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에서 코흘리게 시절 단짝 친구를 만났다. 아니, 단짝 친구라고 소개하기에는 무리가 있겠구나. 그냥, 한 집에 살았던 친구라고 하자.
정확히 말하자면 ‘한 집에 살았던’ 도 아닌 ‘같은 여인숙에서 살았던 친구’ 라고 해야 맞겠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용산의 어느 여인숙 다락방으로 이사를 했고 좁은 마루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둔 방에서 살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 녀석이 녀석의 식구들과 함께 강 건너로 훌쩍 이사를 가기 전까지 난 녀석의 보디가드이자 봄 소풍이나 가을 운동회 날이면 나란히 서서 어깨동무를 한체 사진을 찍고 한 보자기에 도시락을 함께 싸가지고 다니는 형제이기도 했다.
그런 친구를 만났다. 이제는 옛 추억에서 조차 사라졌던 녀석...
무려 27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녀석은 그때처럼 작았다. 27년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난것이다.
친구와 무엇을 할까,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한참을 고민하며 미소만 지어 보이다가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몇이나 낳았는지를 물으려하자 친구는 금세 사라지고 난 잠에서 깨어 아침을 맞았다.
- 문득, 난 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도 안되는 억지 부정을 하고 있는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본다.
아직도, 내가 어린 아이인줄로 착각을 하고 있는것인가? 아니면, 어린 아이 돌아가고 싶은 멈추지 않는 과욕인가?
가끔은 ‘남매’ 를 쓰고 있는 내 머리와 손이 ‘현이’ 와 ‘연이’ 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에는 너무나 더렵혀져 있지 않은지를 고민한다. 그래서, 이제는 ‘남매’ 를 쓰기 위해 앉아 있는 컴퓨터 앞에서 머뭇거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 때문에 어린 아이와 같아지고 싶어하는것이 아닐까?
...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지나친 갈망이 어제의 꿈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 89부 -
연이가 먼저 간 것을 확인하고서 학교에 남아 저녁 무렵까지 축구를 했다. 영준이가 붙잡아서이기도 하지만 연이가 오늘도 나를 기다리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의 심술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늘 연이를 떼어놓고 다녔으면 했는데 요즘들어 막상 연이의 모습이 교문 주위로 자주 보이지 않으니 웬지 기분이 별로다.
그 탓에 축구를 하는내내 운동장 한켠에 볼이 부어 앉아 있는 은경이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잔뜩 부풀어 있던 은경이의 두 볼에서 투덜거림이 쏟아진다.
“야 조현, 너는 남자 애가 왜 그렇게 이랬다저랬다하니?”
녀석이 내게 매섭게 쏘아붙이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내가 녀석이라도 그만큼 화가 났을것이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날에 뙤약볕 아래서 오랜 시간을 앉아 있는다는건 분명 적잖히 짜증스러운 일이었을게다.
“영준이가 자꾸 붙잡아서 그랬어. 나 영준이 한테는 진단말야”
정말 모기만한 소리로 궁색한 변명을 한다. 내가 은경이 앞에서 이렇게 주눅든 모습을 하고 있게 될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면, 왜 일찍 간다고 했니? 나랑 약속한거는 아무것도 아니니?”
은경이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만큼 내 목소리는 작아지기만 한다.
“내가 언제 약속을 했냐? 그냥 일찍 가야된다고만 했지”
“네 입으로 분명히 일찍 갈거라고 했잖아. 그게 약속이 아니니?”
“그게 무슨 약속이야? 그냥 말 한거지”
“뭐든 하겠다고 한거면 그건 약속을 한거라고 했어 우리 엄마가”
음악 시간에 올라가지도 않는 높은음을 억지로 쏟아내기라도 하듯 은경이의 음성은 갈수록 높아간다.
이쯤되면 슬슬 짜증이 날만도 하련만 난 아무런 저항 없이 녀석의 투덜거림을 받아내고만 있다.
녀석의 말이 옳다. 더구나 상냥하고 친절한 단발머리 아줌마가 한 말이라면 말이다.
“너 때문에 내 얼굴 다 타게 생겼잖아. 으이씨”
은경이의 불평은 그칠줄 모른다. 녀석의 뽀얀 두 볼이 정말로 발갛게 익어 버렸다.
불과 며칠전이었다면 녀석의 가방이라도 걷어차고서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녀석에게 화를 내거나 녀석의 가방에 발길질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게, 왜 땡볕에 앉아 있었냐? 나무 그늘도 많은데”
진심으로 미안하고 무더운 여름 한낮에 오랜 시간동안 뙤약볕을 받고 있던 녀석이 걱정스러워 한 말이다.
은경이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흘긴다.
찰랑이는 머릿결에 반쯤 가려진 볕에 그을린 은경이의 발그레한 볼이 연지를 넓게 찍어 바른것처럼 곱다.
“칫, 남자 애가 왜 그렇게 말이 많니?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거지”
녀석의 새침한 표정까지 만화 속 주인공 처럼 귀엽고 예쁘기만하다. 그래서 난 녀석이 아무리 화를 내고 목청을 높여도 다른 아이들을 대할때와 달리 지금은 녀석을 힘으로 제압하지 않는다.
이제 그만 녀석의 화를 풀어 주어야겠다. 이럴땐 다른 어떤 말 보다 녀석이 바라는 것 처럼 미안하는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가장 좋겠다.
“그래, 미안해”
“흥”
“은경아, 내가 잘 못 했으니까, 이제 그만 화내고 우리 집에 가자. 내가 뽑기(달고나) 만들어 해줄게”
이제 녀석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반쯤 들어 나를 내려다보듯 한다. 그리고는 더욱 새침해진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갈고리눈을 하고 있던 눈초리가 어느새 내려갔다. 이제야 화가 풀리려는 모양이다.
“칫, 진작 사과를 하지”
“알았어, 미안해”
녀석은 치겨든 고개를 내리며 이번에는 책가방을 내민다.
“야, 얼른 가방이나 들어줘. 나 땀나려고 해”
체념하듯 군말없이 녀석의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받아 든다. 그런데, 기분은 좋다.
괜히 뽑기를 해준다고 했나?
국자를 까맣게 태워먹으면 엄마에게 야단을 많이 맞을텐데 말이다. 뽑기를 해주는것 말고 다른 재미거기를 찾아볼까 싶지만, 좁디 좁은 다락방에서 그만한것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새 연인숙 간판이 즐비한 우리 동네로 접어든다.
은경이와 한참을 나란히 걷는동안 쌀포대와 역전 앞 광장에 널려 있을 빈 맥주병과 콜라병은 까맣게 잊혀져 버렸다.
첫댓글 드디어 나온 남매ㅠㅅㅠ!! 기다렸습니다~>ㅁ<!! 기다린만큼 재미있게 봤어요+ㅁ+!!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ㅁ<
ㅠㅠ재밌어 죽겠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