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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멋쟁이옷보다 중요한 헤어스타일
조선시대 사람들의 옷차림은 머리에서부터 출발한다. 남자는 상투를 어떻게 틀었는지, 망건을 어떻게 둘렀는지에 따라 한양의 ‘멋쟁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자 역시 머리를 얼마나 높고 크게 만들었는지에 따라 ‘미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남자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세수하고 상투를 트는 일이다. 늘 하는 일이고 누구나 트는 상투지만 멋진 상투를 만들기 위한 남성들의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더욱이 멋진 상투는 그냥 되지 않는다.
조선의 남자들은 10대 중후반에 관례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상투를 틀게 된다. 이때는 대체로 머리숱이 많다. 이럴 때는 먼저 빗살이 성근 얼레빗과 참빗을 이용해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밀어야 한다. 이후 적당한 머리숱이 만들어지면 기름을 발라 터럭 한 올이라도 빠져나오지 않도록 정수리로 머리카락을 모아 하나로 묶는다. 이때 상투의 높이는 5~8cm, 직경은 2.5cm 정도의 ‘알’만한 크기가 되도록 짜주는 것이 포인트다. 〈그림 1~3〉
그렇다면 반대로 머리숱이 없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오히려 넓은 이마를 가진 경우에는 출세상이라 하여 선호하였으니 큰 문제가 없다. 또 상투가 작다 할지라도 알만한 크기의 상투관을 쓰면 되니 누구나 멋진 상투를 만들 수 있다.
상투를 튼 후에는 망건을 두른다. 망건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없도록 이마에 두르는 헤어밴드이다. 망건의 앞은 망사로 되어 있다. 망건의 위를 ‘당’, 아래를 ‘편자’라 하며, 여기에 달린 당줄을 잡아 당겨 관자에 걸고 다시 상투로 올려 망건을 고정시킨다. 이때 멋쟁이들은 망건을 어찌나 단단히 맸는지 망건을 풀고 나면 이마의 위아래가 0.3cm정도 파여 자국이 남을 뿐 아니라 상처가 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피가 흥건할 정도였다. 망건의 원래 목적인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동여매는 용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망건이란 “머리털을 싸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바싹 죄어 매서 이마에 눌린 흔적이 있게 해서는 안 되고, 늘어지게 매서 귀밑에 흩어진 털이 있게 해서도 안 되며, 눈썹을 눌리게 매지도 말고 눈꼬리가 위로 치켜들게 매지도 말라”고 했다.
〈그림 4〉 강이오의 초상화를 보자. 망건을 얼마나 단단히 쳤는지 귀 위로 망건의 편자 부분이 눌려 옆머리의 위아래가 볼록하게 올라와 있다. 지금은 사모로 인해 가려졌지만 망사 속 이마는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평평해졌을 것이다. 지금의 보톡스 효과와 같지 않을까? 이뿐 아니다.
〈그림 5〉를 보면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얼굴 전체가 위로 당겨져 있다. 최적의 리프팅 효과이고, 젊음은 덤이다.
〈그림 4〉 이재관, 〈강이오 초상〉 부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5〉 미상, 〈조씨 삼형제 초상〉 부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그림 6〉 살쩍밀이(출처: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다만 안타까운 것은 망건을 풀고 나면 피가 날 정도로 단단히 매다 보니 편두통을 불러오기 일쑤였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살쩍밀이’라는 도구가 있어 이 고통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살쩍밀이는 대나무나 대모(玳瑁) 또는 서각(犀角) 등의 뿔로 만들며 길이는 11cm, 너비는 1.3cm 정도이다〈그림 6〉. 원래 살쩍밀이는 관자놀이 주변의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망건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한 용도였다. 그러나 편두통이 왔을 때 살쩍밀이를 망건 속으로 밀어 넣어 망건을 슬쩍 들어 올리면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편두통에서 자유로워진다. 살쩍밀이 덕에 멋과 품위까지 챙길 수 있었으니 남자들의 망건 치기는 참을 수 있는 즐거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갓은 쓰지 않고 얹어야 제맛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두른 후에는 탕건을 쓴다. 또 외출할 때는 반드시 갓을 착용한다. 갓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머리 위에 쓰게 되는 모정 부분으로 대우 또는 총모자라 하고, 다른 하나는 챙에 해당하는 양태이다. 이 둘을 연결하면 드디어 갓이 완성된다. 전문화·분업화로 만들어진 고급의 갓은 아주 가는 말총으로 총모자를 만들고,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양태를 만든다. 그 무게가 15g을 초과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갓은 비를 맞거나 바람만 세게 불어도 금방 망가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의 갓은 평생을 붙어 다니는 영원한 후광으로 유행에도 민감했다. 조선 후기에는 총모자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졌으며, 양태는 어깨를 넘을 정도로 커졌다. 뿐만아니라 머리가 총모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모정이 좁아지다 보니 갓은 머리에 쓰기보다는 얹어 놓는 수준이 되었다〈그림 7〉.
갓을 쓰지 않고 얹어 놓다 보니 갓에 붙어 있는 끈이 없으면 갓이 뒤로 넘어가거나 옆으로 쓰러지기 일쑤다. 그러니 ‘갓을 앞으로 숙여 쓰고 챙 밑으로 남의 기색을 흘겨 살피지 말라고 하였으며, 갓을 뒤로 제쳐 쓰지도 말고, 끈을 움켜잡아 매지도 말고, 흩어 매지도 말고, 귀에 내려오게 매지도 말라’고 했다〈그림 8, 9〉. 여기에 멋 좀 낸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슴 밑에까지 길게 패영을 내려뜨린다.
패영은 갓을 장식하는 또 하나의 부속물로 멋과 재력을 표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패영은 주로 수정, 마노, 유리, 상아, 대모, 대갓 등으로 장식하기에 그 값이 만만치 않다. 또한 입영에도 등위가 있어 당상관은 반드시 패영을 쓰고 당하관은 반드시 석영(石纓)을 쓰도록 전례에 실려 있으나 사치풍조가 심해지면서 등위가 없어져 무관의 당하관조차 호박 영자를 하고 다녔으므로 당하관은 마노나 수정으로 만든 영자로 제한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지켜지지 않고 사대부 남성들의 사치품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패영의 사치는 날로 심해져 호박으로 만든 패영의 비용이 걸핏하면 수백 냥을 넘어 문제가 되었다.
더욱이 길게 늘어뜨린 패영은 걸을 때마다 가슴을 툭툭 친다. 걸음걸이에 신경이 쓰일 뿐 아니라 빨리 걸을 수는 더더욱 없다. 오히려 점잖은 걸음걸이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귀찮을 때도 있다. 그때에는 간편하게 말아서 귀에 걸어두면 된다. 이제 한결 간편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할 수도 있고, 실용도 챙겼으니 이만한 멋내기가 또 있을까〈그림 10〉.
〈그림 10〉 신윤복, 〈청금상련〉부분(출처: 간송미술관)
예술품으로 승화된 우리의 백의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옷은 백의이다. 개항기 조선을 방문했던 많은 외국인들은 조선인들의 옷에 각별한 인상을 남겼다. 엄격히 말하자면 옷보다는 흰색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인 조르주 뒤크로(Georges Ducrocq, 1874~1927)는 조선인들이 입는 흰색은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색상으로 여기에서 창의적 정서가 생성된다고 하였으며, 프랑스 화가 조세프 드라 네지에르(Joseph de La Neziere, 1873~1944)도 조선의 흰색은 백옥같이 밝은 흰색에서 거칠고 투박한 흰색까지 다양한 흰옷의 물결이 만들어 내는 하모니는 마치 음색의 향연 그 자체라고 하였다.
한국인이 주로 사용한 직물은 목면, 명주, 모시, 삼베 등이다. 이들의 처음 색은 흰색이 아닌 소색(素色)이다. 처음에 이들 옷감으로 옷을 지으면 거칠고 투박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옷감을 얼마나 자주 빨았느냐에 따라 소색은 더욱 밝은 흰색이 된다. 또 어떻게 손질했느냐에 따라 거칠고 투박한 옷감은 광택이 흐르는 비단이 된다. 즉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하면 목면은 목공단이 되고, 모시는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고 투명해진다. 여기에 여인들의 바느질 솜씨를 더해 완성된 흰옷은 한국인의 체격을 당당하게 보이는데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탈리아 외교관인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1876~1948)는 한국인의 체형 조건을 일본인이나 중국인과 비교하면서 평균 이상의 신장과 힘든 일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체력을 지녔다고 하였으며,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 역시 한국의 남자들은 몸매가 날렵하고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표정은 침착하다고 하면서, 한국인들은 잘생긴 종족이며 체격도 좋은 편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랬을까?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인의 평균 신장이 겨우 5피트 4인치(156cm)이지만 그들의 체격을 커 보이게 한 것은 언제나 쓰고 다니는 검은 색의 높은 모자와 흰색 옷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흰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사람들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예술품’이라고 극찬하였다. 외국인들조차 한국인의 색으로 인정한 흰색은 결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결정체로 한국인의 백의에는 앞으로 더 많은 가능성이 담보되지 않을까?
집필자 소개이민주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선 시대 책례의에 나타난 의식절차와 복식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한국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대표 논저로는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조선왕실의 미용과 치장』, 『치마저고리의 욕망』,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성호사설』 「만물문」에 보이는 복식기록검토-시각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개항기 외국인의 기록과 삽화를 통해 본 우리의 복식문화」 등이 있다. 조선 시대 복식을 통해 전통 시대 사람들의 차림새와 멋내기를 이해하고 읽어내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검푸른 두루마기, 대나무 갓, 글자를 수놓은 가사 -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진 승려들의 복식”
“나무 지팡이에서 비옷까지, 그러나 잊은 것이 꼭 하나 - 며칠 동안 행장을 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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