선, 40척의 전함, 5만명의 임직원 과 1만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주주들에게 년40%의 배당을 한, 세계 최대회사로 당시 2위의 회사였던 ‘영국 동인도 회사’보다 5배나 규모가 컷다하죠. VOC의 탄생에서 몰락까지 약200년간 주주들에게 년평균 18%의 배당금을 지불 했다하니 향료무역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느낄 수 있지요.
그런VOC가 그렇게까지 성장하게 되는 분기점이 바로 이 “라차다 곶 해전” 이지요.
후일담으로 말레카를 빼앗긴 포르투갈은, 이후 향료무역 에서 이익이 훨씬많은 “정향” 과 “육두구”를 포기하고 “고아(Goa)”를 집산지로 하는 후추 무역만 유지하지만 그마저도 후발주자인 영국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인도대륙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음에도 고아는 1961년 행정권이 인도정부에 이양될때까지 450년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유지되었습니다.
VOC는 민간회사에 불과했지만, 동남아시아가 유럽식민지가 되는데 주역을 했을 뿐 아니라, 근대 지리사에도 많은 흔적을 남깁니다.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Hendrick Hamel)”도 이 회사 소속의 회계사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 제주도에 표류한것이고,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타스만 섬(호주)" 과 뉴질랜드를 발견한 “아벨 타스만(Abel Tasman)”도 VOC 소속 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 곳곳을 둘러보면, VOC의 흔적을 여러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레카시내에 위치한 “성 요한 요새(Fort St. John)”에 전시된 대포나, 원숭이 동산으로 유명한 “쿠알라 슬랑고(Kuala Selangor)"의 “부킷 멜라와티(Bukit Melawati)”에 전시된 대포에도 VOC 로고가 새겨져 있습니다.
말레카에 위치한 "성 요한 요새(Fort St. John)"
"성 요한 요새(Fort St. John)" 안내도
"성 요한 요새 (Fort St. John)" 내부에 전시된 17~18세기 제작된 대포
"멜라와티 언덕(Bukit Melawati)"에 전시된 VOC가 제조한 대포
"멜라와티 언덕(Bukit Melawati)"에 전시된 VOC 로고가 양각된 대포
“라차도 곶 전투”에 관련해서, 1995년 해양발굴조사에서, 약400년전 침몰한 VOC소속의 함선 “Nassau”에 장착되었던 함포 및 여러 유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유품들은 쿠알라룸프르의 “말레이시아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있지만, 청동제 함포 한문은 말레카 근교에 위치한, 과거 술탄왕궁 자리에 세워진 “루쿳 박물관(Kota dan Musium Lukut)”에 전시되어있습니다.
"루쿳 박물관 (Kota dan Lukut Musium)" - 말레카 시 외곽에 위치합니다.
"루쿳 박물관(Lukut Museum)"에 야외 전시된 청동으로 주조된 함포 - "라차도 곶 해전"에서 침몰한 VOC 소속 함선 Nassau소속 함포로 1995년 발견되었습니다.
그 해전으로 양측 합해 천여명의 수병들이 전사하는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치열하게 싸워, 현지인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심어줬다는 네델란드인들의 감투정신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암스테르담과 “라차도 곶”은 직선거리로 10,000km 가 넘는데, 당시 평균 항해시간만 8개월이상 소요되었다 합니다.
아득한 이역의 바다에서 오로지 향료무역의 패권을 장악하기위한 그들의 투혼에 고개숙여지고, 그시절의 격전의 함성이 들리는것 같아 말레카 해엽을 바라보며 한참을 머물었습니다.
"라차다 곶"의 등대앞 해변가
첫댓글 흥미로운 정보 감사드립니다.
흥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길어서 읽을까말까하다가 읽기시작하니 걷잡을수없이 빠져들게되네요. 아주 멋진 가이드와 함께 투어를 한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감 100%입니다.
열독(!)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아름다운 그림과 지도 그리고 역사지식까지 오감을 동원한 안내 감사드립니다. 한번 가봐야겠군요.
그곳에가면 "라차도 곶 해전"에 관한 설명서도 없지만 - 우리가 인천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일전쟁때의 해전에 관심없듯이, 말레이시아도 다른나라의 해전에 관심을 가질리야 없겠지요 - 해양사에 나오기에 관심을 갖고 추적했던 거지요. 흥미있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우와... 수고하셨습니다 글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