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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11)-2024.3.24
요한복음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것이요, 13장부터 21장까지는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그런데 고난주간은 한 주간이지만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 사역의 3분지1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죄인을 위해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죽어야 다시 사는 것이요,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양한 각도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죄사함을 주려고 오셨다, 천국복음을 증거 하려고 오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러 오셨다, 섬기려고 오셨다, 검을 주려고 오셨다, 불을 던지러 오셨다, 병을 고치러 오셨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을 삼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으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하나님이 내안에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이 되는 것이지요. 임마누엘되어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이지요. 데살로니가전서5장10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자기와 함께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자기와 함께 사는 것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담이후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 없게 된 것이지요. 허물과 죄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살리사 함께 살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살려면 반드시 우리 모든 죄를 대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 죄 있는 곳에 들어와 사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죗값을 지불하신 것이지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율법도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당한다’고 말씀합니다(신21:23, 갈3:13).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죽음의 방법들이 있지만 나무에 달린 죽음의 방법을 택하신 것이지요. 나무십자가를 통한 죽음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무겁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당할 저주를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만 지불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처리하신 후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 보좌우편으로 승천하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량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전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영원한 죽음을 맛보아야 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아서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아서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 전에는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이제는 예수를 믿지 않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믿음이 없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보좌 우편에서 우리 죄를 영원히 탕감하시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로 다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가 나를 성전 삼으시고 심령 안에 왕으로, 주인으로, 전부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과 한 생명되어서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그분의 몸이 되어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결론은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서5장12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도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입니다(요14:6).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장차 육신의 장막이 벗어진 후에만 들어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사는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며 사는 것이 진정한 천국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입니다(눅17:21). 때문에 지금 천국이 안되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막연히 죽음이후에 들어가는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의 속성은 미래적인 천국도 있지만 현재적 천국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의 상당수가 현재적 천국을 도외시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아주 특별한 유월절
오늘은 종려주일이지만 개인적으로 종려주일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려주일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종려나무와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큰 연관성이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혹시 종려나무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이 희석되지 않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마치 성탄절의 이미지가 예수님보다 산타크로스에 집중하는 것과 비슷한 염려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요.
다만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고난주간에 일어난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하나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십자가를 지시기전 목요일에 행하신 사건인 것이지요. 그 유명한 성만찬과 세족식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1절은 그 사건을 설명해주는 나레이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 가셨습니다. 종려나무를 꺾어서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어린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식사하시는 도중에 갑자기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후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제자들은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 때가 옴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때는 십자가에 죽으실 때를 말합니다. 본문1절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절은 다시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때를 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자기 때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숨기셨지요. 그러나 이제는 자기 때가 왔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만찬의 자리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그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이번 유월절을 통해서 마감된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이지요.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하는 3대 절기입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은 해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지켜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절기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반드시 지켜야하는 절기였던 셈이지요.
(2)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런데 이번 유월절은 예수님께 아주 특별한 절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유월절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양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오기 전 어린양을 잡아 자기들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피를 보고 재앙을 넘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지 않는 집은 모든 장자를 죽이시는 것이지요. 어린 양의 피가 묻어있지 않는 애굽의 모든 장자는 그날 밤에 모두 다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은 흠이 없어야하고 일년 된 수컷이어야 합니다. 그 어린양은 장차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르쳐 말씀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던 것입니다(요1:36).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번 유월절에 십자가의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를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유월절은 남달랐던 것이지요. 이때를 위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말하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일 금요일에 십자가를 지셔야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착잡했을까요? 아쉬웠을까요? 아니면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뿐입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뿐이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 동거 동락하시면서 기쁘고 즐거운 일도 많았을 것이요, 아쉽고 서운한 일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은 사랑입니다. 이른바 자기 사람들은 사랑하시는 마음이지요.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모든 백성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이름입니다. 이른바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를 위한 이름이라는 뜻이지요.
물론 본문에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근시안적인 의미는 열두 명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확대시켜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백성들을 의미하지요. 그것을 더 크게 확대시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로 작정된 자까지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열 두 명의 제자 중에는 도저히 자기 사람들 중에 편입될 수 없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예수를 팔아넘기는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만 사랑하셨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가룟 유다는 포함되지 않았어야 될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자기 사람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기 사람들만 사랑하셨을 테지요. 그러나 우리 보기에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우리 인간은 아무도 사람의 종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최후 종말은 주님만 아시거든요. 때문에 주님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표현은 지금 이 땅에 살아 있는 현재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종말론적으로 보면 주님은 자기 사람들 외에는 사랑치 아니하십니다. 자기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총칭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한 영혼의 종말을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주님의 시각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마음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한 영혼이 육신적인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3) 최후만찬과 세족식
‘끝까지’라는 헬라어는 ‘텔로스’입니다. 그런데 이 ‘텔로스’라는 단어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의미입니다. 각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을지라도 장차는 반드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사람이 예비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요. ‘끝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각 사람의 육신이 끝나는 날까지를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각 사람에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최종의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때까지 참고 사랑하시는 마음이 ‘끝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예수를 영접치 않은 영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래참고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우리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끝까지’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강세적인 의미입니다.
최대한 팔을 넓게 벌려서 포용하는 마음입니다. 아이들이 흔히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만큼 땅만큼’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끝까지’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습니다.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사는 모든 인간은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지구촌에 거하는 모든 족속과 모든 열방을 ‘끝까지’ 사랑하고 계십니다. 각 사람의 개인적인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한 순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요, 조건없는 사랑이며, 영원한 사람입니다. 이 모든 사랑이 ‘끝까지’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끝까지’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제자들에게 세족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세족식은 단순히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고 닦아주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냥 수련회나 부흥회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단순히 낮은 자로 섬기고 겸손을 드러내는 일시적인 쇼가 아닙니다. 세족식은 십자가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족식을 통해 죄사함의 원리와 죄사함을 받은 자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른바 새언약의 공동체 회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지요. 쉬운 말로 이 땅에서 우리가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세족식에는 주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원리가 들어 있거든요.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세족식을 통해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대개 제자들이 스승을 씻겨주는 것이 상례인데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자기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주님 앞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여 주님께 자기들의 발을 맡긴 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무슨 일인지 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베드로는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순수한 편이지요.
베드로가 주님 앞에 손사래를 치며 절대 자기 발은 씻을 수 없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자 주님이 세족식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이지요. 세족식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영적인 의미입니다. 세족식을 통해 주님이 가르치는 말씀은 이미 목욕한 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자이지요. 이른바 원죄에서 구원함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많은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사는 우리는 자범죄를 범하고 삽니다. 물론 그 자범죄는 우리의 구원과는 다른 죄라 할지라도 구원받은 우리에게 반드시 씻어야 할 죄가 있는 셈이지요.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짓는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런 죄는 발만 씻어도 되는 죄입니다. 세족식의 원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족식에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 십자가의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해줄 것입니다. 세족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비록 지금 당장은 제자들이 주님의 이런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이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7절). 여기서 ‘이후에’라는 말은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친히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해주신다는 말이지요(요14:26).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예수님은 세족식을 통해 자기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직은 모릅니다. 세족식의 진정한 의미도 모를 뿐 아니라, 십자가를 지실 때의 주님의 마음도 전혀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해를 당하시자마자 모두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장차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요,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려 하신 것이지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하여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끝없는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서 시작하셨고, 성령을 통해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게 됩니다.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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