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혼돈이고 카오스고 케이아스입니다.
창세기에서 부터 혼돈이 시작되었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은 절규하였으나
"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려다
미쳐 버렸네."
인류에게는 구원의 빛이 있어
프로메테우스는 세상을 밝히는 불을 주고
단테는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고
"올바른 길을 잃고 헤메지 말고 자신의 별을 찾아 가라."
대승불교에서는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남순동자를 통하여
무명의 혼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여 주었으나
범인에게는 쉽지 않은 것이죠.
무협지가 태어난 이유는
아무리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풍진 세상에서
마음의 이상향만이라도 찾고 싶어서 였으리라 믿습니다.
발은 대지에 굳건하게 버티고 있어야 하지만
눈은 언제나 별을 향하는 소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몇년 전 무협지에서 이런 글을 보고
엄청 감동하여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의뢰비는?"
'이미 받았소."
"언제"
"아주 오래 전에"
전생에서
주인공이 땀내 나고 더러운 점소이로서 비를 맞고 있었는데
이 여자가 개의치 않고 우산을 같이 씌워준 것이죠.
그 점소이가 이번 생에서 그것을 기억하고 보답한 것이지요.
"아주 오래 전에"
무협지의 강호에 대하여 황희경 교수가 쓴 글인데 가슴에 와닿습니다.
유협.
협객이 많아야 세상은 살기가 좋은 텐데.
하나님의 섭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메시아나 협객이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
‘강호’가 어드메뇨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일엽편주를 타고 강호에 떴다” ‘장자’ ‘사기’에 등장한 강호는 말 그대로 대자연
점차 은자나 평민이 거한 인간세상 뜻해
세상의 불평 품은 지식인들이 협객으로 꿈 품으면서 강호는 무협지 속 상상의 공간으로 변모
<소오강호>의 감독 쉬커(徐克)는 이런 질문에 답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은원(恩怨)이 있기 마련이고, 은원이 있는 곳엔 강호가 있다.”
짧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있는 곳이 곧 강호라는 것이다.
아무튼 강호라는 말은 이처럼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체적인 강과 바다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점차 외연이 확대되어 사방 천지를 지칭하게 된다. 지금도 중국어에서 ‘쩌우장후(走江湖)’라고
하면 사방 각지를 떠도는 것을 말한다.
유동성. 그리고 <장자>나 범려의 이야기에서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강호란 말에는
이미 은둔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강호는 어느덧 조정이나 묘당(廟堂)과 상대적인 곳,
즉 은자나 일반 평민이 거하는 ‘인간세’를 지칭하게 된다.
“묘당의 높은 곳에 거할 때는 백성을 걱정하고, 강호의 먼 곳에 처할 때는 임금을 걱정한다.”(범중엄)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있지만 같은 동양인 일본에서는 강호(일본어로 고코)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해서 한번 찾아보았더니 세간이나 세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중국적
표현이라고 되어 있었다. 영어로 번역하기는 참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중영사전을 한번 찾아보았다.
all corners of country! 시골 구석구석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재미있었다.
사실 중국을 위시한 동양의 지식인들은 심각한 내적 모순에 시달려야 했다.
이른바 입세(入世)와 출세(出世)의 모순이다.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는 조정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막상 조정의 높은 자리에 앉는 순간 ‘강호 ’의 자유로움과 한적함을 맛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강호에 있으면?
강호에 있는데 아무도 찾아와 주는 이 없다면?
자유롭고 한적해서 좋지만 얼마 지나면 점차 적막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사실 유비처럼 삼고초려하기도 쉽지 않지만 제갈량처럼 피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잘못하면 영원한 적막 속으로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옛부터 성현은 모두 적막했노라(古來聖賢皆寂寞)”라는 이백의 시구를 암송해도 고독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오호 통재라! 병이 없어도 신음하기도 하고, 루쉰처럼 외치기도 한 것이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면?
전에 <유몽영>의 “흉중의 작은 불평은 술로써 삭일 수 있으나 세상의 큰 불평은 칼이 아니면 풀 수 없다”는
구절을 소개한 일이 있지만,마오처럼 직접 ‘칼’을 뽑은 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인은 칼을 뽑을 수 있는 용기나 힘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무협지다. 사실 무협지를 쓴 사람들은 무술의 고수가 아니라 문인이었다.
강호는 이제 문인들에 의해서 무협들이 활약하는 상상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강호라는 소설적 무대에는 지식인의 이상과 좌절, 분노와 욕망 등이 투영된다.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천고의 문인들도 모두 ‘협객의 꿈’이나 ‘강호의 꿈’을 꾸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무협지는 이른바 무협지 작가만이 쓰는 것도 아니었다.
-----------------------------------------------------------------------------------------------------
大江東去浪淘盡 (대강동거랑도진) 장강은 동으로 물결따라 사라져갔네
千古風流人物 (천고풍류인물) 아득한 옛날을 풍미하던 인물들과 함께
故壘西邊人道是 (고루서변인도시) 옛성 서쪽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三國周郞赤壁 (삼국주랑적벽) 삼국시대 주유(周瑜)의 적벽대전 터라고
亂石穿空 (란석천공) 험난한 바위 절벽 하늘을 뚫을 듯 솟아있고
驚濤拍岸 (경도박안) 기슭을 부숴 버릴 듯한 파도
捲起千堆雪 (권기천퇴설) 천 겹의 물보라로 휘감아 올린다
江山如畵 (강산여화) 강산은 그림 같은데
一時多少豪傑 (일시다소호걸) 그 시절 호걸은 몇몇이었던가!
遙想公瑾當年 (요상공근당년) 아득히 당시의 주유(周瑜)를 떠올리니
小喬初嫁了 (소교초가료) 소교가 처음 시집왔을 때
雄姿英發 (웅자영발) 영웅의 풍채 당당했었네
羽扇綸巾談笑間 (우선윤건담소간) 하얀 깃털 부채에 윤건 쓴 제갈량과 담소하는 사이
强虜灰飛煙滅 (강로회비연멸) 강력한 조조의 군대는 재되어 날고 연기처럼 사라졌네
故國神游 (고국신유) 적벽을 거닐며 옛일을 회상하노라니
多情應笑我 (다정응소아) 정이 많은 내가 참으로 우습구나
早生華髮 (조생화발) 이렇게 일찍 머리 세어버린 내 모습
人生如夢 (인생여몽) 인생은 꿈과 같은 것
一尊還酹江月(일준환뢰강월) 한잔 술을 들어 강물 속의 달님에게 부어 주노라
오랫동안 초서를 쓰지 않다가 마침 취기를 타고 붓을 달리니 술기운이 움직여
손끝으로부터 글씨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久不作草書適乘醉走筆覺酒氣動動從指端出也)
- 동파취필(東坡醉筆) -
첫댓글 따장동취.
江山如畵 (강산여화) 강산은 그림 같은데
一時多少豪傑 (일시다소호걸) 그 시절 호걸은 몇몇이었던가!
人生如夢 (인생여몽) 인생은 꿈과 같은 것
一尊還酹江月(일준환뢰강월) 한잔 술을 들어 강물 속의 달님에게 부어 주노라.
오랫동안 초서를 쓰지 않다가 마침 취기를 타고 붓을 달리니 술기운이 움직여
손끝으로부터 글씨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久不作草書適乘醉走筆覺酒氣動動從指端出也)
- 동파취필(東坡醉筆) -
올려주신 영상이 오래전에 본 영화 적벽대전인거 같아요.
그때 저런시가 있었는지 기억에는 없고 활활 타오르던 배,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조조만 기억에 남았네요.
덕분에 영상과 함께 시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맞습니다.
어떤 분이 적벽대전에 나오는 장면에다가 소식의 적벽회고를 넣었네요.
영화 적벽대전에는 단가행이 나옵니다.
건안 칠자 중의 한명인 조조가 자신이 직접 쓴 시를 부릅니다..
對酒當歌, 人生幾何(대주당가 인생기하)
술을 들며 노래한다. 인생이 길어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譬如朝露, 去日苦多(비여조로 거일고다)
비유하면 아침이슬 같으니, 지나간 날이 너무나도 많구나.
慨當以慷, 憂思難忘(개당이강 우사난망)
슬퍼하며 탄식해도, 근심 잊기 어렵구나.
何以解憂, 唯有杜康(하이해우 유유두강)
무엇으로 근심 풀까? 오직 술이 있을 뿐.
처음 뵌 닉입니다
메시아나 협객이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까지 읽었습니다 죄송 합니다
아직도 각 나라 각 사람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대상들도 있을겁니다
메시아라도 따라주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줘야 하는데 별로 없죠
각 종교들도 한 10에 10 정도만 실천 하는듯 합니다
협객
옛날 무협지에서 나오는 강호의 고수
그런 쪽이죠?
칼싸움 잘~하는 내공있는 칼잡이로써 의를 겸한 무사
요즘은 말발의 달인들이 여의도 국회유투버 등에서 활약을 한대요
근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의 옳은 소리
바른소리 당연한 상식어 소리를 잘하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시대가 21세기 공동체와
단체가 아닌가 합니다
다~허물과 죄로 찌들려서 좋은게 좋은은
것으로 암욱적 합의를 하여 책임없는 희안한 공간을 만들어 돈으로 엮어 놓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네로 사촌 여동생 처럼 힘으로 의인의 목을 쟁반위에 올려 받는 인생도 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 새긴 은쟁반에 옥구슬
이라는 잠언처럼
옳다 틀리다 다르다
줏대 있는 공동체 대빵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호온도온의 소설 <큰바위 얼굴>
큰바위 얼굴을 기다렸으나 나이가 들고보니 본인이 큰바위 얼굴 이었다는 이야기지요.
결국 메시아나 협객이 있으면 좋겠지만,
개개인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면 세상은 더욱 좋지 않을까요?
건데 생명체는 존재하기 위하여 살아가기에
인간 또한 생명체에 속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ㅎㅎㅎㅎ 좋아요
일필 휘지라고하나요,
눈썹이 휘날리도록 막 달리기
홍콩무협의 창조주는 김용이 아닐까 싶어요
창조주님 구약성서는 의천도룡기
신약성서는 소오강호 이쯤 아닐까요 .
왜 그리 강호를 떠도냐구 묻지를 마라
사문난적의 불경죄를 범하는 길이니.
원전에 운명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
김용이 공산당에서 근무하다 홍콩으로 갔는데
아부지가 51년에 공산당한테 숙청을 당했어요
아마도 원죄론적으로 성장기의 영향 아닐까?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부질없는 겨
김용의 의천도룡기는 너무도 길고 심오해서,
제가 짧은 의천도룡기를 쓴 적이 있는데 올려 드릴께요.
신약이 소오강호라,
갑자기 소오강호의 호탕한 노래가 생각납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은 말 그대로 중원이고 중국이었는데
창해일성소.
https://www.youtube.com/watch?v=WKl1HWN2VO8
PLAY
@청한 점심 잘 드셨죠?
김용은 정말 노벨상을 줘도 몇번 줬어야 될 인물예요.
홍콩 신문명보의 창업자이자 주필이고 세계 느와르 무협이
거짐 전부 이사람 소설에서 나왔자너요
엄한 나라 프랑스와 영국에서 훈장을 받았어요
@아까 의천도룡기를 처음 영화한 작품은 봤는데
아직까지 김용의 소설은 끝까지 읽어 본 작품이 하나도 없네요.
전투력을 불러 일으키는 아까님의 글을 보고,
다음에 김용 소설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즘 최인호의 유림 보고 있습니다.
'강호'는 자연의 대유법이라고만 떠드는 일을 하다가
문득 재미 없어질 때에는 이 무협지 얘기까지
떠올라 삼천포로 빠질지도 모르겠어요.ㅋㅋ
무쇠칼 대신 이제는 다양한 칼을 쥐는 시대지만
그래도 내적 갈등으로
크고 작은 칼을 뽑지 못하는 순간은 많죠.
자기 자신과의 적절한 타협부터 한 후
더 강한 정체성으로 무장해서
작은 칼이라도 뽑는 용기부터 길러야겠어요.
차올라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을 따라....
다른 사람의 글이나 댓글이 단초가 된 듯
그 흐름이 확장되어 이렇게 풍성하게 이어지는
좋은 글을 볼 때면
제가 좋아하는 모카크림빵을 반 조각 달달하게
먹을 때의 그 미소가 나오네요.
빗소리가 길게 흐르는 날에도......
최근에 본 무협지에 나오는 귀절입니다. 15권 정도 분량인데 김용의 소설에 버금가는 내용이더군요.
인상깊은 귀절을 발췌했습니다. 읽어 보십시요.
------
“형, 천하가 나를 저버리지 않으면 나도 천하를 저버릴 필요가 없소.
저들이 나를 위해 죽기를 원하니, 나 심랑은 그들의 목숨을 책임져야만 하오.
나방이 불빛을 향해 뛰어들고,
어둠 속에 수많은 반딧불이가 추락하는 모습은 마음을 전율하게 만들고,
그게 영원히 찬란한 장면인 것처럼 보이오.
허나 나는 그런 찬란함을 추구하지 않소.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원치 않소.
형, 나는 형이 죽기를 마음먹었고,
모두가 죽기로 마음먹었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나란 사람은 비극을 가장 싫어 한다오.
희생이란 것은 물론 전율적인 일이지만,
나는 당신들 모두를 지켜 주겠소!
나 심랑은 죽을 때까지 밥을 얻어먹고,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기생오라비인데
당신들이 나를 억지로 천하의 희망, 천하의 주인 노릇을 시키려는 거요.
당신들이 하는 짓은
양가집 규수를 핍박하여 기생질하게 만드는 거요!
그러니 나는 모두를 지키겠소.”
하늘은 아득한 것처럼
사람의 본성(本性)도 마찬가지로 심오했다.
하늘은 너무 깊고 아득하여
그 하늘에 빠져 버릴까 봐
차마 자세히 궁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까?
또 어디로 갈까?
우주의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끝은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현묘한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사람은 자기가 처한 현실을 쉽게 소홀히 하게 된다.
사람의 본성도 그처럼 심오하여
더더욱 깊이 궁구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깊숙이 그 속에 빠지게 된다.
완벽한 사람이 없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천사가 살고 있지만,
악마도 같이 살고 있다.
천사가 나타날 적에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부끄러워하지만,
악마가 나타날 적에는 심히 두려워질 정도로 변한다.
본성의 이러한 타락을 탐색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직시한다는 의미고,
자아 부정을 한다는 의미이며,
자신의 의지를 망가뜨린다는 의미였다.
대개 강한 사람은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고,
자신이 한 일이 바르다고 확신한다.
허나 그들이 정말로 옳은 일을 했을까?
자신의 마음을 직시할 수 없어서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청한
본인의 생각. 감정.판단들이
경험치에 따라 세월 따라 좀 변하는걸 느낍니다.
자기점검 속에 중심점이 살짝 이동하며
어느 정도의 유연한 태도를 입는 것도
가치 있게 가꾸고픈 자기 삶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청한님의 글을 보니 요샌 독서방에서 조용하시지만
이전에 활발하시던 만득이님이 생각나는데
종종 무림의 세계를 훑으시어 건져내신 것들을
한 보따리씩 풀어 놓으시곤 하던 분.
청한님과 티키타카가 빛나게 이뤄질 분이
아까님에 더해 한 분 더 계시답니다.